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6)화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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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저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내가 더 필요하다.

난 돈이 필요한 거지만 저 사람은 내 자체가 필요하다.

서로 필요에 의해 하게 되는 결혼이 돈 때문에 팔려 가듯 하는 결혼보단 훨씬 나았다.

결혼이 성립되자 마음이 급해진 인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절차부터….”

그런 인우의 말을 싹둑 끊은 해나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 전에.”

또 ‘그 전에’. 

인우는 이제 갈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계약서를 좀 작성했으면 해요.”

해나는 어릴 적부터 뭐든지 확실히 하는 게 좋았다.

사회에 나와 보니 확실히 하는 데엔 계약서만 한 게 없었다.

이 결혼이 거의 계약과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질러 본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오늘은 일단 계약서부터 작성하는 걸로 하죠.”

해나의 말이 먹혔다. 

일단 계약서를 작성해 놓으면 훗날 이혼을 하더라도 문제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

결혼을 승낙한다면 꼭 계약서를 작성하리라 다짐해 뒀던 해나가 가방에서 공책과 펜을 꺼냈다.

“일단 오늘은 약식으로 먼저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절차를 밟기 전에 변호사를 통해 공증받죠.”

“네. 편하실 대로.”

해나는 먼저 용지 제일 위쪽에 ‘계약서’라고 크게 적었다.

“호칭은 그쪽을 갑, 저를 을로 할게요.”

“그것도 편하실 대로.”

“일단 제 첫 번째 요구 사항은 계약금 3억이에요.”

“네. 문제없습니다. 작성하세요.”

해나는 펜을 야무지게 쥐고 또박또박 1항을 적어 내렸다.

“그리고… 집은 안 팔기로 했으니 굳이 제가 그 댁으로 안 들어가도 될 것 같아요.”

“아뇨. 그건 안 됩니다.”

안 될 말이지.

뭐든 좋을 대로 하라던 인우가 처음으로 해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 해나 씨가 필요해서 이 결혼을 하려는 겁니다. 집 안에 해나 씨가 있어야 제가 그곳에서나마 편히 있지 않겠어요?”

낭패다. 그냥 가끔 만나 두통이나 가라앉혀 주면 되겠지 싶던 해나의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럼 이게 첫 번째 마찰이네요. 그러니까 제가 꼭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지금으로선 해나 씨의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까요.”

“저도 출근은 해야죠. 밤에는 아빠도 돌보러 가야 하고요.”

“시간 조율을 해야겠네요.”

“저는 8시 30분까지 출근하고, 야근이 없으면 6시, 있으면 8시 반에 퇴근을 해요. 그리고 간병인이 퇴근하시는 밤엔 아빠를 돌볼 생각이에요.”

“저는 평일에는 8시 20분에 집에서 나갑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 8시에 집에 들어가고요. 그렇다면 아침 7시부터 출근 전까지 1층 거실에 계시고, 밤 9시부터 11시까지 1층 거실에 계셔 주시면 어떨까요. 저녁엔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좋아요. 적을게요.”

하루 세 시간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해나가 펜을 들자, 인우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아버님이 병원에 계시니 이 정도로 조율을 했지만, 아버님이 퇴원하고 건강을 되찾으시면 더 긴 시간 동안 집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이 얼마나 긴 건지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해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밑에 아빠 퇴원 후에 다시 시간 조율을 하겠다고 적을게요.”

“좋습니다.”

이로써 2항이 완성되었다.

“사생활에 대한 간섭은 어디까지 허용하시죠?”

“전 저와 조율한 시간만 지켜 주신다면 밖에서 무슨 일이 있든 상관 안 합니다. 기사에만 안 오르면 돼요. 그렇게 되면 제 회사 주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요.”

“네. 저도 밖에서 누굴 만나든, 언제 들어오든 신경 안 써요. 전 들어오시든 안 들어오시든 정해진 시간에 1층에 있다 올라갈게요.”

“네. 깔끔하니 좋네요.”

3항은 마찰 없이 금방 작성했다.

“가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까요?”

“상견례와 결혼식 때 한번씩 뵙고, 명절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저의 가족이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민폐를 끼치면 저에게 말만 해 주세요.”

“명절 때는 찾아뵙는 걸로 하죠. 사실 전 명절 때, 인우 씨가 저희 집에 저랑 같이 한번씩 갔으면 좋겠거든요.”

“만약 해나 씨가 원하시면 해나 씨 집만 오가는 걸로 하죠. 제 집은 제가 가기 싫거든요.”

“흠… 아무리 저희가 계약서를 쓰고 결혼 행세를 한다지만, 표면적으로는 사이좋은 부부처럼 보였으면 해요. 그래야 각자의 부모님께 필요로 인한 결혼이란 걸 들키지 않죠.”

해나는 진심이었다. 

애초에 결혼할 생각이 없어 시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아빠가 돈 때문에 이런 결혼을 했단 걸 알게 되면 죄책감에 잠도 못 잘 게 분명했다.

아빠 앞에서 사이좋은 부부를 연기하는 데에 인우가 도움을 준다면 해나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네요. 제가 아직도 이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걸 그 사람들이 알아 봤자 좋을 거 없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는 그렇게 정리하죠.”

<계약서>

주인우(이하 ‘갑’이라 함)와 오해나(이하 ‘을’이라 함)는 결혼 생활에 대하여 상호간의 명확하고 신뢰성 있는 계약을 체결하고, 서로 성실히 이행할 것을 문서로 작성하여 ‘갑’과 ‘을’이 확인하고 각 1부씩 보관한다.

1. 갑은 을에게 계약 체결 즉시 3억의 계약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2. 을은 아침 7시-출근 직전, 밤 9시-11시까지 1층 거실에서 생활하기로 한다.

-을의 아버지 퇴원 후에 이 시간은 다시 조율하기로 한다.

3. 갑과 을은 집 밖에서의 사생활이 기사에만 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일절 관여하지 않기로 한다.

4. 상견례와 결혼식 후, 명절에 서로의 부모님을 찾아뵙기로 한다. 가족 포함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이좋은 부부인 것처럼 행세하기로 한다.

* 지내면서 추가해야 할 항목이 생기면 그때마다 새롭게 협의하여 정하기로 한다.

“어때요? 괜찮으시면 두 장 다 갑 자리에 서명해 주세요.”

“나쁘지 않네요.”

계약서를 건네받은 인우는 결재 서류에 서명하듯 기계적인 손짓으로 서명했다.

해나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서명한 계약서를 나눠 가짐으로써 그들의 결혼 계약이 시작되었다.

“아, 우리 사람들한테 어떻게 만났다고 둘러대죠?”

“꼭 둘러대야 합니까? 선보고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되죠.”

“믿겠어요? 제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는 걸? 저희 아빠도 안 믿으실 거예요. 게다가 돈 때문에 결혼한다는 걸 아시면 죄책감을 느끼실 거고요.”

“그럼 제가 해나 씨에게 반했다고 하죠.”

“네???”

“따지고 보면 맞잖아요.”

“어디가 맞아요. 저한테 반했다기보단 그냥… 집에 들여놓을 인간 탈취제 같은 거잖아요.”

인우의 해나에 대한 생각이 정확히 간파당했다.

민망함에 목을 가다듬은 인우가 다시금 당당하게 말했다.

“어,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해나 씨에게 반하고, 결혼하자고 쫓아다녀서 해나 씨가 결혼해 준 거라고 하죠.”

“그럼 저희 아빤 좋아하시겠지만, 인우 씨 부모님께선 싫어하시지 않겠어요?”

“상관없습니다. 제가 뭘 해도 워낙에 싫어하시는 사람들이라.”

“그럼… 죄송하지만 저도 그렇게 말 맞출게요. 이 계약에 대해 저희 아빠가 모르셨으면 좋겠거든요.”

계약서도 썼고 이야기도 끝냈으니 일어나야 했다.

그렇지만 인우는 오랜만에 느끼는 냄새와 두통 없는 상태가 아쉬워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이렇게 일어나죠. 저도 집에 들렀다 다시 병원에 가야 해서요.”

해나가 공책을 가방에 넣고 일어서려 하자 인우가 따라 일어났다.

“댁까지 데려다드릴게요.”

인우의 갑작스러운 친절에 해나가 놀라 큰 소리로 거절했다.

“아뇨!! 괜찮아요!”

그 과장스러운 거절에 무안할 법도 한데, 인우는 뻔뻔하게 핑계를 늘어놓았다.

“계약 체결 즉. 시. 계약금을 드려야 하니 계좌 번호도 받아야 하고, 절차는 언제부터 밟을 건지도 의논해야 하는데 해나 씨는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이동하면서라도 의논하는 게 최대한 시간 낭비를 덜 하지 않겠어요?”

그럴듯한 인우의 핑계에 결국 어색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타세요.”

인우의 차는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눈에 띄었던, 깨끗하다 못해 빛이 나는 차였다.

“어떻게… 신발이라도 벗고 탈까요?”

더럽히면 안 될 것 같아 100퍼센트 진심으로 묻는 해나를 보며 인우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냥 타시면 됩니다.”

보란 듯이 먼저 올라탄 인우가 타지 않고 뭐 하냐는 듯한 눈짓을 보내자 해나가 조심스레 올라탔다.

“이렇게 깨끗한 차는 또 처음 봐서요. 혹시 결벽증 같은 거 있으세요?”

“깨끗한 걸 좋아하긴 하지만 결벽증까진 아닙니다.”

“혹시 있으시면 계약서에 써야 해서요. 진짜 아니시죠?”

“네. 많이 더러운 편이신가 봅니다?”

인우의 말에 해나가 펄쩍 뛰었다.

“아니거든요? 그냥 보통 정도거든요?”

“그렇다고 합시다. 해나 씨도 보통 정도. 저도 보통 정도.”

생각보다 티키타카가 잘되는 둘이었다.

매너도 있고 배려도 할 줄 아는 듯한 인우의 모습에 해나가 실수로 속마음을 내뱉었다.

“누가 인우 씨가 싸가지 없기로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 정도까진 아니시네요.”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어서 해나가 인우의 눈치를 살폈다.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 인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유명한 거 맞습니다.”

본인 입으로 인정하는 걸 보니 상처받진 않았나 보다.

안도한 해나가 미안함에 칭찬을 덧붙였다.

“아닌데. 매너도 괜찮고 배려도 해 주시고. 이 정도면 나이스 한 거 아닌가요?”

“해나 씨니까요.”

“지금 작업 거시는 거예요? 웩!”

인우의 직설적인 말에 어색해짐을 느낀 해나가 장난식으로 받아쳤다.

그러나 인우는 작업이 아닌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평소엔 항상 두통이 있으니까요. 두통이 심해 만사가 짜증 나고, 예민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싸가지 없다고 느끼는 것도 맞는 말이에요. 꽤나 히스테릭하게 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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