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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안내에 따라간 곳엔 CT 사진으로 보이는 사진이 띄워진 모니터가 보였다.
사진만 봤는데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버님이 길에서 쓰러져 계시다는 연락을 받고 구급대원들이 출동해서 저희 병원으로 이송했고요.”
“저희 아빠가… 네, 길에서요.”
아빠가 길에서 쓰러져 있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의사에 말에 반쯤 혼이 빠진 해나에게 더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네. 처음 이송돼 오셨을 때 기록을 확인해 보니 간경변증으로 저희 병원에서 치료 중이시더라고요. 알고 계시죠?”
“네. 저희 아빠 열심히 치료받고 계신데, 왜….”
“6개월 전부터 내원하지 않으셨더라고요.”
“네? 저한테 꼬박꼬박 다니고 있다고 했었는데…!”
해나는 형우가 간경변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꼬박꼬박 같이 병원을 다녔다.
하지만 팀장이 된 후로 일이 너무 바빠 형우 혼자 보냈고, 형우는 꼬박꼬박 병원을 다니고 있다고 말해 왔다. 병원 가는 날마다 전화 통화도 했었다.
“네, 아마 아버님께서 걱정 끼칠까 봐 그러셨나 봐요. 아무튼… 아버님이 6개월 전부터 내원하지 않으셨더라고요. 이게 오형우 씨 CT 사진이고, 여기 이쪽에 보이는 게 간인데요. 여기 보이는 이게, 죄송하지만 종양으로 확인이 됩니다.”
“종양이면… 설마 안 좋은 거예요?”
“네. 정확한 검사를 해 봐야 알긴 하겠지만, 모양으로 봐서는 간암으로 보이는데…. 전이나 기수는 다른 검사를 더 해 봐야 알 수 있어요. 문제는 환자가 간경변증을 앓은 지가 좀 되셔서, 나중에 절제술로 종양을 제거하더라도 간암 유발 인자가 남아 있어 재발률이 높다는 거예요.”
수술을 해도 재발률이 높다는 말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일단 아버님 입원하셔서 검사받으실 거고요. 간경변증이 상당히 진행돼서 이식도 고려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이식을 하신다면 그때 혹시 따님께서도 검사받으셔야 할 것과 작성해 주실 서류가 몇 개 있어요. 일단 아버님 깨어나는 거 보고, 상의해서 결정하는 걸로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의사와 대화를 마치고 힘없이 일어난 해나 쪽으로 아름이 뛰어왔다.
“뭐래?? 의사 선생님이 뭐라셔?”
“우리 나가서 이야기하자. 나 바람 좀 쐬어야겠어… 아름아.”
아름이 해나를 부축해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가?? 아저씨가 그러실 분이 아닌데… 왜 그러셨지?”
해나에게 형우가 사실 병원을 안 가고 사실을 숨겼다는 소식을 들은 아름이 해나만큼 놀랐다.
“모르겠어…. 일단 아빠 깨어나면 이야기해 봐야지. 고마워 아름아. 먼저 집에 가 있어. 나 수속 밟고 하려면 꽤 걸릴 것 같으니까, 내가 아빠랑 이야기하고 연락 줄게.”
“혼자 괜찮겠어? 나 여기 있어도 돼. 오늘 안 바빠.”
“아냐. 너 보면 계속 눈물 날 것 같아서 그래. 먼저 들어가.”
있겠다는 아름을 만류하는 해나의 얼굴이 너무 단호해서, 아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고마웠어, 아름아. 진짜 고마워. 이따 연락할게, 조심히 가.”
“응, 나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고. 너무 울지 말고. 알겠지?”
“응, 걱정 마. 나 독종이잖아.”
애써 웃으며 아름을 배웅한 해나에게 아빠와의 이야기라는 과제가 남았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아빠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해나의 손을 잡아 오는 아빠의 투박한 손이 느껴졌다.
“아빠? 정신이 들어?”
“해나야….”
깨어난 아빠에게 해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빠.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병원 잘 다니고 있다며! 왜 그랬어, 왜! 아빠가 내 하나뿐인 가족인데, 아빠마저 잘못되면 난 어쩌려고 그래! 왜 그랬어!!!”
형우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아이처럼 울며 소리치는 해나를 보던 형우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서…. 아빠가 미안해서 그랬어.”
“뭐가 미안해! 이게 더 미안한 거야. 나한테 거짓말 치고! 아빠가 병원에 실려 와서! 나 걱정시키고! 이게 더 미안한 거라고!”
“아빠가… 아빠가 염치가 없어서. 아빠가 능력이 없어서 미안해서….”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이제 돈 잘 버는데, 그게 왜 미안해…. 나는 아빠랑 같이 잘 살려고 돈 버는 건데 아빠가 이렇게 아프면 어떡해….”
울먹이며 연신 미안하다 말하는 아빠를 보고 해나는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해나는 아빠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일단 그 사정부터 알아야 했다.
“아빠, 무슨 일 있었어? 왜… 도대체 왜 6개월이나 나 속이고 병원을 안 갔어….”
“아빠가 이렇게 살아도 너한테 짐만 될 것 같아서….”
형우가 울먹이며 뱉은 말에 해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나한텐 가족이라곤 아빠밖에 없는데 아빠가 그러면 나 어떡해…. 나 아빠랑 행복하게 살려고 공부한 거잖아. 그래서 한주 들어가고 팀장도 달았는데, 그럼 내 인생은 뭐가 돼, 아빠…. 왜 그래, 도대체… 응?”
해나는 형우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췄다.
“왜 그러는지 말해, 아빠. 나 다 괜찮아. 왜 그랬어?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형우는 차마 해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붉어진 눈시울로 한숨만 뱉어 내던 형우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아빠가… 이제 가게 하나 가져 보고 우리 해나 고생 안 시키나 했는데… 그게 사기래. 아빠가 우리 해나 결혼 자금으로 모은 돈도,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도 다 넣었는데, 그게 사기래…. 너한테 짐만 되는 것 같아서, 계속 살아 있으면 너만 힘들 것 같아서….”
아빠가 간암일 것 같다는 말만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열 살, 아빠의 사업이 망하고, 평생 다 갚지 못할 것 같던 빚을 갚으면서도 20년을 모은 피 같은 돈이었다.
해나는 없는 살림에도 생활비를 줄이면서까지 저축하던 형우를 원망하지 않았다.
해나의 수입이 점점 커지고, 집의 가장이 바뀌자 형우의 어깨가 점점 더 움츠러드는 게 마음 아팠다.
몸이 아파진 후로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온 형우에게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창업해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던 것 역시 해나였다.
그래서 형우가 좋은 가게를 발견했다고 했을 때, 한주 전자에 입사해 팀장을 달 때까지 모은 돈을 형우에게 건넸다. 어린아이처럼 신난 아빠의 재기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한사코 거절하던 형우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돈을 손에 쥐여 주었던 때가 떠올랐다.
해나는 온몸의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빠. 사기라니? 정확하게 말해 봐.”
형우의 말은 간단했다.
가게를 보고, 돈을 주고받고, 계약서를 썼다.
가구를 보고, 한껏 들떠 오픈 준비를 하다 알게 되었단다.
그 가게를 똑같이 계약한 형우 같은 사람이 6명이나 더 있다는 걸.
사기꾼은 다른 나라로 튀었고,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단다.
“미안하다, 해나야…. 아빠가 너무 멍청하고 미안해서 이렇게 살아 뭐 하나 싶어서 그랬어….”
가슴을 퍽퍽 치며 눈물을 참아 내는 형우의 모습에 마른 피가 다시 도는 기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자, 해나는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
누구보다 냉정한 말투로 입을 연 해나의 첫마디는 따뜻하면서도 단호했다.
“아빠, 걱정 마.”
해나의 말에 눈물이 터진 형우는 민폐를 끼칠까 울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아빠, 우리 돈 한 푼 없을 때부터 20년을 모았잖아. 그 돈이 다 내 돈이야? 아빠가 모은 돈이 훨씬 많아. 그리고 나 이제 팀장이야. 계속 승진도 할 거고, 주식도 배우고 있고, 이번엔 7년 만에 모을 수도 있어.”
“어떻게 그래, 아빠가 너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
“아빠가 나쁜 생각 한 게 더 미안한 거야. 난 우리가 다시 단칸방에서 살래도 아빠만 있으면 돼.”
“해나야….”
이미 벌어져 버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해나는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은행 대출받은 건 어떡하며, 사기꾼을 또 어떻게 잡을지.
그 전에 아빠의 검사와 치료까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빠, 우선 우리 아빠 몸부터 생각하자. 아빠가 다시 건강해져야 사기꾼도 잡고, 가게도 다시 구하지.”
진정되지 않는 형우의 어깨를 두드린 해나는 조심스레 형우의 눈물을 닦아 냈다.
“나 우선, 가서 아빠 입원 수속 밟고 올게. 그리고… 우리 병실로 올라가서 아빠는 좀 쉬자.”
여전히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형우를 보던 해나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나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별명이 뭔 줄 알아? 독종이야, 독종. 아빠는 다행이야. 나 같은 딸을 둬서. 믿어도 돼, 나. 그러니까 걱정 말고 일단 있어. 수속 밟고 올게.”
고개를 끄덕이는 형우를 한 번 꼭 끌어안은 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응급실을 나왔다.
“후….”
응급실을 벗어나자 설움이 북받친 해나는 재빨리 사람 없는 주차장 끝을 찾아가 쪼그려 앉았다. 그와 동시에 해나의 눈물도 터졌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이러면 안 되잖아.”
지금의 일상은 해나와 형우가 죽도록 노력해서 일궈 낸 결과였다.
간신히 빚을 다 갚고 이제야 겨우 남들처럼 살아 보나 했는데, 다시 또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 도대체가 몇 번을 넘어져야 해, 우리는…. 아빠도, 나도. 이 정도로 힘들었으면 됐잖아….”
병원이어서 그런지, 하늘이 무너져라 꺼억꺼억 우는 해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응급실 밖의 어두운 주차장은 누가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일까. 한참을 울던 해나가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이제 울 만큼 다 울었으니 생각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후….”
눈물을 벅벅 닦아 내고 생각에 빠져 있던 해나의 휴대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