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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58화 (231/233)

“으응, 내가?”

그거야 당연히 변했을 거다. 왜냐하면 이전의 사루비아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응, 국경방위군을 제대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더 자신감 있고 당당해 보여.”

“네가 알던 나는 어땠는데?”

문득 나는 원래의 사루비아가 궁금해졌다.

원래의 사루비아는 나에 의해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거다. 그럼 나라도 그녀에 대해 기억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릴리는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답했다.

“음, 자신감 없는 애였지. 소심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내가 빙의하기 전의 사루비아를 얘기하고 있는 거군.

“그러다 병에 걸려 크게 앓고 난 뒤로는, 성격이 바뀐 것 같았지만 말이야.”

그게 바로 내가 빙의한 시점이었기에, 나는 조금 뜨끔해졌다. 음, 아마 그때를 기점으로 많이 변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루비아 너는 그대로 사루비아인 것 같아.”

“뭐? 아까는 변했다면서?”

“그래도, 뭐랄까, 본질은 변하지 않은 느낌이 든달까? 그냥, 너한테서는 언제나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거든.”

비슷한 기운? 이건 판타지적인 요소일까, 아니면….

“릴리, 너 혹시 종교 같은 거 믿니?”

“어떻게 알았어? 사실 이 세계는 한 명의 신인 우주님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건데….”

“아오, 결국 그런 소리였잖아!”

그 후로도 나는 릴리와 대화를 더 나누어 보았지만, 이 이상 릴 리가 더 친숙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를 내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그냥 빅팀이 물약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별 소득 없이 고아원을 떠나게 되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다시는 애들을 그렇게 부려 먹지 좀 마세요.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진짜로 신고해 버릴 테니까.”

다행히 그 협박은 잘 먹혀 든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국경방위군을 제대한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나를 좀 무서워하는 것도 같았으니까.

그렇게 ‘새로운 부품’을 만들어 보려는 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 *

휴가의 마지막 날 밤.

아퀼라와 나는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휴가 동안 우리는 결혼식을 위한 옷과 반지를 골랐고, 아퀼라의 어머니를 만났고, 내가 지내던 고아원에 가기도 했다. 달린과 알타이르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

예상치 못하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휴일이었다.

오늘 하루가 길어서인지 유독 피곤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가 그대로 잠들려고 하던 그때….

“사루비아.”

“응?”

아퀼라가 진지한 어조로 내 이름을 불렀기에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퀼라가 침대에서 내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야, 야, 뭐야?”

그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딱 반지 하나가 들어갈 만한 작은 크기의 상자였다.

설마 지금 프로포즈를 하려는 건가? 얼마 전에 맞춘 반지를 가지고?

내가 설레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너에게 이걸 꼭 주고 싶었어.”

그 말과 함께 상자 뚜껑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건, 내가 일전에 반지를 고를 때 눈을 떼지 못했던 루비 반지였다.

아퀼라는 곧 다이아몬드 반지를 찰 약지가 아닌 검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내가 이 반지에 꽂혔던 걸 잊지 않고 선물해준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지고 아껴 준다는 건 진심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검지 끝까지 반지를 끼워 넣어준 아퀼라가 내 손바닥 깊이 입술을 묻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 내 루비.”

“…아.”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숨이 가빠졌다. 동시에, 내 세계가 흔들렸다.

그 여상한 한 마디에 의해 거대한 진실을 깨달은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늘 비어 있었던 가슴 한구석에 톱니바퀴가 나타나더니 다른 부품들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이 들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방금… 방금 뭐라고….”

“사랑한다고 한 거?”

“아니, 그거 말고….”

“루비.”

아퀼라가 눈을 휘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네 이름을 닮은 보석이야. 그리고 너를 닮았지. 반짝거리잖아.”

“아아…!”

결국 나는 두 손에 머리를 파묻은 채 자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스스로 지워버린 것을 바로 지금 운명처럼 되찾게 되었구나.

왜냐하면 그건, 루비는….

그건 내가 잃어버린 내 이름이었다.

* * *

그러니까, 나는 루비였다.

그게 바로 내 이름이었고, 그게 나였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루비 반지에 본능적으로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척 사랑하던 이름이었으니까.

내 이름이 ‘루비’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세계가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변화하는 느낌과 함께, 마침내 나는 내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전생의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아이의 표본이었다.

나는 로판에 빙의하는 주인공들이 자주 그렇듯이 고아 출신도 아니었고, 가난한 것도 아니었으며, 왕따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정말 지극히 평범한 표준의 사람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자살해서 이 세계에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날 나는 이 세계의 사루비아가 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 온 뒤, 나는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한 느낌을 받았다. 꼭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게 빅팀이 말한 부품이 빠진 느낌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더욱 아퀼라에게 의지했다. 신기하게도 아퀼라와 함께 있을 때면 그 빈 구석이 메워지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나에 대한 아퀼라의 사랑은 너무나도 커다래서 다른 빈 곳까지 대신해서 채워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이름을 되찾은 순간, 비어 있던 부품이 진정으로 맞춰졌다. 그건 내가 잊고 있던 ‘전생의 나’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아….”

그러니까, 나는 제 손으로 지워버린 기억을 아퀼라 덕분에 되찾은 거다.

바보같이, 결국 또 이렇게 올바른 길을 아퀼라에게서 찾게 될 줄도 모르고 엉뚱한 짓을 하고 다녔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아퀼라를 향한 사랑이 솟구쳐 올랐다.

사실 난 그동안 나에 대한 아퀼라의 사랑이 그에 대한 나의 사랑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을 되찾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동등해진 느낌이었다.

“사랑해, 너를 너무 사랑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되찾아야 하는 것이 이름이었다는 사실도 몰랐으면서.

아퀼라는 그저 내가 루비 반지에 꽂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루비’라는 애칭으로 불러주었다. 정말 대단한 감이었지만, 동시에 언제나 나만을 바라보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기에 나올 수 있는 감이기도 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지금 이 벅차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를 너무 사랑해서 이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아퀼라를 꼭 끌어안았다.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고, 이 사랑을 그에게 보내려 애쓰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

“사, 사루비아. 나 숨 좀….”

“…미안.”

아차, 국경방위군에서 기른 힘 때문에 내가 너무 강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군. 나는 얼른 그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뺐다.

“…아퀼라,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신기하다.”

아퀼라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 생각을 자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내가 너를 더 사랑할걸.”

“아닐걸.”

그렇게 잠시 유치한 대화를 이어가다, 나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퀼라는 손을 뻗어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

“내 루비.”

“으응….”

결국 나는 다시 훌쩍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사랑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었다.

아퀼라는 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데도 이유를 묻지 않고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말 담담한 애였다.

“너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모르지.”

“사루비아, 너도 늘 그래. 네가 내 세계를 이루잖아.”

“사루비아 님은 가끔 보면 참 신기하신 분 같습니다. 취향이 확고하신 것도 같은데, 또 어떨 때는 불분명하셔서.”

달린이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달린은 참 눈썰미가 좋다.

나는 그냥 이유 없이 아퀼라에게 끌렸다. 그러면서도 아퀼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왜 아퀼라를 사랑하는지 그 이유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아퀼라의 앙칼지게 올라간 눈꼬리가 좋다.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 싸늘해 보이면서 사실 마음이 물렁물렁한 점도 좋다. 예민하고 마음이 약하지만 내 앞에서는 강한 척하려는 점도 좋다. 나와 관련된 일이면 태도가 한결같은 점도 좋고, 날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싸늘해질 수 있는 점도 좋다. 따뜻한 체온도 좋고, 단단한 어깨도 좋고, 예쁜 모양의 코도 좋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눈치가 아주 빨라서 나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도 좋다.

그래서 나는 아퀼라를 사랑했다.

나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눈가를 찌푸리다가, 아퀼라에게 입을 맞췄다. 말랑거리는 감촉이 배어들면서 온 몸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으응….”

내가 키스해 달라고 재촉하자, 아퀼라는 그대로 더 강하게 입을 맞췄다. 오래도록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진 후, 그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내 루비.”

“아, 잠깐만….”

귀에서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못내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몸을 비틀었다. 아퀼라는 그런 내 몸을 붙잡아 침대에 바로 눕혔다.

그리고 대충 그렇게 됐… 다고 할 줄 알았지. 오늘은 더 길게 묘사해 버릴 거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아퀼라를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팔 들고.”

“응….”

그는 내 팔을 위로 올려 옷을 벗겨냈다. 단추가 달린 귀여운 핑크색 잠옷이었지만, 단추를 하나하나 풀다가는 답답해서 죽을 것이다.

순식간에 옷이 벗겨진 뒤,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이 자식, 지금 나만 옷을 벗겨놔?

나는 그에게 매달려 끙끙대며 잠옷을 벗기려 애썼다. 아퀼라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상의를 던져 버렸다.

상체가 드러나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이곳을 만지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그렇게 한참을 키스하다가, 나는 어느새 내가 속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보복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그의 속옷을 벗기려 했다가….

“오…. 로판이네.”

“뭐?”

“아니, 오늘따라 상태가 미친 것 같길래….”

“평소랑 비슷하지 않아?”

“아냐, 미묘하게 더 강해졌어….”

“네가 너무 야하게 구니까 그렇지.”

그가 내 콧잔등을 약하게 깨물며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물렸으나, 그의 팔에 의해 허리가 붙들리고 말았다. 나는 그가 허리를 제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슬슬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는 발을 들어 그를 가볍게 툭툭 치며 물었다.

“아퀼라.”

“응.”

“너 지금 미쳐 있지.”

“너도 그렇잖아.”

나는 눈을 슬쩍 굴려 어딘가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전체 연령가인 내 인생에서는 여기까지인가 보군. 그 이후로는 대충 그렇게 됐다.

아퀼라와 나는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아퀼라가 내게 필요한 것들을 모두 이루어 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 내 혁명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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