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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7)화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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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해나와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인우 본인조차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있었다.

긴가민가하다 해나가 정확하게 집어내자 확실히 체감했다.

“그런데 해나 씨를 만나고, 두통이 멎으니 저도 모르게 평소와 달라지네요. 아까 저한테 욕하셨을 때, 욕을 얻어먹고도 그냥 재밌더군요. 달라진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에요, 지금은.”

인우의 진심 어린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해나가 말을 돌렸다.

“저 앞에서 세워 주시면 돼요. 금방 나올게요.”

“천천히 하세요.”

해나가 내리고, 인우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 좋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편안하고, 숨통이 트이는 느낌.

“두통이 없는 게 이런 기분이었지.”

해나가 자리를 비웠지만 효과는 아직 유효한지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인우가 해나를 기다리며 오랜만의 여유를 느끼던 때, 해나는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툭툭 해?”

사실 집 앞에서 내리는 게 더 편했겠지만, 인우가 내뱉은 말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급히 내려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막 뱉는 건 반칙이지.”

사실 인우가 싸가지 없기로 유명하면서도 선 자리가 끊이지 않은 건 재력, 능력, 한주 그룹 외에도 그의 외모가 한몫했다.

“달라진 세상에서 사는 기분….”

차갑기 그지없던 인우의 얼굴이 저 말을 뱉는 순간엔 청초하게까지 느껴졌다.

“아, 더워.”

연신 손부채질을 하던 해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집 나온 지 하루도 안 됐는데, 이제 못 산다고 생각했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반갑냐, 집아!!!”

인우가 집을 팔지 말라고 한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아빠와 처음 살게 된 집다운 집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에 눈물까지 찔끔 흘렸었다.

“아! 시간이 얼마나 됐지?”

바로 시계를 확인한 해나가 급하게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빠를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두기도 했고, 자신을 기다릴 인우도 신경 쓰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아빠의 물건과 해나 자신의 물건까지 챙기다 보니 짐이 한 트렁크가 나왔다. 

끙끙대며 1층으로 내려온 해나는 한 번 더 집을 올려다봤다.

“잘 기다리고 있어. 아빠 꼭 빨리 나아서 같이 돌아올게.”

말은 씩씩하게 했지만 드르륵, 드르륵 트렁크를 끌고 가는 해나의 발걸음이 축축 무겁게 처졌다.

***

“죄송해요. 너무 오래 걸렸죠.”

“아닙니다. 빨리 오셨네요.”

해나가 짐을 챙기러 간 지 30분은 되었을 텐데 차 안의 냄새는 해나가 있을 때와 같았다.

그동안 인우는 눈을 붙이고 잠깐의 쪽잠까지 잤다.

3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인우는 오랜만에 개운한 느낌을 받을 만큼 깊게 잠들었었다.

“캐리어는 어디에 놓을까요?”

해나가 다가와 창문을 두드리자마자 인우는 주저 없이 내려 해나의 트렁크를 한 손으로 받았다. 

“제가 넣을게요. 먼저 타세요.”

인우가 트렁크를 건네받을 때 닿은 손이 다부졌다. 순간 스친 인우의 향이 시원하기도, 달콤하기도 했다.

얼굴에 화악 열이 오르는 기분에 해나는 괜히 조수석에 앉아 차창만 바라봤다.

자리로 돌아온 인우는 곧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럼 절차는 어떻게 할까요?”

“…….”

꽤 길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힐끗 조수석을 쳐다보니, 해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인우는 빨리 이 결혼을 해치우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차마 잠든 해나를 깨우지 못했다.

“…오늘 하루 힘들었겠지.”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린 인우는 평소보다 천천히 차를 몰았다.

“다 왔어요.”

병원에 도착해 이미 다섯 번은 더 불러 봤지만, 아무리 불러 봐도 해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해나 씨, 다 왔어요.”

이대로라면 오늘 밤은 주차장에서 새워야 할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뱉은 인우는 손을 들어 해나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한 손에도 다 잡히는 어깨에 살짝 흠칫한 인우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해나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큼… 해나 씨.”

잠결에 인우의 손을 아침에 깨워 주는 아빠의 손으로 착각한 해나가 어깨를 잡은 손을 주물렀다.

인우의 놀라 굳은 손을 연신 주무르면서도 눈을 뜨지 못한 해나가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응… 아빠… 몇 시야…?”

별안간 해나에게 손이 잡힌 인우는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렸을 적을 제외하고 처음 다른 사람에게 손이 잡혔다. 게다가 상대는 옆에서 이렇게 예쁘게 자고 있었다.

잠을 깨려 씰룩이는 입과 감은 눈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아빠?”

대답이 없어 실눈을 뜬 해나의 눈앞에 보인 건 그녀에게 손을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우였다.

“악!! 죄송해요.”

소스라치게 놀란 해나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을 던져 버렸다.

“하도 안 일어나시길래… 깨우느라 어깨 살짝 흔든 것뿐입니다.”

인우는 억울했다.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나 싶었다.

“정말 죄송해요. 잠결에 아빤 줄 알고…. 아, 제가 잠들어서 저희 이야기도 다 못 했죠.”

“괜찮습니다. 계좌 번호만 주세요. 지금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메모지가….”

주섬주섬 메모지를 찾는 손을 저지한 인우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부터 저장하죠. 계좌는 그 밑에 적어 주세요.”

“아, 네.”

톡톡 휴대폰을 두드리는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인우가 작게 말했다.

“손이, 참 작네요.”

“예?”

뜬금없는 말에 해나가 또 ‘예?’를 시전했다.

“아뇨. 그냥 혼자 뱉은 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 예….”

어색하게 대답하며 전화번호를 저장한 해나가 휴대폰을 돌려줬다.

인우는 저장된 해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곧 전화벨이 울리고, 그는 휴대폰을 두어 번 흔들며 말했다.

“저장하세요, 제 번호.”

“네.”

해나가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찾기도 전에 인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오는 길에 생각을 해 봤는데요.”

“네.”

“우선 각자의 집안에 결혼 사실을 알리고, 상견례를 잡죠. 다른 절차들은 그 후에 하고요.”

“네. 좋아요. 인우 씨는 언제 가족들한테 알리시려고요?”

“전 내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말해야 더 이상 절 괴롭히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인우는 한유라와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강요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한유라는 정말 싫었다. 대학생 때부터 그를 좋아한다고 끈질기게 따라다녔지만, 한유라와 그 집안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견딜 수 없이 머리가 아팠다.

선이라도 보면 닦달을 좀 덜했는데, 해나를 찾았으니 쇠뿔도 단김에 뽑을 작정이었다.

“그럼 저도 내일 말해야겠어요. 아빠가 간암 검사부터 해야 하는데, 절차가 꽤나 번거롭더라고요. 만약 수술까지 한다면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제일 중요한 건 해나 씨 아버지의 건강이니까요.”

“고마워요. 주말에 간병인 구하고, 다음 주는 며칠 연차 쓸 것 같아요. 각자 가족들한테 알리고, 월요일에 다시 뵙고 계획 짜면 될 것 같아요.”

“네. 캐리어 꺼내 드릴게요.”

해나가 차에서 내리고, 인우는 트렁크에 실어 놓은 캐리어를 꺼냈다. 캐리어를 해나에게 건네주고 뒤돌아 가려는데, 해나가 제 작은 손을 내밀었다.

“악수나 한번 하죠.”

뜬금없는 악수 제안에 인우가 해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봐도 작고 예쁜 손이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서 아직도 얼떨떨하긴 하지만… 그래도 거의 제 구원자이신데 악수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 잘해 봅시다, 주인우 씨.”

한번 피식 웃은 인우가 조심스레 해나의 손을 맞잡았다.

“잘해 보죠, 저의 구원자이기도 한 오해나 씨.”

인우는 씩씩하게 손을 흔들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해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해나에게도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있던 하루겠지만, 저에게도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던 하루였다. 저 특이한 여자가 나타나고 결혼까지 약속하다니.

인우가 태어나 처음 저지른, 제일 충동적인 짓이었다.

***

“아빠! 나 왔어!”

병실에 도착한 해나가 커튼을 걷고 밝게 인사를 건넸지만, 형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네…. 아빠 안색이 이렇게나 안 좋았네….”

부쩍 마르고 얼굴이 노랗게 뜬 형우를 보며 해나는 정신을 다잡았다.

“내가 꼭 잘 해내서, 아빠 빨리 낫게 하고 아빠랑 행복하게 살 거야.”

보조 침대에 앉아 형우의 손을 잡은 해나는 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해나가 이미 깊은 잠에 든 그 시각, 인우는 막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편안하고 기분 좋았던 인우의 앞에 불청객이 서 있었다.

인우의 새엄마이자 명실상부 한주의 안주인, 혜영이었다.

“왜 오셨어요.”

잠깐이지만 사라졌던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기분에 인우의 말투도 자연스럽게 날이 섰다.

“엄마가 아들 집에도 못 오니?”

혜영의 말에 기가 찬 듯 조소를 내뱉은 인우가 비꼬아 대답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은 어디에 두시고 저 같은 걸 보러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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