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퀼라는 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해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퀼라의 과거를 대강 알고 있었다. 다 원작 ‘네미집’을 읽은 덕이었다.
원작에서 달린은 아퀼라에게 가족에 대해 묻고, 아퀼라는 달린에게 진실을 순순히 털어놓는다. 대충 그가 국경방위군에 갈 운명이기 때문에 그의 부모님이 그를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스스로를 ‘아르콘’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아퀼라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아퀼라가 사망했을 때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퀼라에게 더 정을 붙이기 전에 그를 버렸다고 나와 있었다.
그 내용을 읽으며 나는 정말 가지가지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대체 이놈의 세계는 어떻게 되어 먹은 거냐? 왜 모두가 불행한 거냐고.
나는 빙의한 이후 아퀼라에게 의도적으로 가족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퀼라도 나에게 가족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가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지내왔다.
그런데 이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버린 것이다….
내가 그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을 때, ‘어머니’라는 여자가 아퀼라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았구나. 살아 있었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며 아퀼라에게 뻗었다가, 그에게 미처 손을 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제대한 거니?”
“…예.”
“그랬구나, 네가 결국 끝까지 살아남았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아퀼라의 부모님이 당연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애를 버리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아퀼라의 어머니는 진심으로 아퀼라를 사랑하고 있던 것 같았다. 물론 오랜만에 다시 만난 자의 편리한 위선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내가 사이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자, 아퀼라가 나를 슥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이동해서 이야기하시죠.”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 * *
그렇게 잠시 후, 우리는 한 카페에 와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우리의 목소리가 묻혀서 대화하기에 좋았다.
우리 맞은편에 앉은 아퀼라의 어머니는 눈물 젖은 얼굴로 아퀼라를 계속 훑어보았다. 아마 그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가 한참 후에야 간신히 입을 뗐다.
“정말 잘 컸구나. 무사히 커 줬어….”
그녀는 아퀼라를 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반대로 아퀼라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이 과잉되어 있는 사람과 경직되어 있는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그 광경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아가….”
심지어 아퀼라의 어머니는 그런 말을 쓰기까지 해서, 내가 아퀼라의 눈치를 보게 될 지경이었다. 아니, 자기가 버려놓고 어떻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반면 아퀼라는 그녀에게 별 감정이 담기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잘 계십니까?”
“흑, 그래…. 네 아버지는 지금 황성에 있단다.”
황성? 그 말에 나는 아퀼라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 일반 시민이 황성에 있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네 아버지는 국민 의회에 참여하고 있어. 이 나라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이는 이전부터 이 나라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현장에서도 선두에 섰지.”
그러니까 아퀼라의 부모님도 시민으로서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어 그녀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이 나라에 분노한 이유는 단순히 많은 세금이나 황제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야. 우리가 분개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슬픈 눈으로 아퀼라를 바라보았다.
“바로 아퀼라 너 때문이었단다. 너를 이 나라에 뺏긴 뒤, 이런 고통을 주는 잘못된 국가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결심했어.”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더욱 황당한 심정이 되었다. 아니, 뺏기기 전에 버리셨잖아요? 대체 대화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아퀼라의 어머니, 아니, 이제 그렇게 부르기도 싫다. 여자의 위선을 보며 내가 분노했지만, 아퀼라는 내내 담담한 태도를 이어갔다.
“저 때문에 혁명에 참여하셨다고요.”
“그래. 이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사지에 내모는 건 잘못된 거니까. 휴가도 없고, 바깥과의 연락조차 불가능한 군이 말이나 돼? 이건… 이건 잘못됐어. 국가의 노예나 마찬가지인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극히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저 말을 그녀가 해도 되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너를 그렇게 보낸 뒤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했단다. 그동안 정말로 후회했어, 아퀼라. 아무리 네 죽음이 두려웠어도 너를 그렇게 버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드디어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건 모두 우리 잘못이었어, 흐윽…. 그래서 그 뒤로 우리는 자식을 국경방위군에 보낸 이들을 찾아다니며, 이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이번 일이 터졌을 때 기회라고 생각해서 참여하게 된 거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번 혁명에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제국의 무능함에 분노한 시민들만이 혁명에 참여한 줄 알았는데, 사실 이종족을 국경방위군으로 끌고 가는 이 제도로 인해 분노한 사람들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하긴, 이종족의 피가 점점 옅어지면서 조금이라도 피가 섞인 사람들을 군대로 끌고 갔기 때문에, 부모 대는 군대에 가지 않았지만 자녀 대는 군대에 가는 케이스도 흔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패티와 매티였는데, 그들은 제국민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이종족의 파가 아주 옅게 섞여 있었다. 그건 그들의 형편없는 신체 능력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자녀를 강제로 군대에 보내게 된 이들을 분노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식도 군대에 가게 될까 봐 떨었을 거고.
결국 이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국경방위군 제도에 대한 분노로 인해 참여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여자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아퀼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에게 무얼 바라시나요.”
“나, 나는….”
“용서를 바라시는 겁니까?”
“요, 용서는 가당치도 않다는 거 알고 있어. 다만, 다만….”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나와 아퀼라를 번갈아 보았다.
“네 소식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단다. 혹시 결혼한 거니? 나는 단지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어.”
“곧 결혼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퀼라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용기를 낸 듯이 말을 이었다.
“저는 왜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아, 아퀼라! 한 번만 더 생각해주렴. 한 번만….”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아퀼라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는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내 뜻을 따랐다.
우리가 자리를 떠나려는 것처럼 보이자 여자의 눈에는 절망이 담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퀼라가 천천히 답했다.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틀 뒤, 같은 시간에 이 자리로 다시 오겠습니다.”
“그, 그래! 제발 조금만 더 생각해주렴!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아퀼라 얘는 그렇게 안 생겨놓고서 마음이 여려서 탈이다.
물론 마음이 여린 게 나쁜 건 아니다. 우리 둘 중 한 명은 마음이 여려야 균형이 맞겠지, 뭐.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퀼라가 무르게 굴고 있는 걸 보자니 답답했다. 물론 아퀼라의 가좍사이니 내가 참견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서 난 그냥 아퀼라의 생각을 비워주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리 이제 옷 보러 가자.”
“옷?”
“응, 내 웨딩드레스 말이야!”
* * *
생모를 만난 이후 아퀼라는 계속 머리가 복잡한 상태였다.
‘어머니, 아버지….’
어릴 때부터 겉으로 티를 잘 내지 않는 아이였지만, 그는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랬기에 부모님에게 버려졌던 일이 큰 상처로 와닿은 거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인 사루비아를 사랑했다. 지금도 보아라. 사루비아는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단숨에 눈치채고 그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드레스를 보러 오지 않았는가.
사루비아가 드레스를 입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퀼라는 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예전과 달리 그는 더 이상 부모님이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가 직접 선택한 새로운 가족인 사루비아가 있었으니까.
아퀼라는 피로 이어진 가족보다도, 그가 직접 선택한 가족이 훨씬 의미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낳아준 그의 어머니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보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가족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거였을까?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사루비아면 돼. 정말 그걸로 충분해.’
주문을 외듯 다시 그렇게 중얼거려봤지만, 이 와중에도 그의 어머니는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아퀼라가 가볍게 머리를 흔들려던 그 순간.
“아퀼라?”
그의 눈앞에 사루비아가 나타났다.
사루비아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머메이드 핏의 드레스는 운동으로 만들어진 우아한 곡선을 잘 드러내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끝은 화려하게 퍼져 있어서 마냥 수수한 모양은 아니었다.
반짝거리는 보석들은 물결 모양을 이루고 있었기에 더욱 인어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고, 윗가슴과 목, 팔을 시원하게 드러내는 드레스는 사루비아의 흰 피부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즉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루비아는 당장 아퀼라를 사랑에 빠뜨려 죽이기 위해 나타난 존재 같았다.
만일 사루비아가 아퀼라의 목숨을 요구한다면 아퀼라는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보며 아퀼라는….
‘부모님은 중요하지 않아.’
조금 전까지의 고민을 전부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사루비아, 너무 아릅답… 콜록, 콜록!”
“뭐야? 사레들렸어? 괜찮아?!”
“미안한데 너무 예쁘니까 가까이 오지 말아줄래? 콜록!”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을 줄줄 늘어놓으며 아퀼라는 반쯤 기절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지? 이건 불법 아닌가?
“아, 아퀼라? 정신 좀 차려봐!”
“사루비아,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부모와의 인연은 더 이상 그의 삶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루비아만 있다면 이 세계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조, 좋은 결심인 것 같긴 한데 너 지금 초점이 없어!”
“안 돼. 더 자세히 봐야 하는데….”
“저, 정신 좀 차려봐!”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아퀼라의 고민은 단 십 분 만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