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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57화 (230/233)

지금 나에게 소중한 거라 함은 아퀼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퀼라는 이미 사루비아라는 사람을 이루는 가장 중요힌 부품으로써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퀼라가 아닌 새로운 소중한 존재를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퀼라뿐만 아니라 이미 내게 소중한 동료들, 이시나 님이나 카론, 윈터 님, 달린, 베니 등등도 모두 제외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역시 단기간에 새로운 무언가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건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이미 소중히 여기고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건 없을까?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내가 이 세계에 처음 빙의했을 때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고아원!’

그래, 그러고 보니 고아원에 머무를 시절에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니까 원래의 사루비아의 친구 말이다.

원래의 사루비아가 소중하게 여기던 존재라면, 지금의 나에게도 소중한 존재로 통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 안 그래도 고아원을 생각하며 거슬리는 부분도 있었고 말이다.

‘고아원 원장!’

고아원에 가서 내 옛 친구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는 김에 신바람을 내며 날 군대에 밀어 넣은 그 원장 놈의 얼굴도 볼 생각이었다.

물론 그 원장 놈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국경방위군에 가게 됐을 것이다. 계약 마법은 불이행시 격렬한 고통을 유발하니까.

하지만 내가 고아원에서 지내던 동안 그녀가 내게 일을 잔뜩 시킨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장담하건대, 그녀는 돈도 좀 착복했을 거다. 그게 로판 세계의 보편적인 고아원 원장의 행동이기도 하고, 우리 고아원은 공립 고아원인데도 불구하고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았으니 말이다.

좋아, 내가 휴가 동안 해야 할 마지막 일을 찾았다!

결심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아퀼라를 잡아당겼다.

“아퀼라, 얼른 일어나! 갈 데가 있어!”

“어디?”

“이 병을 낫게 할 방법을 찾으러!”

* * *

내가 지내던 고아원은 수도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간 지역에 있었다.

지금 수도 밖은 제국군이 있었기에 함부로 통행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국경방위군에 그에 대항하며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기에 고아원까지는 갈 수 있었다.

아퀼라와 나는 마차를 타고 고아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내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마침내 마차가 고아원 앞에 도착하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용맹한 얼굴이 되어 마차에서 내렸다.

“가자!”

나는 달린이 그러했듯 요란하게 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원장님, 원장님!”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나이가 든 모습의 고아원 원장이었다.

“누구세… 잠깐.”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곧 희게 질린 얼굴이 되어 외쳤다.

“네 이름이, 그, 그… 맞아! 사루비아!”

“기억하실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요.”

내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그녀가 말을 더듬더니 물었다.

“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우리 고아원의 소중한 아이인데. 그, 그래서 무슨 일로 왔니?”

“그냥요, 원장님이 뵙고 싶어서 왔어요.”

“그, 그렇니?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할까? 호호호….”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나는 일단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고아원 복도를 살펴보았다. 내가 있었던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어떻게 여긴 구 년 동안 발전이 없지? 역시 원장이 돈을 횡령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몇몇 어린아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가 누군가를 입양하려고 왔다고 생각한 듯 반짝거리는 눈이었다.

“와, 머리 색이 엄청 예뻐!”

“저런 머리 색은 처음 봐.”

아직 이종족에 대해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말을 했고 말이다.

그렇게 원장실에 도착해 소파에 앉았을 때, 원장은 조심스럽게 내게 차를 내왔다.

“사루비아, 잘 지냈니?”

“군대에 끌려 갔는데 잘 지냈겠어요?”

가시 돋친 말이었다.

“살아서 나와서 다행이지만요. 원장님도 제가 살아서 나올 줄은 모르셨겠지요.”

“무슨 소리니, 사루비아, 호호호…. 나는 당연히 너를 믿었지.”

“예….”

내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하자, 그녀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사루비아, 옆은 누구니? 혹시 결혼했니?”

“결혼할 사람이에요.”

아퀼라는 슬쩍 내 눈치를 보고 괜찮다는 답을 얻어낸 뒤 원장과 악수했다.

“아퀼라라고 합니다.”

“바, 반가워요. 사루비아가 아주 훤칠한 신랑감을 데려왔네, 호호.”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조금 지루해졌다. 아무래도 본론으로 들어갈 때인 것 같다.

“원장님, 그래서 지금도 잘 횡령하고 있으신가요?”

“풉! 콜록, 콜록! 횡령이라니, 무, 무슨 소리니?”

그녀는 발뺌했지만, 나는 사람의 눈치를 읽는 데 능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찔러본 거였지만, 오히려 그녀의 반응에서 내 말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래 해 먹으시지 않았어요? 이쯤이면 슬슬 손을 떼셔야 할 것 같은데.”

“사루비아….”

갑자기 그녀가 간절한 눈빛이 되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니? 내가 잡혀가면 이 아이들은 어쩌려고….”

“새로운 원장 선생님 아래에서 잘 살겠죠, 뭐.”

“사루비아, 제발….”

이제 그녀는 어릴 적 내 앞에서 보여주던 당당함은 잃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루비아, 내가 뭘 하면 되겠니? 원하는 게 있니, 응?”

“전 그냥 횡령을 멈추고 아이들한테 일 좀 그만 시키면 좋겠는데요. 어려운 일인가요?”

“사루비아, 그건….”

동공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우리가 돈을 횡령하는 건…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

“진심이세요?”

“고아원으로 오는 지원금은 너무 적어서, 이곳의 선생님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얹어 주지 않으면 선생님들이 도망간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하긴, 복지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아돌브 제국이 고아원에 많은 돈을 줄 것 같진 않았다.

잠깐,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횡령을 멈추라고 하면 오히려 선생님들이 도망가고 아이들의 삶이 더 불행해질 수도 있나?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쭙잖은 선의를 베풀었다가 일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보통 로판에서 그런 상황이 자주 나오지 않는가.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금화를 적선했다가 아이들이 오히려 돈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 위험에 빠지는….

그래서 나는 이제 딜레마에 빠졌다.

‘아오, XX, 일이 뭐 이렇게 꼬이는 거야?’

아무래도 내가 함부로 개입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지금은 내가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 나는 내가 여기 온 목적을 꺼냈다.

“원장님, 혹시 제가 어릴 때 자주 놀던 애 기억하세요?”

“릴리 말하는구나!”

원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녀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마침 잘됐다, 그 얘기를 하려고 했거든! 그 애는 여기서 새로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단다.”

“새로운 선생님이요?”

“그래, 그 애를 불러올게!”

그 애가 마침 여기서 일하고 있다니 대단한 행운이기는 했다.

원장이 사라지고, 나는 내 기억 속 그 애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것 말고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니, 이렇게 기억이 안 나서야 그 애를 내 새로운 소중한 부품으로 만드는 게 가능한 걸까?

그때, 내 기억 속 그대로 갈색 머리를 한 여자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안녕, 사루비아. 기억나니? 나 릴리였는데.”

“아, 그래, 릴리!”

그제야 기억이 좀 나는 것도 같았다. 원래의 사루비아는 특이한 머리 색 때문에 이 고아원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릴리만이 사루비아와 대화를 나누던 애였다.

“이 고아원의 선생님이 되었다고?”

“응, 운이 좋은 편이지. 나만큼 일이 잘 풀린 애는 없을 거야.”

그녀는 오랜만에 나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았다.

“그나저나 이 고아원의 횡령을 고발하려 한다면서?”

“응, 원래는 그랬었는데….”

“하지만 사루비아, 그러면 정말로 곤란해져. 안 그러면 선생님들은 거의 무보수 노동을 해야 하는걸.”

그 말을 듣고, 나는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바로….

‘아돌브 제국!’

결국 또 아돌브 제국 이 XX가 문제였던 것이다. 아니, 황제는 대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던 거냐? 정말 복지에는 돈을 한 푼도 안 쓴 건가?

“…그 문제는 이제 해결될 거야. 지금 황성 상황은 너도 알지?”

“시민들이 황성을 점령하고 있다는 거?”

“그래. 시민들이 새로운 정부를 만든다면 우리의 입장에서 일반 사람들을 위한 복지에 돈을 더 많이 쓰지 않을까? 난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어.”

“그랬으면 좋겠네.”

아무래도 이 횡령 문제는 당장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역시 현실은 사이다가 아니구나.’

나는 울적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빌어먹을 현실 세계에 내가 기대하던 사이다는 없었다.

얼마 전 아퀼라의 어머니를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 사람도 대단한 악인이 아니었어. 평범하지만 공포에 질려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이었지. 우리가 복수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고.’

그랬기에 그녀와의 대화는 굉장히 찜찜하게 흘러갔었지. 결국에 인연을 끊기는 했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아원에서 겪은 일에 원한을 품고 있지만 지금 원장에게 무턱대고 복수할 수는 없었다. 이곳의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그래서는 안 됐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뭐.’

나는 이제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현실은 답답하고 팍팍했다. 현실에는 명확한 선과 악도, 분명한 성공과 실패도 없었다. 현실의 것들은 언제나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그 애매모호한 것들 사이에서도 선택을 내리고,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현실이었다. 아마 우리의 혁명도,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내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이던 릴리가 입을 열었다.

“사루비아, 변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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