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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4)화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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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름아.”

-아저씨랑 이야기 잘 했어?

“으응….”

-도대체 왜 그러셨대?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또 울었어?

다정하게 물어 오는 아름의 목소리에 해나는 눈물이 또 차오르려 했지만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물을 참아 내었다.

“아니… 아까 너무 울어서 그래.”

-좀 더 같이 있을걸 그랬다 싶어서 전화했어. 아저씨는? 도대체 왜 그러신 거래.

아름이 두 번이나 콕 집어 묻는 바람에 어떻게 답할지 몰라 피해 가던 해나가 결국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해나야… 너 괜찮아?

아름은 늘 하던 응, 응, 따위의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해나와 아버지의 고생을 쭉 지켜봐 온 아름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응. 이제 좀 추슬렀어. 어떻게든 해 봐야지. 일단 아빠 입원 수속부터 밟고.”

담담하지만 물기가 서려 있는 대답에 아름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해나야, 일단… 나 안식년 보내려고 모아 놨던 그 적금, 너 빌려줄게.

“아냐, 그러지 마.”

-나 괜찮아. 안식년이 별거냐. 그냥 가서 놀고먹는 건데, 여기서 스펙이나 더 쌓아야지.

“나 너한테 그 돈 빌리면 갚을 때까지 너 못 봐. 그러니까 안 빌릴래.”

-야, 내가 뭐 그냥 준대? 다시 받을 거라니까? 갚으면 되지!

해나의 단호한 말에 아름의 목소리가 커졌다.

해나도 안다. 아름이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며, 값싼 동정이 아니라는 것을. 그만큼 믿고 의지하는 친구이지만, 그렇기에 더 받을 수 없었다.

세간에 삼우 식품의 상황이 안 좋다는 소문이 돌고 있고, 해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름이 이렇게 매주 나가기 싫은 선 자리에 끌려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름이 모아 놓은 돈을 쓴다면, 아름 자신에게 쓰는 게 맞았다.

해나는 그 돈마저 홀랑 먼저 쓸 만큼 염치없는 사람이 되진 못했다.

“아니. 난 우리가 계속 이렇게 수평적인 관계였으면 좋겠어. 나 너한테 돈 빌리면, 지금처럼 못 봐 너. 내 자존심 알잖아.”

그래서 일부러 더 모질게 말했다. 

해나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름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서 아저씨 챙겨 드려. 그래도 정 너무 힘들어지면 꼭 말해야 해. 알겠지?

“응, 지금 해야 할 거 일단 다 끝내고, 다시 연락할게.”

아름과의 전화를 끊은 해나는 떨리는 손으로 은행 어플을 열었다.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은 적금은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돈이 아빠 병원비, 간병인, 은행 대출 이자랑 원금, 그리고 또….”

최악이다. 나갈 돈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해나가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수중에 돈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잔액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해나가 시계로 눈을 돌렸다.

아빠를 혼자 응급실에 너무 오래 두었다.

“일단 아빠 입원부터 시키고 생각하자.”

입원 수속을 하러 온 해나는 또 한 번 좌절했다.

“아… 3인실은 지금 없고 1인실, 6인실이요…?”

3인실은 대충 보험으로 때울 수 있겠지, 했더니 지금 없단다. 지금 형편에 1인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6인실로 결정한 해나가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쉬었다.

“아빠, 나 왔어. 입원 수속 했으니까 이제 안내받고 옮기면 된대.”

“아빠가 바보같이 사기를 당해서, 너 힘들게 해서 미안해….”

“이제 미안하다고 그만해. 아빠 딸 믿지? 걱정 말고 아빤 몸 걱정만 해.”

입원 수속을 마치고 안내대로 병실로 이동한 해나는 환자복을 갈아입자마자 이내 잠든 형우를 확인하고 병실을 나왔다.

“목말라….”

하루 종일 너무 울었던 탓에 목이 말랐던 해나의 눈에 자판기가 들어왔다.

해나는 음료수를 뽑으려 가방을 뒤적거리다 손에 잡힌 종이를 꺼냈다.

“어? 아, 대표 이사 주인우….”

종이는 선을 보고 대충 구겨 뒀던 인우의 명함이었다.

“이게 왜 나와.”

선을 볼 때 불쾌했던 기억에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찰나, 인우의 말이 해나의 머리에 스쳤다.

“…한주 그룹 지분을 준다 했지?”

음료수를 뽑아 먹으려던 것도 잊은 해나는 의자에 앉아 명함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짐을 그 집 2층에 옮기고, 지금 집을 빼면….”

얼추 당장 눈앞의 병원비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눈이 반짝였다.

“대출도 갚아야 하는데…. 일단 나한테 한주 그룹 지분이 있으면 뭐… 정 급하면 팔아도 되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결혼할 생각도 없었는데,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뭐… 요즘 세상에 이혼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다시 재혼할 것도 아닌데….”

빛이 두 줄기가 되었다.

“그냥… 룸메이트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없었다.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이 정도 조건의 계약이면 할 만하단 판단이 섰다.

“이거… 잘 하면 되겠는데? 되는 조건인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해나는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명함을 다시 쫙쫙 폈다.

“전화한다. 하자, 해나야. 그냥 몇 년, 집에서도 영업한다 생각하면 되잖아. 그러다 상황 나아지면 이혼해도 괜찮은 거고. 하자.”

휴대폰 숫자를 누르는 해나의 손이 긴장감에 뻣뻣했다.

해나는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며 심호흡을 크게 하고 전화를 걸었다.

-주인우입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흠… 여보세요?”

-누구시죠. 

“어… 음….”

자신을 누구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탓에 잠시 망설이자, 인우가 살짝 짜증 어린 목소리로 채근했다.

-할 말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해나는 본인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었다.

“아, 저… 저, 오해나예요. 오늘 그, 선봤던.”

-네? ……오해나 씨?

다시 한 번 물어 오는 바람에 해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자신을 벌써 잊은 건 아닌지 걱정된 해나는 스피드 퀴즈처럼 빠르게 대답했다.

“네. 오늘 6시에 그, 대리로 선봤던. 저 기억하시나요?”

해나의 다급한 물음에 인우가 눈에 띄게 온화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알죠. 오형우 씨 외동딸. 서른 살, 한주 전자 직원… 그리고 저한테 시원하게 욕을 날리신.

망했다. 

해나는 불과 몇 시간 전 저지른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제 잘못이 확실하니, 일단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아, 그… 보셨군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나름… 재밌었다고 해도 될 것 같네요.

민망한 해나는 기계처럼 ‘하. 하. 하.’ 하고 웃었다.

그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 인우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셨죠? 전 전화를 안 주실 줄 알았는데요.

지금까지 숙이고 들어간 건 다 이 말을 하기 위한 빌드 업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해나가 눈을 딱 감고 말했다.

“결혼… 하자고 하신 거, 그거 아직 유효한가요?

인우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짜 긍정적인 방향으로 연락을 주신 건가요?

서로 물음표만 던지고 있는 상황이 답답한 해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네.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 결혼, 하고 싶어요. 저에게 꼭 필요한 기회예요.”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연 해나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인우는 욕을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에 심술을 부릴 정도로 여유 있지 않았다.

제 발로 굴러 들어온 행운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 전에 꽉 잡아 둬야 했다.

-어디시죠?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여기가 희명 병원….”

해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일어난 인우가 차 키를 챙겨 들며 말했다.

-20분 뒤에 보죠.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

해나는 집에 들러 간단히 필요한 것 좀 챙겨 오겠다고 둘러대고 병실을 나섰다.

“잘 생각한 거야. 괜찮을 거야.”

방금 전까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져 끊임없이 괜찮을 거라 자신을 달랬다.

“여보세요?”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리던 것도 잠시, 저장도 되지 않은 번호로 휴대폰이 울렸다.

-주차장입니다. 어디서 뵐까요?

마땅히 이야기할 곳이 생각나지 않은 해나가 근처 카페를 떠올렸다.

“어… 병원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갈까요?”

-네. 그럼 거기로 갈게요.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뻣뻣하게 굳은 손으로 휴대폰을 넣은 해나는 신발을 질질 끌며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하자 언제 온 건지 먼저 자리에 앉아 있는 인우가 보였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우뚝 솟아 있는 인우는 이미 만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듯했다.

해나는 쭈뼛쭈뼛 인우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커피 주문할 건데… 주문하셨어요?”

“네. 해나 씨가 낮에 커피를 마시길래 커피 두 잔 주문했습니다.”

의외였다. 본인 것만 주문하기 뭐해 인우 것도 주문해야 하나 싶어 예의상 한 질문이었는데, 이미 제 커피도 주문해 놨다니.

“아, 감사합….”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진동벨이 울렸고, 인우가 벌떡 일어나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 바람에 감사하단 말을 채 끝내지 못한 해나가 인우의 반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감사합니다.”

해나가 이를 꽉 물고 한번 까인 감사 인사를 다시 전했다.

“뭘요. 커피 한잔 가지고.”

“아, 네….”

해나가 커피를 몇 모금 마시며 말 꺼낼 준비를 하는 동안, 인우는 그저 해나가 입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인우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던 해나는 떨리는 손으로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비장하게 마주 보고 입을 열려던 그때.

“결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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