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그래서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기로 했다고?”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아퀼라의 결심을 들었다.
내 웨딩드레스 차림을 보고 이상 반응을 보였던 아퀼라는, 나에게 부모님과의 관계를 털어놓은 뒤 갑자기 부모님과 의절할 것을 선언했다.
“응,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질 것 같아.”
“그, 그게 맞긴 하지. 사실 이제 와서 나타난 것도 난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부모님이 나를 버렸으니까, 그 순간 우리의 인연은 끊긴 게 맞는 것 같아.”
대체 무엇이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퀼라가 다행히도 옳은 결심을 내린 것 같다.
오늘은 아퀼라가 다시 부모님을 뵙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아퀼라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조금 심드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퀼라의 모습을 보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퀼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아퀼라를 반기기까지 했다. 우리는 그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우선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소개도 하지 못했기에, 나는 여자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는 아들과 연락도 하지 못할 거, 아들과 결혼할 여자의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지.
“저번에는 인사를 못 드렸는데, 저는 사루비아라고 합니다. 아퀼라랑은 국경방위군의 동기예요.”
“그, 그렇구나.”
여자는 어색하게 내 인사를 받았다가, 내게 호의적인 미소를 띄워 보였다.
“정말 예쁘구나, 아가. 너처럼 예쁜 애는 처음이야.”
그거야 제가 로판 여주니까 당연한 얘기겠죠. 그나저나 벌써 나를 아가라고 부른다고?
괜히 내 이름을 소개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아퀼라가 잘 처신할 것을 믿고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퀼라가 옆에서 다시 여자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가져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생각은 마쳤니? 응?”
“예, 먼저….”
그러더니 아퀼라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는 어머니를 용서하기로 했어요.”
“풉! 콜록콜록!”
“사루비아, 괜찮아?”
내가 사레가 들려서 열심히 기침을 하니 아퀼라가 티슈를 뽑아다가 입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부모님과의 인연을 끊겠다면서 다짜고짜 용서해?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퀼라의 눈을 보았다가,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 같은 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도 그가 어머니를 용서하겠다는 건….
‘그래야 인연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원한을 품고 있는 것도 일종의 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미워하던 누군가를 용서하게 될 때야, 비로소 모든 인연을 끊어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계속하라는 듯 아퀼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어갔다.
“더 이상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제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아퀼라가 그렇게 말하며 애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알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상실로 인해 깊이 고통받는다면, 저도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 거예요. 제가 어머님과 똑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는 알 것 같아요.”
“그, 그래, 아퀼라! 우리는…!”
“하지만 두 분을 제 부모님으로 다시 받아들이지는 않겠습니다.”
그 말에 여자가 놀란 듯 입을 떡 벌렸고, 아퀼라는 그 틈을 타 말을 이어갔다.
“제가 부모님을 용서한 건 부모님을 완전히 떠나보내기 위함입니다. 부모님이 저를 버리셨던 순간부터 저희의 인연은 끊긴 거겠죠.”
“그래, 물론 그건 우리 잘못이야! 하지만 다시 인연을 붙여볼 수는 없는 거니?!”
“예, 그건 안 되겠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해서요.”
아퀼라가 나에게 눈짓했고, 나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뵐 일은 없겠지만, 앞으로도 잘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두 분의 행복을 비는 건 진심이에요. 저도 행복해졌으니, 두 분도 이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아퀼라….”
우리를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그 말을 듣고 멍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아퀼라의 말을 듣고 뭔가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퀼라와 함께 자리를 떠나며,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쨌든 자신의 부모님을 다시 외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난 또 애가 마음이 워낙 물렁물렁해서 고구마 전개로 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현실은 고구마도 사이다도 아닌 애매모호한 결말이었다.
젠장, 역시 현실에 완벽한 사이다란 없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나는 아퀼라를 붙든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퀼라.”
“응?”
“네가 날 유일한 가족으로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너는 반드시 평생 행복할 거야.”
“사루비아….”
아퀼라가 감동받은 눈이 되어 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방금 전 그의 어미니를 상대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한 말은 진심이야. 난 너만 있으면 돼.”
“응, 그건 나도 그래….”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순식간에 열기가 타올랐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곤란하겠지?’
역시, 신혼은 언제나 불타오른다는 게 정말인가 보다.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고, 대충 그렇게 됐다.
* * *
그날 밤, 나는 갑작스럽게 온몸을 찌르는 통증에 잠에서 깨어났다.
“으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명 생리 기간도 아니고 몸살에 걸린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옆에서 아퀼라가 내 신음 소리를 듣고 일어난 듯했다. 황급히 불을 켠 그가 내 모습을 보고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사루비아, 괜찮아?”
“아니, 죽겠어….”
“…열이 나네.”
내 이마에 그의 차가운 손이 와 닿았다.
…차갑다고? 아퀼라의 손이 차갑게 여겨질 정도라니, 정말 열이 심각하게 나긴 하는 모양이다.
아퀼라는 급히 의사를 불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돈이면 다 되는 건지 의사는 빠른 시간 내에 와 주었다.
그러나 나를 진찰한 의사는 아무런 이유도 찾아내지 못하는 듯했다.
“열이 나긴 나는데… 어디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 염증이 생긴 걸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발열 외에는 아무런 증상도 없으니 더더욱 모르겠습니다만, 휴우….”
의사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했다.
“높으신 분들은 이럴 때 몰래 흑마술사라도 부르던데….”
“예?”
그의 말에 아퀼라가 빠르게 반응했다.
“흑마술사를 쓰기도 한다고요?”
“…예, 사실 흑마술은 의료에 도움이 많이 되어서, 높으신 분들은 진찰할 때 의사와 함께 자주 부르고는 합니다. 뭐, 황실이 압박 덕에 요즘은 흑마술사도 씨가 말랐지만요.”
“잠시만요….”
아퀼라는 나와 눈을 마주친 뒤, 의사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저희에게 아는 흑마술사가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 당연하죠! 여기 있는 분들끼리 입단속만 잘해주신다면….”
“이제 황실이 몰락했으니, 예전처럼 흑마술이 탄압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럼 제가 흑마술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예, 그래 주신다면 저야 편한 일이죠.”
‘흑마술이 의술에도 도움이 된다니. 이토록 편한 걸 그동안 높으신 분들만 썼다는 거지?’
내가 끙끙대면서도 흑마술의 쓰임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아퀼라는 빠르게 움직여 빅팀을 불러왔다.
곧 자다 말고 우리 집으로 끌려온 빅팀이 비몽사몽한 상태로 나타났다.
“사루비아 님? …헉!”
빅팀은 내 상태를 보고 잠이 달아났는지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그는 의사의 말대로 순순히 마법을 사용했다. 정확히 어떤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내 상태를 전체적으로 살피는 일종의 탐지 마법인 것 같았다.
검은색 광선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스쳐 내려갔고, 곧 의사와 빅팀의 표정이 모두 이상해졌다.
“으음…. 아무 이상도 없는데요?”
“정말 그렇군요.”
의사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병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셨습니까?”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좀 화병에 걸릴 뻔했었긴 하죠.”
그 말에 아퀼라가 몸을 움찔했다.
물론 그건 아퀼라를 놀리려는 거지 진담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작 아퀼라의 어머니 따위는 국경방위군으로 단련된 내 멘탈을 흔들어놓지 못했다.
“그런데 전 진짜 늘 긍정적인 사람이란 말이에요. 뭔가 다른 데 이상이 있는 거 아닐까요?”
최근에 내게 일어난 일을 되짚어 보자면.
“그러고 보니 최근에 굉장히 강력한 흑마술에 완전히 잠식되었던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나?”
“아!”
그 순간 빅팀이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정말 흑마술적인 병일 수도 있겠어요! 마술의 흔적에 집중해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곧 광선이 다시 한번 내 몸을 훑었다. 탐지를 마친 빅팀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나를 보았다.
“사루비아 님….”
“왜? 죽을병에 걸리기라도 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사루비아 님의 육체와 영혼 모든 곳에 흑마술의 흔적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싶어서요….”
그가 지금 내가 아픈 원인을 아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빅팀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흑마술에 노출된 적이 많으시죠?”
“…응, 많지.”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흑마술과 접점이 많았다.
흑마술로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사탕을 쓰며 그 대가로 기억을 잃어버렸지. 2황자군이 만들어낸 흑마술 아공간에 갇혀서 피까지 토한 적도 있었다. 황제에게 미향을 쓸 때도 피하지 못하고 거기서 버텨야 했었지.
결정적으로 황성 지하실에서는 굉장히 강력한 흑마술인 마력 3회전 공법에 갇혀서 가상 세계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했고….
“예, 아무래도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은데요.”
“무슨 문제인데?”
“흑마술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을 구성하는 몇 개의 중요한 부품이 있습니다. 그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죠. 예를 들어 연인, 가족, 직장, 뭐 이런 심리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이 하나의 인간을 이룬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사루비아 님은 그중 중요한 부품 하나가 빠져 있는 상태예요. 흑마술 때문에 부품이 사라졌다는 건 제 추리일 뿐이지만요. 사루비아 님이 개인적으로 중요히 여기셨던 무언가를 흑마술로 인해 잃으신 적이 있나요?”
“잠시만.”
소중한 뭔가를 잃었다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