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5)화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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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해나를 바라보던 인우가 급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몰려오는 병원 냄새를 시작으로 카페로 오는 길, 심지어 카페 안에서도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인우였다.

지독하게 괴롭히던 냄새가 모두 사라지는 걸 느끼자마자 거짓말처럼 해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커피를 가지러 가는 그 짧은 시간, 해나와 멀어질수록 온갖 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커피를 가지고 해나가 앉은 테이블로 갈수록 냄새가 또 사라졌다.

하루에 두 번이나 그 효과를 확인했으니, 더 이상 재고 따질 이유가 없었다.

어딘가 비장한 해나의 표정을 보자마자 머리보다 입이 먼저 말을 뱉었다.

“아, 네. 저도 그것… 때문에 전화드린 거였으니까요.”

얼떨결에 하루에 두 번이나 결혼하자는 프러포즈를 들은 해나가 내심 안도했다.

첫 번째로 들었을 땐 그냥 미친놈 같기만 했었는데, 이제 이 결혼이 절실해진 해나는 그사이 인우의 마음이 바뀌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럼, 절차는 어떻게 할까요.”

인우의 조급한 물음에 해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셨으면 해요.”

“네. 말씀하시죠.”

“음… 우선 제가 이 결혼을 하기로 생각한 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전 지금 돈이 필요해요.”

인우가 그 말에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선을 볼 때랑은 굉장히 다른 태도여서.”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천천히 하세요.”

“음, 선보고 집에 돌아갔을 때,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빠가 쓰러졌다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가니, 아빠가 간암일지도 모른대요. 원래 간경변증을 앓고 계셨거든요.”

뜻밖의 이야기에 인우는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말을 잇는 해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다.

“근데 6개월간 병원을 안 다니셨다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아빠가 사기를 당했대요. 그 안엔 아빠가 20년간 모은 돈, 제가 적금 부어 모은 돈, 은행 대출까지 포함돼 있어요. 불행이 엎친 데 덮쳐 지금 아빠 병원비, 빚, 사기꾼을 잡는 일까지…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횡설수설하며 겨우 말을 마친 해나가 눈을 굴려 인우의 반응을 살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인우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래서 제게 이 결혼이 필요해졌어요.”

“그럼 생각해 둔 방도도 있는 겁니까?”

해나는 인우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우선, 지금 집을 팔고 조금 더 작은 집으로 옮길 거예요. 제 짐은 일단 그쪽 집으로 옮겼으면 해요. 어차피 전 오전엔 출근을 하고 오후엔 아빠를 돌볼 예정이니 거슬리지 않을 거예요. 마주칠 일도 없을 거고요.”

어차피 결혼을 할 거, 집에 인간 탈취제를 들일 생각이었는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니.

“그리고 한주 그룹 지분은… 허락만 해 주신다면 팔아도 될까요? 물론, 그룹에 해가 되지 않을 만한 사람에게요. 저는 지금 한주 전자 마케팅 팀장직을 맡고 있어요.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7년이 채 안 걸렸어요. 일단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나면, 지금 연봉과 앞으로의 승진 가능성을 봤을 때, 남은 은행 대출 이자랑 원금은 어떻게든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까지가 제 생각이에요.”

해나의 일장 연설이 끝났는데도, 인우는 대답도 없이 아직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테이블만 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인우가 노려보고 있는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린 해나가 조심스레 인우를 불렀다.

“주인우 씨?”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인우가 해나를 바라봤다.

“어떠세요? 제 상황이 많이 안 좋은데, 그래서 결혼을 못 하겠다 하셔도 전 어쩔 수 없어요.”

인우가 승낙을 할 것인지, 거절을 할 것인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밑바닥까지 다 드러낸 해나는 이제 거꾸로 그와의 결혼이 절실한 상황이 됐다.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

이 결혼이 단 하나의 돌파구였는데,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런 조건을 듣고 결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해나는 착잡했지만, 구질구질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이 대안은 실패했으니 이제 다른 대안을 생각해 봐야 했다.

시간 여유가 없는 해나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아쉽게 됐네요…. 그럼.”

일어서려던 해나에게 인우가 말했다.

“앉으세요.”

고작 네 글자의 말일 뿐인데, 해나는 명령을 들은 기계라도 되는 양 다시 앉았다.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네? 어떤 생각이죠?”

“집을 팔지는 말죠. 굳이 작은 집으로 옮기면서까지 지금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집을 파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인우의 말에 발끈한 해나가 마치 따발총을 쏘는 듯 쏘아 댔다.

“일단 아빠 병원비, 간병인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제 적금을 깨도 턱없이 부족하고, 대출을 또 받을 수도 없어요. 아빠 대출금도 갚아야 하니까요. 집을 안 팔고 뭘 어떻게 해결하란 말이에요?”

인우는 해나의 태도와 상반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3억이면 됩니까?”

“예?”

또다. 인우의 말에 당황한 해나가 또 ‘네?’도 아닌 ‘예?’로 대답했다.

“3억이면 아버지 병원비와 간병인, 대출금까지 해결할 수 있겠어요?”

돈을 준다는 것도 놀라운데, 금액 또한 해나가 생각도 못 한 금액이었다.

집을 판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담보 대출을 받아 들어간 집이기에 대출금을 제외한 돈은 5,0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절반이 훌쩍 넘는 돈이 은행 돈이라도 드디어 반지하를 벗어나 해 드는 빌라에서 살 수 있게 됐다며 이삿날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던 첫 집.

이렇게 갑자기 떠나기엔 해나도 아쉽긴 매한가지였다.

“3억이 적으면 4억도 괜찮습니다.”

해나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더니 인우가 1억을 더 불렀다.

“아… 아뇨, 3억도 충분히 많아요.”

“그럼 일단 3억으로 하죠.”

순간 엄청난 금액이라도 쉽게 휩쓸릴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안 좋은 상황에 있는 내가 뭐라고 3억이나 준다는 거야?

해나의 마음속에 스멀스멀 의심의 꽃이 피었다.

“잠시만요. 저한텐 다행이긴 한데, 솔직히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뭐죠?”

“돈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돈이 필요하죠.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큰돈을 덥석 준다는데 이상하잖아요. 제가 뭐라고.”

“해나 씨는 돈이 필요하고, 저는 돈이 있고. 게다가 저 또한 해나 씨가 필요하니까요.”

대답을 들었지만 어딘가 시원치 못한 느낌에 해나가 꼬치꼬치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가 왜 필요하냐고요. 3억쯤은 우습게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람한테 쾌척할 수 있고, 대기업 아들에, 본인 사업도 대박 나신 분이 아무것도 없는… 아니, 빚밖에 없는 제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냐고요.”

인우가 자신의 약점을 말해야 할지 숨겨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해나는 혼자 추리 소설을 쓰고 있었다.

“혹시 뭐, 제 장기 같은 거라도 필요하신 거예요? 저, 시력 낮아서 라식 했고요. 간도 나중에 이식이 된다고 하면 아빠 줘야 하고, 심장도 약한 편이거든요?”

앙칼진 해나의 말에 인우가 실소를 터트렸다.

“네. 대단하십니다. 근데 전 그쪽 장기 같은 건 아무짝에도 필요 없어요. 제가 필요한 것 그쪽 자체니까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의문만 생기는 기분이었다.

답답해진 해나는 커피 한잔을 쭉 들이켜고는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왜. 필. 요. 하. 시. 냐. 고. 요.”

망설이던 인우가 꽤 앙큼하게 물었다.

“저랑 결혼, 하실 겁니까?”

“그쪽이 왜 저를 필요로 하는지 알면요. 제가 아무리 돈이 급해 결혼을 하려 했어도, 이유도 모르고 돈에 팔려 가듯 하긴 싫거든요.”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던 해나가 선을 긋는 탓에, 인우는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제 주치의에게도 솔직히 말하지 않은 비밀을 해나에게 털어놓게 된 인우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제가, 냄새에 예민합니다.”

“알아요. 직업병이라던.”

“아뇨. 직업병 아닙니다. 열한 살 무렵에 시작됐어요. 어떤 사람을 만나도 풍기는 개개인의 냄새 때문에 가까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나가도 풍겨 오는 냄새에 머리가 아팠고, 쉴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침대 위, 제 이불 속뿐이었죠. 방조차도, 누군가 제 방에 들어오면 한동안 머리가 아팠어요. 그래서 점점 방 안에 고립됐습니다.”

“네? 어떻게 그런…. 그래서요?”

“방 안에서만 살던 제게 형이 여러 향수를 선물해 줬습니다. 사람들의 냄새 때문에 힘든 거면, 향수로 냄새를 덮는 게 어떠냐고요. 그렇지만 향수도 너무 많이 뿌리면 역해져 두통이 오더군요.”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제 비밀을 이렇게까지 털어놓는 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말을 하면 할수록 해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져, 인우의 고개는 자꾸만 숙여졌다.

“거의 세계의 모든 향수를 다 뿌려 본 것 같아요. 그중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향을 찾아냈고, 그 향수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좀 나아지신 건가요?”

“네. 예전처럼 방에만 있진 않게 됐으니까요. 하루하루를 버틸 수는 있지만, 지긋지긋한 두통은 사라지질 않더군요.”

“병원엔 가 보셨어요?”

“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데 소용이 없어서 아, 나는 평생 머리 아프게 살겠구나, 하고 체념할 때 해나 씨를 만난 겁니다.”

“전 의사도 아니고,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닌걸요.”

“아뇨. 오늘 해나 씨를 만난 순간, 저는 그 순간 열한 살 이후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모든 냄새가 사라지고 두통이 가라앉는 느낌이요. 그래서 제겐 해나 씨가 의사보다, 수많은 향수보다 더 필요한 존재입니다.”

인우의 뜻밖의 고백에 해나가 마음을 굳혔다.

“좋아요. 이 결혼, 합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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