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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52화 (225/233)

#25. 사루비아

그 뒤 우리는 황성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국경방위군을 반겨 주었다.

내가 제이슨을 비롯한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고 있던 그 순간, 병사들 사이로 불쑥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내가 지난 몇 주간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에, 에이프릴 님!”

환한 금발을 늘어뜨린 에이프릴이 다른 국경방위군들과 함께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오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그녀와 어색한 사이라지만, 나는 그녀가 2황자군과 함께 황성 앞에 목이 걸릴까 노심초사했다. 가끔 그녀가 죽은 채 황성 앞에 걸려 있는 악몽을 꿀 정도였다.

에이프릴의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의 끈이 탁 풀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그럼, 그 뒤로도 황실군이 계속 추적하긴 했지만 잘 도망 다녔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에이프릴은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많이 고생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그녀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져서, 내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도망치신 후에 국경방위군에 합류하셨습니까?”

“아니, 숨어다니다가 수도에서 사람들을 선동했지.”

“아하….”

역시, 그동안 손을 놓고만 있었던 건 아니구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헤헤.”

“사루비아, 너 분명히 에이프릴 님을 떠난 사람 취급….”

“조용히 하십시오, 이시나 님.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지금 황성은 시끄러웠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황성이 일반 시민들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사실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선 황성을 되찾기 위해 황실군의 군대를 지원하는 중이었다.

황실군은 계속해서 봉기를 진압하고 수도를 수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국경방위군으로 인해 번번이 막혔다. 국경방위군의 병사들은 수도를 둘러싸고 수도를 철통 경계했다.

황성을 점령한 시민들은 이 상황에서 황실군을 어떻게 해야 완전히 내쫓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아직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걸 왜 나에게 물어. 사루비아 너에게 이미 답이 있는 것 같은데.”

에이프릴이 나를 신뢰하는 어조로 그렇게 물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흠, 만일 내 계획대로 한다면….

“황제를 제국 최남단에 있는 섬으로 유배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칠십구 년 동안 말입니다. 섬을 탈출할 수도 있으니 잘 감시해야 합니다.”

“너 정말 악독하구나?”

그 말을 듣고 나는 좀 억울해졌다. 아니, 이 정도 유배형은 지구에서는 흔한 일이었는데요….

“그리고 또 네 계획은 뭔데?”

“음, 시민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상황 수습을 위한 단체가 조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직의 수장을 만나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현재 황성 내에서는 제국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어지면서 자발적으로 의회 비슷한 모임이 조직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말해야 할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독립.’

우리는 독립된 영토를 원했다.

비록 우리가 황실을 끌어내리는 데 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제국의 지배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쨌든 우리는 소수니까.

우리가 무리해서 제국을 지배하려 하다가는 괜히 제국 내의 분열을 촉발할 수 있다.

그러니 일부 영토를 분할하여 자치 도시를 꾸려 운영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일 것이다.

“사루비아 님, 그런데 땅을 달라고 하면 그냥 땅을 주는 겁니까?”

내 옆에서 고개를 기울이며 달린이 물었다.

“아니, 그럴 리 없겠지. 그러니 협상을 위해 준비해놓은 게 있는데….”

달린에게 내 계획을 설명해 주려다, 나는 에이프릴이 흥미로운 눈으로 달린을 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잠깐, 이 상황은?!

‘달린과 에이프릴의 대결!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 같은 거잖아!’

내가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던 삼자대면이 아닌가? 나는 좀 흥미로워졌다.

누가 이기는지 관찰이나 해보자는 심정이 되어, 나는 그들에게 서로를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에이프릴 님, 이쪽은 제 후임인 달린입니다. 지금은 설산 대대의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달린, 이쪽은 내 선임인 에이프릴 님이셔. 혁명군의 수장이라 하실 수 있지.”

“반갑습니다, 에이프릴 님!”

나는 달린이 단번에 이름을 기억한 것을 보며 감탄했다. 뭐지?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걸까?

에이프릴은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달린을 훑더니 천천히 인사를 건넸다.

“그래. 반가워, 달린….”

그러더니 에이프릴은 어쩐지 흥미로워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루비아, 얘 좀 너랑 닮은 것 같다?”

“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앗, 정말입니까? 헤헤, 사루비아 님은 제 롤모델입니다!”

확연히 다른 우리 둘의 반응을 보며 에이프릴은 더욱 흥미롭다는 얼굴이 되었다. 뭐지? 에이프릴이 저런 표정을 지어서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는데.

“그래서, 사루비아는 좋은 선임이었니?”

‘함정용 질문이군.’

저건 후임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질문이다. 만일 저기서 좋은 선임이라고 대답하면 솔직하게 말하라고 압박을 넣고, 사실대로 좋지 않은 선임이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네 선임을 욕하냐며 자리를 비켜주는 식이다.

그리고 달린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예, 사루비아 님은 좋은 선임이셨습니다!”

“솔직하게 답하….”

“얼마나 좋은 선임이셨냐면… 저희의 호흡기 건강을 염려해서 늘 바닥 사이까지 깨끗이 청소하게 만들고, 그렇지 않으면 저희를 밤새 청소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훈련에서 낙오하지 않도록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제가 훈련에서 낙오할 때마다 저를 바닥에 굴리셨기 때문입니다!”

…뭐지? 지금 쟤 나 먹이는 건가?

그건 나를 좋은 선임이라고 대답한 것도 아니었고, 좋지 않은 선임이라고 대답한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에이프릴도 나와 마찬가지로 괴랄한 표정이 되었다.

“얘 뭐지…?”

이 와중에도 달린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왠지 이 삼자대면의 승자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너는 어떤 후임이었던 것 같은데?”

“저야 당연히 좋은 후임 아니었겠습니까? 헤헤.”

“너 혹시 머리가 꽃밭이라는 소리 안 들어봤니?”

“우와! 얼마 전에도 타르? 님한테 그 말을 들었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이런 타입이군….”

에이프릴이 피곤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더니 내게 손짓했다.

“사루비아, 얘는 계속 네가 데리고 다녀라…. 말이 통하질 않는데 어떻게 대화를 하는 거지?”

“아니, 분명히 저랑은 나름 대화가 됐는데…. 얘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걔는 그냥 타고났어….”

그렇게 우리의 삼자대면은 에이프릴이 항복을 선언하고 내가 달린을 떠맡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이상하게 내가 손해 본 기분은 뭐지?

* * *

우리는 시민 의회의 대표를 만나러 황성 안으로 이동했다.

황성 안에는 시민군이 죽 진을 치고 나열해 있었다. 황궁을 장식하는 호화로운 가구나 장식들은 거의 다 파손되어 있었다. 먹고 살기 급급했던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런 꿈도 꾸지 못할 사치의 증표를 보고 상당히 분노했을 터다.

마침내 우리는 황제가 쓰던 응접실로 이동했고, 그곳에 모인 중년 남성 몇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저들이 나름 지식인들인 거겠지.

참고로 우리 측에서 대표로 나선 사람은 두 명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 명은 바로 설산 대대의 대대장, 가블 님이었고.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또 다른 사람은 바로 클레도어 산악대대의 대대장이었다.

나는 이제 그를 이름인 그레인 님으로 부르기를 허락받았다. 황성에서 그레인 님을 대면했을 때 그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나를 환대했다.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은 사실은, 그레인 님도 이전부터 국경방위군의 지하 혁명 단체에 가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놀라워하는 내게 그레인 님이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역시! 그 머리 색의 값을 했군!”

만나자마자 그런 말부터 하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나를 진심으로 반기는 것 같았다.

“나는 사루비아 양이 반드시 큰일을 해낼 것이라 믿고 있었네, 허허!”

어쨌든 시민 의회와 대화를 나눌 때는 우리 측에서도 연장자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그렇게 하여 가블 님과 그레인 님이 나서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뒤 소파에 서서 대화를 듣기로 했다.

“반갑습니다. 이번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시민 의회 측의 남자였다. 그는 호의적인 기색으로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일단 축하드립니다. 혁명이 성공했네요, 하하.”

지금까지 제국에서 차별받아 왔던 이종족이라지만, 지금 시민들은 이종족에 대한 공포보다는 착취를 반복하는 황실과 귀족들에 대한 분노가 훨씬 큰 상태였다.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그들의 편으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축하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왔던 일 아니겠습니까.”

그레인 님이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으며 화답했다.

“이번 혁명은 이종족의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정말 저희가 큰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하, 어쨌든 시민군의 공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잠시 서로의 공로를 치하하는 훈훈한 대화가 이어진 뒤, 대화는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시민 의회를 조직해서 통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요, 물론 임시 정부를 조직해야겠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 의회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더니 남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종족 여러분께서 저희와 함께 연합 정부를 구성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함께 말입니까?”

“예, 두 세력이 힘을 합친다면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하, 이거…. 사실 아시다시피 황성 함락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희가 상당히 힘을 썼는데, 이미 시민들을 중심으로 임시 정부가 조직되고 있으니 저희도 입지가 좀 난감합니다.”

가블 님이 떠보듯이 말하자,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는 정말로 이종족 여러분을 홀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의 공이 더 큰 것도 인정하고요. 다만 아무래도 소수인 여러분의 힘만으로 거대한 제국을 온전히 장악하기는 어려울 테니, 서로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분에게 충분한 권한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글쎄요….”

가블 님과 그레인 님이 눈빛을 주고받은 뒤, 곧 그레인 님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저희는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할 마음이 없습니다.”

“예? 그럼 무얼 하시려고….”

“그건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그보다 군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희 측 병사들이 막고 있어서 그렇지, 지금도 기존의 아돌브 제국군은 계속해서 황성을 되찾으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북부는 지금 브테인 왕국군에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브테인 왕국군….”

우리 측에서 군사를 언급하자, 남자는 우리가 저희 측의 제안을 거절한 건 금방 잊어버린 것 같았다. 대화는 더욱 심각한 분위기로 변했다.

그도 그럴 게, 사실 지금 시민들은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밖과 안에서 모두 공격하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허락해준 국경을 통해 쳐들어온 브테인 왕국군은 북부를 점령하고 수도를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그나마 아돌브 제국군이 그들을 막는 데 힘을 쏟고 있어서, 지금 황성 수복 쪽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우선 의용군을 조직해서 브테인 왕국군을 격퇴하려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아돌브 제국이 침략당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남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나 호전적인 국민성을 가진 아돌브 제국민다운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레인 님은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다면 제국군 측에서 싸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제국군과 다시 손을 잡아야 할 가능성이 높아질 텐데요. 제국군에 힘이 실린다면 혁명을 이어나가기도 힘들 겁니다.”

“그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계획했던 말이 나올 것이다.

곧 가블 님이 고개를 들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브테인 왕국군을 내쫓고 그들에게 빼앗긴 북부 지역을 되찾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주신다면 정말로 감사하지요.”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에게는 하늘에서 구원의 빛이 내려온 거나 같은 상황일 것이다.

“강력한 이종족 여러분의 힘이라면 쉽게 브테인 왕국군을 상대하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남자가 가볍게 고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때, 단호한 가블 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예, 말씀 주십시오.”

“저희는 저희가 되찾은 북부 지역에 이종족의 자치 도시를 건립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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