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국에서 독립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자치 도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가블 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저희는 국경으로부터 넘어오는 마물을 계속 막을 거고, 이웃 국가의 침략도 막아낼 것입니다. 그 대신 자치 도시를 운영하겠다는 겁니다.”
“마, 마물을 막는 것은 본래 이종족의 업이지 않습니까?”
다소 뻔뻔한 말이었다. 하지만 가블 님은 동요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건 저희를 대대로 속박해오던 오래된 흑마술에 의한 것입니다. 아마 교양이 있는 분이니 알고 계셨겠죠. 하지만 저희는 황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 흑마술을 완전히 파괴했고, 이제 이종족을 국경에 묶어놓을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낭패라는 얼굴이 되었다.
황실에게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으므로 제국민들은 계약 마법의 진실을 모른다. 그러니 국경 너머에서 계속해서 마물들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할 거고, 제국민의 힘만으로는 그것들을 막기 불충분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그는 이 순간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어떤 쪽이 그들에게 이익인지에 대하여.
잠시 침묵하다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자치 도시를 허용한다면, 앞으로도 모든 마물을 처리해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브테인 왕국군도 이 나라에서 몰아내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 혼자 내릴 결정은 아닌 것 같군요.”
남자는 주위의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그 답은 빠른 시일 내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아무쪼록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국경방위군과 시민 의회의 1차 협상이었다.
* * *
협상을 마치고 나오는 길, 윈터가 진지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사루비아, 그런데 너는 정말로 앞으로도 이 제국이 시민들에 의해 굴러갈 수 있다고 믿나?”
“당연히 아닙니다.”
“뭐?”
그 말을 듣고 반응한 건 유리였다. 유리는 놀란 듯 커진 눈으로 되물었다.
“혁명의 성과가 일시적일 거라고?”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황실이 점령당했다 해도 지방의 제국군은 아직 남아 있고 그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최악의 경우 계급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제국군 상층 및 귀족이 다른 나라와 연합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실이 무너졌다고 한들,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첫째로는 귀족들이 달려들 것이다. 그들은 제국군을 이용해 황성을 탈환하고 공화정을 세우고자 할 것이다.
둘째로는 부르주아들이 적이다. 그들 또한 유산 계층을 중심으로 한 친자본주의 중심의 국가를 세우고자 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이웃 국가들이 적이다.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 나라 또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웃 국가들에서는 군사를 보내 아돌브 제국의 혁명을 진압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 의회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혁명으로 조직되었고, 그것도 아르콘의 도움을 많이 받아 이루어진 혁명인지라,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아마도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시민 의회 쪽의 정치 개혁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다고 생각하지?”
나는 윈터의 질문을 듣고 눈을 휘어 웃어 보이며 답했다.
“다들 너무 순진하십니다. 이 나라의 혁명이 망하든 말든 저희랑 뭔 상관입니까?”
“뭐?”
“저희가 자치 도시를 허용받으면, 저희는 그곳만 잘 지켜내면 되는 겁니다. 이 나라 전체를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역시 사루비아, 정말 치사하다니까.”
옆에서 에이프릴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치사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르콘을 이용해 먹었던 아돌브 제국을 우리가 뭐가 좋다고 걱정해 주겠는가? 우리는 그저 우리만 잘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아르콘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 서서히 도시 밖으로 나가 제국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 되는 거지. 언젠가는 그런 일도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니겠지만.
“그럼 사루비아, 너는 의회에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어?”
유리가 그렇게 물었기에,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제국민들은 국경 너머에 마물이 득실거릴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당분간은 그럴 거고. 그들은 저희가 아니면 믿을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은 계획대로 이루어질 거다. 나는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우리는 국민 의회로부터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답변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 *
“이제 남은 일은 국경방위군을 어디에 언제까지 주둔시킬지, 아르콘의 자치 도시 영역을 어떻게 할지 자세히 정하는 거군.”
그레인 님이 정리하듯이 말했다.
참고로 지금 국경방위군은 황성 뒤 연병장에 함께 모여 있었다. 평소라면 우리를 두려워했을 제국민들도, 기분이 한껏 고양되어 있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웃어 주며 지나갔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국경방위군에 막 입대한 훈련병,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휘사관, 제대한 지 한참 지난 중년층까지….
‘국경방위군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사실 지금도 모든 병사들이 여기 다 모인 건 아니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불가능할 정도였기에, 국경방위군 중 대부분은 황성 밖에서 아돌브 제국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국경방위군 출신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계약 마법으로 인해 피해받아온 이들이다. 내가 이들의 복수를 해줬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되기도 했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다.
내가 그들을 보며 복합적인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내 손에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옆에 있던 아퀼라가 갑자기 내 손을 잡은 것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기에 그렇게 물으니,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루비아, 말단인 우리가 군 전체의 전술이며 국가의 영역을 정하는 일에도 관여해야 할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지금 안달 나 있다는 건 알 것 같다, 응.
하지만 그도 그럴 게, 우리는 막 불타오르는 신혼 생활을 보내도 모자랄 판인데 혁명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신혼집마저 혁명 조직에게 뺏겨야 했던 것이다. 이건 정말 부당한 처사다.
그리고 아퀼라의 말대로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아돌브 제국 자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고, 전생의 지식이 있다 해도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하니까.
“아퀼라, 네 말이 맞아. 우리는 휴가를 쓸 필요가 있어.”
나는 정말로 ‘대충 그렇게 됐다.’라는 서술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서술을 쓰지 못한 지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결심을 마친 나는 용맹하게 에이프릴에게로 걸어갔다.
“에이프릴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저 휴가를….”
“그래, 좀 쉬어라.”
“역시 안되는 거겠…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되물었지만, 에이프릴은 내가 맞게 들었다는 듯이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내게 휴가를 허용해준 것이다!
“에, 에이프릴 님!”
“너희도 신혼이니까. 휴가가 필요하겠지. 휴가 동안 둘이 시간 보내려고?”
“예, 결혼식 준비를 할 겁니다!”
“…아직 결혼을 안 한 거였어? 그런데 같이 살고 있던 거라고?”
“에이프릴 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함께 이뤄낸 혁명의 뒤처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흔들리는 동공의 에이프릴에게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넨 뒤, 아퀼라의 손을 붙잡고 달렸다.
아, 드디어 나는 휴가를 허가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혁명의 과업을 완수했다!
사실 혁명도 그동안 나에게 하나의 짐이 되어 나를 속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자유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란 없다! 나는 완전한 자유다!
* * *
우리는 빠르게 달려 집에 도착했다. 남들이 보면 급한 일이라도 있을 줄 알 정도로 우리는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충 그렇게 됐다.
대충 그러한 시간을 오래오래 보낸 뒤에, 우리는 우리가 세워야 할 계획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리가 이렇게 태연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에게는 중요한 할 일이 있지.”
아까 모든 과업이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사실 내가 완전히 행복해져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하기에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아퀼라와 나의 결혼식 준비였다!
“우리는 결혼하자마자 그동안 너무 바빴어.”
사실 결혼식은 핑계고, 우리는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결혼하자마자 흑마술 수색 특수군에 입대하고, 빅팀을 우리 집에 데리고 살고, 내가 갑자기 북부로 가게 되고…. 하여튼 정말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었다.
이제 좀 우리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누릴 때였다.
여유롭게 아퀼라의 품에 기대어 누운 채, 나는 결혼식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의 명단을 읊기 시작했다.
“먼저 사회를 맡을 사람.”
“그건 알타이르 님으로 하자. 그 인간 입을 잘 터니까 사회도 잘 볼 것 같아.”
“그래. 주례자는?”
“음… 대충 대대장님 중 한 분으로 하자. 그분들 말고는 딱히 어른이 없잖아.”
XX,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군대에서 맺은 인연밖에 없다니. 대체 이 세계에서의 내 인간관계는 어떻게 돼먹은 거지?
“피아노 반주는 넘어가고.”
“그래, 그건 이미 정해졌지….”
나는 “피아노 반주는 제가 할 겁니다!”라는 말을 약 백 번쯤 했던 베니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들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여기서도 축가를 정하나?”
“축가?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해?”
“음, 역시 축가는 아닌가 보군…. 그럼 다음으로 우리가 정해야 할 건….”
내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말을 이었다.
“웨딩 드레스랑, 네 정장이랑, 결혼식장이랑, 날짜랑, 반지랑…. 혹시 너 신혼여행이라는 것도 들어봤어?”
“처음 듣는데. 혹시 요즘 유행이야?”
“아니…. 그럼 그것도 생략해야겠다. 어쨌든 그 정도면 정하면 되겠다!”
결혼식을 거창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서 필요한 물건이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리스트를 만들어보니 꽤 많았다.
아퀼라와 나는 곧장 옷을 구경하러 번화가에 나갔다.
시내 거리는 꽤 혼란스러웠다. 많은 시민들이 의회의 공개 논의에 참여하기 위해 황성으로 몰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의회로 몰려가버리면 상인들도 오늘은 일을 하지 않으려나?
“상점가에 가보면 그래도 문을 열지 않았을까.”
“그래, 그쪽으로 가 보자!”
아퀼라의 말을 따라 상점가에 가보니 다행히도 많은 상점들의 문이 열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황성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중간에 나와서 상점에 들르기 때문인지 오히려 이전보다 장사가 잘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저쪽은 뭐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게를 보고 내가 그렇게 물으니, 아퀼라가 그쪽을 흘끗 살핀 뒤 대답해 주었다.
“식료품점이야.”
“아하.”
하긴, 황성에 오랫동안 짱박혀 있으려면 식량을 비축할 필요가 있겠지. 식료품점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우리가 그 줄을 지나쳐 보석상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뒤에서 웬 목소리가 우리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 너는 혹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아퀼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리를 불러세운 중년의 여성은 큰 충격을 받았다는 듯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아퀼라?”
“맞습니다만…?”
그렇게 대답했으면서도, 아퀼라는 상대를 알아차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반면 상대방은 아퀼라를 보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지? 여기 아퀼라를 알 만한 사람이 있나? 왜 저렇게 반응하고 있는 거지?
알 수 있는 상황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아퀼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알아차린 듯, 여자를 보는 그의 눈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을 충격과 공포로 몰고 갈 발언을 했다.
“…어머니?”
그 말을 듣고 나는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막장 드라마 전개람?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퀼라는 길 한복판에서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만났다.
그야말로 대환장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