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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합시다.”
더 이상 자신은 선볼 생각이 없다며 한 번만 대신 나가 달라고 빌고 비는 아름의 부탁으로 선 자리에 나오긴 나왔는데….
만난 지 10분도 안 돼 결혼을 하자는 남자의 말에 해나는 황당함을 참지 못했다.
“예?”
‘네?’도 아니고, ‘예?’라는 물음에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결혼,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황당한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세 시간 전
“제발, 제발 제발! 해나야. 제발 한 번만 부탁해!”
자기는 재벌 집 딸도 아닌데 비즈니스를 위해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아름이 해나에게 대신 선을 봐 달라 부탁한 지 한 시간째.
“싫어, 싫어 싫어. 싫다고 한 시간째 말했어.”
해나의 완강한 태도에 아름이 초강수를 두었다.
“너 작년 내 생일 까먹고 나한테 소원 쿠폰 하나 준 거, 나 지금 쓸래.”
갖고 싶은 선물이 없으니 언젠가 쓰겠다며 소원 쿠폰을 달라던 아름에게 미안한 마음에 ‘오케이!’를 외치던 순간을 후회하는 해나였다. 그걸 이번에 이렇게 쓴다고 하니, 결국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너 진짜 너무해. 이렇게 쓰는 게 어딨어.”
“진짜 나가기 싫어서 그래. 게다가 이번에 볼 남자는 싸가지 없기로 유명하다고.”
“그 싸가지 없는 놈을 나는 만나도 괜찮고?”
해나는 서운한 척 상처받은 연기를 했지만, 아름에게 통하지 않았다.
“응. 네가 이겨. 네 싸가지가 분명히 이겨.”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해나가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데.”
“오늘 오후 두 시, 장소는 아직 몰라. 정해지면 문자 할게.”
“아니, 오늘 선보는데 장소도 몰라?”
“응. 그 싸가지가 제 스케줄 맞춰서 가까운 곳에서 보려나 봐.”
“아니, 도대체 그렇게 매너가 없을 거면 선은 왜 보는데?”
해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묻자 아름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 그 소문 알지. 한유라.”
“한유라? 그게 누군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듯한 해나의 태도에 아름의 목소리가 커졌다.
“기억 안 나? 우리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한유라! 걔도 한 싸가지 했잖아!”
“우리 반에 싸가지 없는 애가 한둘이었냐.”
심드렁하게 말하는 해나는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 왜! 그 네 라이벌이라고 소문났던 애!”
아름의 입에서 나온 라이벌이라는 단어에 흐릿하게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석으로 입학해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유라가 처음으로 2등을 한 첫 중간고사.
씩씩거리며 1등을 한 해나의 자리까지 찾아온 유라의 표정이 어땠더라.
그 큰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던 그 여자애.
그 후로도 해나의 옆자리를 자처하며 필기할 때마다 힐끔힐끔 저를 훔쳐보던 그 매서운 눈매가 떠올랐다.
“…어, 그래! 걔가 왜?”
“하, 걔네 집이랑 오늘 선볼 그 남자 집이랑 결혼한다고 소문났잖아.”
해나가 다 마신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씹으며 말했다.
“결혼을 사람끼리 안 하고 집끼리 한대?”
“야, 너 얼음 먹지 마. 이에 안 좋아. 아니, 아무튼! 그 집안끼리 자식들 결혼시키려고 난린데, 남자가 한유라는 절대 싫다 그랬대. 차라리 선을 보겠다고.”
“왜? 걔 정도면 괜찮지 않나? 머리도 좋고, 집안이… 그 어디였더라?”
“태우 그룹! 그렇지, 게다가 걔가 싸가지가 없어서 문제인 거지, 얼굴은 꽤 예쁘장하잖아. 근데도 싫다고 했대, 그 남자가.”
“그 눈 높은 남자가 누군데?”
아름은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입을 뗐다.
“그, 주인우라고….”
“주인우? 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지?”
“많이 들어 봤겠지, 당연히…. 너네 회사 회장님 아들이니까.”
해나가 얼음을 뒤적이던 빨대를 멈췄다.
“너 미쳤지? 지금 나보고, 내 회사 회장 아들이랑 선을 보라고?”
살짝 욱한 해나의 언성이 높아졌다.
잔뜩 기가 죽은 아름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회사 회장 아들이지만 너네 회사를 다니진 않잖아.”
“그래도 내가 그 회사 직원인데,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없어…. 넌 그냥 이아름으로 잠깐 앉아 있다 나오기만 하면 돼…. 그 사람도 너 모를 거고…. 퇴짜만 놓고 오면 되는걸….”
아름이 내심 미안한지 구구절절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수락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입씨름에 해나는 결국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10분 전.
“안녕하세요. 오… 아, 이아름입니다.”
습관적으로 본인 이름을 말하려다 황급하게 고친 해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냄새가….”
“네?”
“아, 냄새가 안 나서요.”
첫 만남에서 자기소개도 않고 냄새 타령을 하는 남자의 태도에 해나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냄새가 났어야 하나요?”
불쾌함이 가득 실려 뾰족하게 나와 버린 해나의 말에도 남자는 개의치 않은 듯했다.
“아뇨. 실례를 했네요. 주인우입니다.”
“네. 전 식사는 됐고… 아이스커피로 할게요.”
‘듣던 대로네.’
뒤늦게 자기소개하는 인우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해나는 오래는 볼 생각 없다는 듯 커피를 주문했다.
해나와 같은 메뉴를 주문한 인우는 커피가 나오는 순간까지 오직 해나의 냄새에만 집중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이 커피만 다 마시고 나가는 걸로 할까요?”
길어지는 정적을 참지 못한 해나가 입을 열었다.
“아름 씨는 향수… 안 쓰세요?”
자리를 파하자는 질문에 답은 돌아오지 않고, 되레 불쾌한 질문이 돌아왔다.
“변태세요?”
“무슨….”
“아니, 아까부터 냄새 어쩌고 하더니 이번엔 향수 안 쓰냐고… 하, 참. 네, 향수 안 쓰는데요. 왜요? 뭐 소개팅하는데 향수도 안 뿌리고 왔냐고 비꼬시는 거예요?”
해나의 말투가 점점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뾰족해졌다.
아무 기대 없이 나온 선 자리였는데, 인우는 잔뜩 가시를 세운 해나가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뇨.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해 두죠.”
“뭐, 향수 회사 대표는 사람 면전에 대고 향 품평을 해도 괜찮다는 말?”
흥분해 말까지 짧아진 해나를 보던 인우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냄새가 안 나는 것도 특이한데, 수없이 마주친 여자 중 본인을 이렇게 대하는 여자가 있었던가?
해나의 언성이 높아지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화부터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한 인우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릴게요. 품평하거나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도 냄새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처음 만나서, 조금 놀랐어요. 그래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싸가지 없기로 유명하다던 사람이 자신이 화 한번 냈다고 바로 고개까지 숙여 가며 사과를 해 오다니.
순식간에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향수 회사 대표면 이런저런 향에 매일 시달리시긴 하겠네요.”
“네. 그래서 향이 안 난다는 게 저에게는 조금 특별한 일이라서요.”
“아, 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해나가 커피잔을 휘휘 저었다.
인우는 뚱한 표정으로 커피잔이나 휘적이는 이 여자가 신기했다.
처음이었다.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은.
매일 두통에 시달리던 인우는 이 여자를 만나고 난 후 주위 냄새까지 느끼지 못했다.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던 냄새가 빠르게 사라지고, 두통이 사라지는 것도 모자라 이젠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어차피 사랑 없이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이 여자가 집에 있다면, 집에서라도 머리 아플 일은 없겠다.
머릿속에서 이미 계산을 마친 인우는 대뜸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결혼합시다.”
“예?”
해나는 어이가 없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무슨 만난 지 10분 만에… 냄새 타령만 하다 욕이나 먹어 놓고 결혼을 하자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 하자고 말했습니다.”
“아니… 저 아세요?”
“삼우 식품 외동딸, 지금 영업 부장으로 계시고. 이아름 씨. 나이는 서른.”
“네. 딱 세 가지 아시네요. 직업, 이름, 나이. 그 세 가지로 결혼을 하자고요?”
“제게 결혼은 별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 대충 아무나 만나 결혼하실 거면 저랑 하시죠. 나쁘지 않을 겁니다.”
뻔뻔하게 권유하는 인우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에 반해 해나는 기가 다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가 나쁘지 않을까요? 전 10분 대화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가 다 빠지는데요.”
“제 한주 그룹 지분을 다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한주에 미련이 없어서요. 집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오는 걸로 하시죠. 2층이 비었습니다. 저는 1층, 아름 씨는 2층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아름 씨가 뭘 하든, 누굴 만나든, 기사만 나지 않는다면 간섭할 일 없을 겁니다. 그냥 남남이지만 서류상으로만 묶이는 거예요. 삼우 식품에도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닌가요?”
실로 엄청난 제안에 묘하게 수긍될 뻔한 해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삼우 식품엔 도움 되겠죠. 그게 저랑 상관이 없어서 문제지만.”
“왜 상관이 없죠? 본인이 외동딸이니 당연히 물려받을 거 아닌가요?”
“제가 외동딸이긴 한데, 전 오형우 씨 외동딸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