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제이슨은 갑작스럽게 손목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뭐지?”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와 함께 수도로 행군하고 있었던 다른 국경방위군들 모두가 일제히 동시에 제 손목을 내려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계약 마법이…!”
“계약 마법이 진짜 풀렸어!”
“이제 자유야!”
계약 마법을 알리는 문신이 손목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곳곳에서 기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고 환호했다. 계약 마법이 해제될 때마다 손이 하나씩 더 하늘로 올라왔다. 그렇게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이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들의 꽉 쥔 주먹이 혁명에 대한 열의를 내뿜고 있었다. 곳곳에서 병사들이 감동에 북받쳐 눈물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황성이 보였다. 저 앞에서 국경방위군 대장의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황성으로!”
“와아아아!”
제이슨은 다른 병사들과 함께 환호하며 힘을 주어 행진했다.
* * *
그 시각, 수도는 시끌벅적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브테인 왕국군이 쳐들어왔다고?!”
왜냐하면 아돌브 제국이 전쟁에서 멍청하게 당했다는 소식이 수도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오늘 자 신문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최근 자꾸 붙는 대자보 탓에 경비병들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싫어했지만, 오늘만큼은 군중을 막을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우리가 어떻게 전쟁에서 질 수 있지?!”
“그럼 북부 지역이 브테인 왕국에 점령당했다는 얘기야?”
“우리가 영토를 뺏겼다고?”
아돌브 제국에 대한 자긍심이 넘쳐났던 시민들은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돌브 제국은 그 어느 전쟁이든 훌륭하게 이겨왔던 위대한 국가가 아닌가.
비록 과거의 영광이고 최근에는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지만, 아돌브 제국민은 그 자긍심에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삶이 어려워도, 그들은 이 대륙 최강의 제국이라는 데서 힘을 얻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현 황제가 즉위한 뒤로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황제 즉위 과정에서 잡음을 만들어낸 것도 모자라, 영토 일부를 브테인 왕국군에게 내줬다고?
다른 나라도 아닌 오랜 라이벌 관계였던 브테인 왕국이었기에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동북부에 붙어 있는지라 예전부터 수 차례 전쟁을 치러왔던 브테인 왕국에는 절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깔려 있었으니까.
“폐하께서 어찌 그러실 수가….”
평범한 주부, 마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이 탄식했다.
비록 높아진 세금으로 인해 요즘 아이들까지 배를 곯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 믿으며 참았기 때문에, 그녀의 배신감은 더욱 컸다.
전쟁에서 졌다는 패배감까지 더해지자, 그동안 지독하게 수탈당했던 나날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니, 세금을 이만큼 걷어갔으면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해야지! 빵은커녕 요즘 양배추나 뜯어먹고 있는데!”
“맞아, 쇠붙이까지 다 뜯어가서 수도에는 쇠붙이가 남아 있는 집도 거의 없잖아!”
이제 사람들은 폭증한 세금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는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분노로 들끓는 군중 사이로 한 여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긴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였는데, 여인보다는 소녀에 가까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문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녀가 신문을 든 손을 하늘 높이 쳐들자 순식간에 군중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러분, 이 아돌브 제국이 브테인 왕국에 침략당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말도 안 되지!”
반사적으로 누군가가 대답했다.
“브테인 왕국과의 전쟁 때문에 북부 접경지역의 국경방위군이 동북부로 이동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이 빈 틈을 타 브테인 왕국군이 역으로 침입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언제 수도까지 침략해올지 모릅니다.”
그건 신문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모여 있던 사람들 중 약간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금방 그 내용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마물 지대로 인해 제국의 북부 지역에 주둔하는 군은 실제로 국경방위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에이, 설마…. 폐하께서 군사들을 보내 얼른 영토를 복구하겠지.”
“자네는 전쟁이 그렇게 쉬운 건 줄 아나? 한번 뺏긴 영토를 되찾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거 몰라?”
각양각색의 반응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여자가 입술을 꽉 깨물며 비장하게 외쳤다.
“저희가 직접 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황실의 손에 이 나라를 맡겨놓을 생각이십니까?”
“뭐, 뭐?”
불경하게 들리는 말에 사람들은 놀라며 경비병이 있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현 황제의 무능은 이미 충분히 겪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서 그렇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놓고 이렇게 형편없이 참패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맞는 말이군. 더 이상 황실을 믿을 수는 없어.”
그렇게 말한 건 중년의 남성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여자의 말에 진심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붙은 대자보의 내용이 모두 맞아떨어지고 있어. 더 이상 황실이 통치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첫째로, 그가 대자보를 인상 깊게 봤기 때문이었고.
“우리가 언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적이 있나? 대체 우리의 목소리는 언제 전해진단 말인가?”
둘째로, 그가 요즘 수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불온서적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생활고로 인해 황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자 수도에서는 불온서적이 대유행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 불온서적들을 몇 번이고 읽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최근 불온서적은 유행하고 있었다.
“아니, 불만이 있는 건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들 틈에서 다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어떻게 전합니까? 듣지도 않는데.”
“글쎄, 그렇다면 귀에 직접 박아주면 되지 않을까요?”
여자가 다시 은은한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그녀는 묘한 기대가 담긴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황성으로 행진하자!”
사람들은 놀라 숨을 멈췄다가, 지금 자신들도 당장 황성으로 침입할 수 있을 만큼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화를 어디든 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황성을 우리가 점령하고, 시민들의 통치 기구를 조직하는 거야!”
불온서적을 읽은 남성은 그렇게 외쳤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황실이 문제인 건 맞아요!”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던 어린애도 그렇게 외쳤으며.
“이 세금부터 어떻게 해야 돼! 이러다 다 굶어 죽겠어!”
마샤 또한 그들에게 감화되어 그렇게 외쳤다. 이러한 외침은 수도 곳곳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분노한 군중들은 손에 횃불과 무기를 하나씩 들고 황성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 * *
브테인 왕국의 침략 소식이 전해져온 그 날, 아돌브 제국의 황성이 점령당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황성으로 행진했을 때, 황성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고 한다.
황성은 먼저 쳐들어온 국경방위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간신히 국경방위군을 상대하던 황실 경비병들은 시민들까지 쳐들어온 순간 전의를 잃었다. 그들의 가족들 또한 시민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그들이 도착했을 때, 황제는 뒷목에 웬 길다란 침이 꽂힌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태였다. 그들을 막으라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긴 혈투 끝에 경비병들을 포박하고 황성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아돌브 제국의 황성은 국경방위군과 무장 봉기한 시민들에 의해 점령당했는데, 수도인 로뎀의 이름을 따 이를 ‘로뎀 점령 사건’이라고 부른다.
* * *
계약 마법이 해제된 것과 수도에 패전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계약에서 해방된 국경방위군이 황성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왔고, 조금 뒤엔 봉기한 시민들까지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틈을 타 무사히 동료들을 구할 수 있었다.
“브레이브 님, 레온 님! 베니! 무사했구나!”
“후훗, 이 정도야.”
“예,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아직 큰 부상을 입지 않고 경비병들과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퀼라와 윈터가 있던 곳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벽에 기대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사루비아, 왔나.”
“예… 다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그래, 아퀼라도 무사하다.”
그들을 데리고 성 안에서 빠져나간 뒤, 나는 성 곳곳에 흩어져 병사들을 유인하고 있던 동료들을 추가로 만날 수 있었다.
이시나, 카론, 타로, 플라토, 블레어, 토피오, 유리, 엘, 캐롯 등….
그들이 모두 무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
“잠깐, 달린은 어디 있지?”
그제야 내가 그녀의 존재를 까먹었다는 것을 알고 눈이 댕그래졌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허억… 사루비아 니임~!”
머리가 완전히 헝클어져 산발이 되고 옷도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달린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의 부랑자같은 몰골을 본 내가 멈칫했지만 달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휴우… 경비병들을 겨우 따돌렸습니다.”
“으응, 잘했어. 어떻게 따돌렸는데?”
“제가 공작성에서 모셨던 공작 영애를 흉내 냈습니다. 한번 보여드립니까?”
“아니, 괜찮아…. 그보다도….”
와아아아-!
사람들이 시끄럽게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쪽을 흘끗 본 뒤 부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민들의 힘만으로는 병사들을 진압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도록 저희들도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래, 힘들겠지만 다들 조금만 더 힘내자.”
타로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본인이 제일 힘들어 보이긴 했다.
그렇게 조금 더 전투를 이어가기로 한 뒤, 나는 몇몇 대원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바로 우리가 기절시켜 놓은 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폐하를 지켜라!”
역시나 시민들이 침입한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집무실을 지키는 병사들은 많았다. 황제의 안전이 그들에게 최우선이었으니까.
“사루비아, 우리가 막고 있을 테니 들어가도록.”
“예!”
이번에는 유리가 인성 파탄 85기와 함께 앞을 막아주었고, 나는 아퀼라를 데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황제를 진찰하고 있던 의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폐하를 이렇게 만든 무도한 침입자들….”
“넵, 무도한 침입자들입니다.”
나는 의원의 목에 검을 대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마취 침의 효과가 풀린 듯, 그는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크윽….”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직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퀼라에게 눈짓하자 아퀼라는 황제를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혔다. 황제는 이 이상 치욕스러울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폐하.”
“너희들이 이 나라를… 정녕 망칠 셈이냐?”
“폐하,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그를 보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이제 황성은 점령당했고 황제는 우리의 손에 있으니, 병사들은 우리가 황제를 해칠 것을 두려워해서라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혁명은 이미 일어났답니다.”
앞으로 이 제국이 어떻게 바뀔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지만, 확실한 건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래, 이 제국은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