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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8)화 (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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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은 들은 체도 않고 말을 돌렸다.

“얘는, 말을 해도 참. 그나저나 넌 엄마를 계속 여기 세워 둘 생각이니? 어서 문을 열지 않고?”

“집에 들일 생각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인우의 단호한 거절이 혜영의 성질을 건드렸다.

“나한테 병균이라도 있니? 넌 내가 너랑 영우를 차별한다고 생각하지? 아니? 차별하고 있는 건 너야.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본가의 네 방에도, 지금 네 집에도 한 번을 못 들어가게 하고, 나만 보면 벌레 본 듯 피해 버리는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정이 붙겠니?”

“하… 정 안 붙여도 되니까 가시라고요.”

인우의 진절머리 난다는 태도에 혜영은 혀를 쯧 차며 제 가방을 뒤적였다.

“이거나 전하러 온 거야. 얼른 받아. 나도 얼른 가게.”

혜영이 건넨 건 고급스러운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낚아채듯 받아 든 인우는 확인도 하지 않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우리 회사에서 하는 행사야. 당연히 너도 와야 하지 않겠니?”

‘우리 회사.’ 

그 네 글자에 반감이 더 커진 인우가 비꼬듯 물었다.

“그쪽들 회사 행사에 제가 왜 가야 하죠?”

거의 폭발 직전이던 혜영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나도 참, 남의 자식한테 잔소리하는 거 싫어서 가만있었는데 얘, 나도 너 부르기 싫어. 네 아버지가 초대장 주면서 잘 지내나 좀 확인하고 오래서 꾸역꾸역 온 거야!!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내일 그 행사엔 꼭 와야 할 거다. 아버지에게 영영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으면.”

“안 갑니다. 저 대신 영우 형이 잘해 줄 텐데요, 뭘.”

인우는 정말 갈 생각이 없었다.

온갖 사람들이 모이고, 온갖 냄새가 나는 그런 자리에 한 번도 나간 적 없었다.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왔다.

“내일 네 파트너가 유라야. 그래서 아버지가 꼭 나오라고 하신 거니까 나오든지 말든지 네가 알아서 해. 나도 이제 지친다, 네 고집.”

혜영은 할 말을 다 마치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입씨름을 하는 사이 해나의 효과가 다한 건지, 혜영이 떠난 자리에 그녀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잠깐. 내일, 오후 2시…… 잘하면 되겠는데?”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려던 생각을 바꾼 인우의 눈에 총기가 돌았다.

“그래. 어차피 내일 말하기로 한 거.”

인우는 내일 행사에 갈 것이다.

그들에게 폭탄이 될 소식을 들고.

***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2시,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들이 다들 한 장소에 모여 있다.

한주 그룹에서 주최한 행사답게 어느 것 하나 세심하게 손쓰지 않은 구석이 없다. 모두가 완벽하고 고급스러운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여성이 있었다.

많은 남자의 시선이 향하지만, 또각또각 구두 소리는 회장 부부 내외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유라가 모델 같은 생김새와 다르게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자 한주의 회장, 영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유라,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그럼요. 회장님도 잘 지내셨죠? 인우 오빠는요?

유라가 인우에 대해 묻자 영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거두고 혜영에게 물었다. 

“어제 초대장을 갖다주지 않은 거야?”

혜영이 억울해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예요. 집까지 찾아가 전해 주고 왔는걸요. 뭐… 오기 싫은가 보죠.”

영호의 기분이 가라앉자 유라가 애교스럽게 분위기를 띄웠다.

“에이, 오빠가 안 올 리가요! 제가 조금 이따 전화해 볼게요. 걱정 마세요, 회장님.”

유라의 애교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영호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인우 그 녀석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점점 더 비뚤어지는 것 같구나. 어릴 적엔 그렇게 착하고 잘 웃던 녀석이. 이제는 웃음은커녕 얼굴 보기도 힘이 드니…. 유라 같은 싹싹한 며느리가 들어와 그 녀석과 함께하면 참 좋으련만.”

영호의 말에 유라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그러게요, 회장님. 근데 저 같은 며느리는 찾기 힘들죠! 제가 들어가면 모를까.”

유라의 애교 섞인 말투에 영호의 미소가 돌아왔다.

“그렇지? 나는 우리 유라가 며느리로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녀석이 무슨 선을 보겠다고 참….”

유라와 회장 부부 내외가 하하, 호호 대화를 나누는 와중, 혜영이 누군가를 보고 손짓했다. 그걸 보고 달려온 이는 그녀의 아들, 주영우였다.

“회장님, 오셨어요.”

영우가 깍듯이 인사를 하자 영호가 영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녀석, 회장님은 무슨. 아버지라 부르래도.”

“아무래도 회사 행사 자리니까요.”

영우가 예의를 차리며 말하자 영호가 영우의 어깨를 감싸고 부러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더 아버지라 불러야지. 괜히 뒷말해 대는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너도 한주의 아들이라는걸.”

“감사합니다, 아버지.”

영호와 영우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영우를 한 번씩 돌아봤다.

“그래, 그래. 인우가 네 반만 했으면 좋으련만.”

“아닙니다. 인우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걸요. 어? 유라도 왔구나.”

영우는 유라를 향해 인사하며 부드럽게 화제를 넘겼다.

영우가 인사를 건네자 유라가 예쁘게 눈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응, 오빠. 오랜만이네.”

“너는 어째 그 나이에도 키가 점점 더 크는 것 같다.” 

영우가 장난스레 던진 말에 유라가 영우의 어깨를 작은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죽을래! 안 그래도 바지가 다 짧아져서 고민인데!”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회장 내외와 유라, 영우 네 사람은 이미 완벽한 가족 같은 그림이었다.

“어? 주인우 아냐?”

갑자기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고 옆에서 인우의 이름이 들려오자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입구로 향했다.

“왔구먼.”

인상을 찌푸릴 대로 찌푸린 인우가 뚜벅뚜벅 영호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살갑기는커녕 무뚝뚝한 인사에도 영호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이런 행사에 늦으면 쓰나.”

기분 좋은 영호가 괜히 애정 섞인 잔소리를 하며 어깨를 툭툭 치려는데, 인우가 어깨를 살짝 틀어 손을 피했다.

“큼… 이제 중요한 사람들도 다 왔으니, 시작하지.”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 버리고, 민망해진 영호가 얼른 행사를 시작하자며 자리를 떴다.

“오빠! 올 거면 나한테 진작 연락하지!”

“인우야, 오늘은 와 줬네?”

유라도, 영우도 인우에게 한마디씩 말을 걸었지만 인우는 한 사람에게만 대답했다.

“응, 형. 오늘도 안 오면 형이 더 시달릴 것 같아서.”

“감동이다, 야.”

유라의 표정이 썩어 가는 걸 보지 못한 인우와 영우는 꽤 친밀한 인사를 나눴다.

“오빠! 나도 있거든?”

그 사이를 유라가 비집고 들어오자 인우가 뒷걸음질을 쳤다.

“알아. 아니까 더 가까이 오지는 마.”

그런 인우의 태도에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유라는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그 모습을 보던 영우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두 사람을 분리했다.

“유라야, 미안한데 나랑 인우는 뒤에 가서 준비를 도와야 할 것 같네. 못 푼 회포는 행사 끝나고 풀자.”

“그래, 그럼.”

더 이상 매달렸다간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

체념한 유라가 애써 쿨한 척하며 돌아섰다.

또각또각. 유라의 구두 소리가 멀어지자 인우의 인상이 한결 풀렸다.

“넌 꼭 유라만 보면 더 그러더라. 애 민망하게.”

영우가 한소리 했지만, 인우에게 들릴 리 없었다.

인우의 머릿속엔 온통 이 냄새 나는 곳을 벗어나 해나에게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다.

한주 그룹에서 개최한 자선 모금 행사로 소외된 계층에게 전달할 기부금을 모으는 자리라고 말은 했지만, 실상은 다들 그룹 회장에게 눈도장 찍는 자리일 뿐이었다.

두통이 몰아쳐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인우에게 회장 내외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였으니 저녁이라도 같이 들자.”

“그러죠, 뭐.”

한시라도 빨리 제 할 말을 하고 해나에게 가고 싶은 인우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영호는 그런 인우와 달리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웬일이야. 이런 자리에도 나오고, 식사도 같이하고. 네가 드디어 이 아비 맘에 드는 짓을 하는구나.”

제법 다정한 영호의 말에도 인우의 찌푸린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그래서, 식사는 어디서 합니까.”

“흠… 오랜만에 집에서 들자. 아무래도 집밥이 좋겠지.”

“네. 그럼.”

영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인우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홀을 벗어났다. 

자신의 차에 올라탄 그는 익숙하게 손목에 제 향수를 뿌렸다.

“오해나… 간절하네, 진짜.”

집보다는 못해도 늘 탈출구 정도는 되어 줬던 차 안인데.

어제는 해나가 있었고, 오늘은 없다는 이유만으로 두통이 평소보다 더디게 가신다.

신경질적으로 운전대를 잡은 인우는 주차장을 그대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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