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요람부터 혁명까지
아퀼라가 내 이름을 되찾아준 후 내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날 위해 애써 희귀한 물약을 만들어 가지고 온 빅팀은 허망해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전과 달리 더 이상 공허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나를 구성하는 모든 부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이 맞물려 돌아가며 좀 더 행복해졌다.
그래서 나는 아퀼라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이후에 이시나는 우리를 보며 더욱 눈꼴 시려했지만.
하여튼 휴가를 마친 우리가 황성에 돌아갔을 때, 황성에는 이미 시민들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르콘을 위한 인권 선언문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내가 인권 선언문이 발표되는 역사적 현장을 살게 될 줄이야….”
나는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렸다. 강제로 마물의 밥이 되던 시절을 떠올리니, 정말 많은 것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우리에게도 ‘인권’이 생긴 것이다.
‘잠깐, 내가 왜 고작 인권을 인정받은 걸로 기뻐하고 있지?’
잠시 내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이제 나도 인간으로 취급받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참, 아르콘의 인권 문제가 해결됐다 하더라도 아직 몇 가지 과제들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황제 폐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오늘은 바로 황제를 섬으로 유배 보내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황제는 집무실에 갇혀 있는 처지였고, 마침내 오늘 수도에 있는 강을 통해 제국의 최남단인 노폴레옹 섬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79년 동안 유배를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내 건의가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황제는 꽁꽁 묶인 채 배에 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를 감시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쿨톤이라 안타깝게도 밧줄이 잘 어울리지는 않네.’
그를 묶고 있는 밧줄은 누런 톤이라 쿨톤인 황제와 어울리지 않고 톤그로가 발생했다. 역시 단두대가 더 잘 어울렸을 텐데, 정말 아쉽다.
오늘 같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어서, 나는 아퀼라와 함께 배가 떠나는 현장에 서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원한을 가진 몇몇 사람들도 함께였다. 예를 들어 타로라든가, 윈터라든가…. 눈물을 훔치는 타로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군.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황제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붉어진 얼굴로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내 반드시 다시 세력을 구축해서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황실을 제자리에 되돌려놓을 거야!”
음, 그것참 나폴레옹 같군…. 심지어 섬 이름이 노폴레옹 섬이라는 것도 왠지 찜찜해….
하지만 그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을 대책은 충분히 있었기에, 나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노폴레옹 섬’이라면 안전할 것이다.
“헛된 꿈을 꾸시는군요.”
황제를 비웃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기에,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내가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폐하, 저희가 왜 폐하를 노폴레옹 섬으로 유배 보내는 건지 아십니까?”
“뭐?”
“그곳은 오래전에 제국에 의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점령당했죠. 절대 그곳의 주민들이 폐하를 따를 거라 기대하지 마세요.”
그렇다. 마치 아르콘과 제국의 싸움이 그러했듯, 노폴레옹 섬의 원주민들도 아돌브 제국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제국에 복속된 지금도 여전히 제국을 썩 좋아하지 않았고, 제국에 의해 자원을 수탈당하고 있었다. 가끔씩 그곳에서 무력 투쟁이 일어났기에 제국에서 노폴레옹 섬에 군사를 파견해놨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노폴레옹 섬에 있는 황실군을 제압하고 곧 황제를 유배 보낼 거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곳의 주민들은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그들은 황제에 대한 적대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 그들이 유배 온 황제에게 황제 대우를 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
황제는 결코 그 섬에서 세력을 구축해서 다시 제국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당황한 듯 황제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갑자기 절박한 표정이 되어 나에게 매달렸다.
“이봐, 79년은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나? 수도에서도 나를 충분히 감시할 수 있을 텐데?”
이제야 노폴레옹 섬으로 가는 게 좀 두려워진 모양이다.
하긴, 그곳에는 황제의 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황제를 감시하기 위해 함께 가는 사람들도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었기에, 늘 황성의 사용인들에게 둘러싸여 살던 황제는 갑자기 저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가 불안해서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하, 수도에 남고 싶으신가요?”
“그래!”
내가 희망을 줄 듯 은근히 말하자, 황제가 눈을 빛냈다.
“오히려 내가 수도에 남아 있으면 나를 감시할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그리고 나를 노폴레옹 섬으로 보낸다 해도, 다른 황실의 일원이 남아 있을 텐데.”
“음….”
그의 말대로, 그를 섬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황실의 씨가 아예 마르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실의 방계 일원들이 존재했으니까.
아마도 황제가 노폴레옹 섬으로 떠나고 나면 그들이 황성을 되찾으려고 애를 쓸 거다.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폐하, 차라리 노폴레옹 섬에서 살 수 있는 걸 감사히 여기셔야 할 텐데요.”
“뭐?”
“방계 황족들은 아마도 단두대에 오를 운명 같거든요.”
나는 황실에 분노한 시민 혁명군을 떠올렸다.
그들은 황족의 씨를 모두 말릴 기세였다.
나는 그들이 황족의 처우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중에 화가 미칠 것을 대비해 방계 황족들을 죽이려는 것 같았다. 황제는 편하게 죽기에는 아깝다고 여겨 노폴레옹 섬으로 보내는 거고.
“하지만 그들은 죄가 없다!”
“그 사람들도 이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던데요, 뭘.”
더 이상 황제와 대화를 나눌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 나는 배를 향해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황제는 내 쪽을 향해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며 뒤로 물러났다.
뿌우-
그렇게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고, 황제는 그대로 시야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너! 내가 돌아온다면 반드시 너를 단두대로 보낼 것이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그렇게 외쳤지만,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게 바로 흑막의 기분? 정말 짜릿하군. 이시나는 늘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나는 흑막답게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사람들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끝나서 개운한 것 같습니다. 물론 앞으로 남은 일이 많지만 말입니다.”
“뭐, 그렇지.”
유리가 무덤덤한 어조로 내 말을 받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국군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고, 임시 정부의 영역을 넓혀가는 거겠지.”
“뭐, 그건 임시 정부가 알아서 할 일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저희의 자치 도시만 지켜가면 됩니다.”
혁명이 실패하든 말든, 사실 나는 큰 상관 없었다. 어쨌든 ‘제국민의 혁명’과 별개로 ‘아르콘의 혁명’은 성공한 거니까.
그리고 우리의 혁명을 마무리 짓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자, 이제 갑시다. 브테인 왕국군을 내쫓으러.”
우리의 자치 도시가 될 영역에 들어와 있는 브테인 왕국군과의 전쟁이었다.
* * *
시민 혁명군은 황실에 대한 처리를 마쳤으나, 귀족들과 연합한 황실군과 브테인 왕국군을 처리하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제국민들을 선동하여 황실군과 전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그 덕에 지금 귀족들을 상대하는 건 온전히 시민 혁명군의 몫이 되어 있었다.
한편, 브테인 왕국군을 상대하는 건 우리의 일이었다. 그게 자치 도시를 받는 대가로 우리가 내건 조건이었으니까.
전역한 아르콘마저도 기꺼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모두 자유를 원하고 있었고,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총을 들고 완전무장한 채 행군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한 뒤에 또 행군 같은 걸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XX!
북부를 향해 행군하던 길, 밤이 찾아와서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자,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겠습니다!”
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우리는 텐트를 설치했다.
“XX, 제대하고 나서도 야영을 하게 되다니. 이게 말이 되냐?”
나는 투덜거렸지만 텐트를 치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미 내 행동은 국경방위군식 체계에 물들어 버린 것이다.
내가 불만 어린 얼굴로 텐트를 치고 있던 그때, 아퀼라가 내 옆으로 스윽 다가왔다.
“아퀼라?”
그는 나와 다른 텐트를 쓰기로 되어 있었는데 무슨 일로 왔지?
그런데 그는 말없이 한참 동안이나 내 얼굴을 바라봤다. 저건 분명….
‘심각한 얘기를 할 때 짓는 표정인데!’
내가 아퀼라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는 텐트를 치던 것을 멈추고, 아퀼라의 손을 마주 잡고서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아퀼라, 무슨 일이야?”
“사루비아, 나는 네가….”
그리고 아퀼라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왜?”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퀼라에게 진심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정말로 진심인 것 같았다.
“아르콘이 전쟁에 참여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래야 우리의 숙원을 이룰 수 있지.”
“하지만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잖아. 혁명을 완수하느라 고생한 네가 이 전쟁에까지 꼭 참여할 필요는 없어.”
나는 아퀼라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내가 죽을까 봐 겁나는구나.”
“…그래.”
그랬다. 아퀼라는 내가 전쟁에서 죽거나 다치는 것이 겁이 나 나에게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퀼라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쟁은 정말로 위험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전쟁에 참여한다는 건 우리의 목숨을 건 일이었다.
아르콘은 물론 선천적으로 훨씬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명의 인간을 상대하는 일은 하나의 마물을 상대하는 일과는 달랐다.
오러는 마물의 두꺼운 벽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러의 힘을 멀리까지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멀리 있는 적을 상대할 때는 오러가 아닌 총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총을 이용하는 백병전에서 결국 유리한 건 머릿수가 많은 쪽이었다. 브테인 왕국군은 우리보다 훨씬 머릿수가 많았고 말이다.
즉 이번에 참전한 사람들 중 사망자도 상당히 많이 나올 거라는 얘기다.
“네 마음이 뭔지는 알겠어. 하지만 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비겁해지기 싫어.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싸우고 싶어.”
“네가 강한 것 알아. 하지만 날 위해서라도 다시 생각해 달라는 거야, 루비.”
아퀼라가 평소 들어본 적 없는 간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나는 주춤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속절없이 물러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 …하지만 참가하지 않을 순 없어. 대신 사망률을 줄일 전술에 대해 내일 고민해 보자.”
“사루비아, 내 말은…!”
“아무리 그래도 전쟁에서 혼자 빠질 수는 없어.”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단호했다. 나는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고 권리만 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나는 이번 일에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럼 아퀼라, 이 일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
결국 나는 아퀼라를 돌려보내며 의도적으로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