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돌브 제국도 오래 해 먹었지 않았습니까. 이제 슬슬 뒤집힐 때가 됐습니다, 폐하.”
황제의 앞에서 하기에는 다소 격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XX, 내가 이 세계에서 배운 거라고는 이런 거칠고 직설적인 어휘들밖에 없는데 어쩌겠는가, 뭐.
한편 미향의 효과가 슬슬 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기침을 하며 어떻게든 향의 기운을 몰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폐하, 그래서 흑마술 아티팩트는 어디 있습니까?”
“크윽, 지… 읍!”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음, 저런 식으로 말을 막는 건 가능하군.
내가 윈터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가 움직였다.
쾅-!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윈터는 황제의 손을 잡아 비틀었다. 곧이어 다른 손까지 한 손에 붙잡아다 모아 쥐어 구속해 버렸다. 완벽한 제압이었다.
황제의 얼굴이 굴욕감에 물들었지만 나는 심문을 계속했다.
“지하에 흑마술 아티팩트가 있는 게 맞습니까?”
“그렇다… 큽!”
“아티팩트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습니까?”
“거울… 으윽!”
그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미향의 효과가 확실하게 돌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에이프릴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렇다면 지하실로 가는 입구는 어디 있습니까?”
이번에야말로 그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듯 몸부림을 쳤으나, 그의 입은 제 주인의 의사를 배반하고 진실을 술술 불고 있었다.
“1층의 남문으로 나가서, 풀숲을 잘 헤치면, 으읍, 입구가 보인다….”
“좋습니다. 가는 데 함정 같은 건 없습니까?”
“함정은 없….”
쾅-! 쾅-!
그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책상에 박기 시작했다.
부어오른 이마 아래로 핏줄기가 흘렀다. 벌겋게 핏발 선 눈이 섬뜩하게 나를 노려봤지만 그는 이미 모든 정보를 털어놓은 뒤였다.
“윈터 님, 이동해야 합니다.”
“알았다.”
윈터는 그제야 황제를 놓아주었다. 황제는 격렬하게 기침을 터뜨리면서도 우리의 뒤에 대고 처절하게 외쳤다.
“너희들이 무사히 이 황성을 나갈 줄 아느냐! 그래봤자 결국 경비병들에 의해 잡힐 것이다!”
미향의 효과가 나에게도 돌고 있기 때문일까, 시간을 끌려는 저 뻔한 도발을 나는 이기지 못했다. 한껏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폐하, 폐하께서 저희를 강하게 키우신 덕에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국경방위군이 순순히 전쟁에 나설 줄 알았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지금 황성으로 오고 있을 겁니다. 저희가 국가로부터 뒤통수 치는 건 제대로 배워서 말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많은 혜택을 주었는데!”
황제가 분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나는 내 선조들과는 다르다! 내 너희들을 안쓰럽게 여겨 줬거늘!”
아마도 그가 말하는 ‘안쓰럽게 여겼다’는 기껏해야 우리의 복무 기간을 조금 줄여 준 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참 우스운 위선이었다.
“폐하,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뚜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래는 폐하를 섬에 팔십 년간 유배 보낼 계획이었는데, 칠십구 년으로 줄여 드리겠습니다.”
“뭐, 뭐?!”
“폐하도 부디 저희에게 감사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빅팀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내내 꼼짝도 못하고 제자리에 굳어 있던 빅팀이 간신히 입을 열고 중얼거렸다.
“내, 내가 반역도가 되다니….”
“야, 베니 시켜서 산체스라도 불러와 볼까? 산체스가 반역이라고 할지, 혁명이라고 할지?”
“위대하신 사루비아 동지의 비범한 령도 아래 무궁한 감사를 느끼었습니다. 사루비아 동지는 가히 혁명적인 분이십니다.”
…쟤 저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건지?
하여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빠르게 지하로 이동하려고 했다. 황제가 벌떡 일어나며 외친 말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이 나라를 짓밟은 죄는 필시 치르게 될 것….”
훕-!
“크윽!”
황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빅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고 윈터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뒷목을 매만졌다.
황제의 뒷목에 마취침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마취침을 흔들며 깜찍하게 윙크했다.
“윈터 님의 복수다, 이것아.”
* * *
그렇게 윈터의 복수를 마치고 난 뒤 우리는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수많은 병사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퀼라…!”
병사들이 그 하나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퀼라는 검 한 자루로 가까스로 방어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옷 곳곳이 검에 베여 찢어져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저항에 가까웠다. 아무리 아퀼라라 하더라도 이 많은 수의 근위병을 상처 하나 없이 물리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나마 그가 불의 오러를 사용하고 있는 덕에 아직까지 붙잡히지 않고 버틴 것 같았다.
내가 문에서 나오자마자 병사들이 나에게도 달려들었지만, 나는 검으로 그들을 쳐내며 아퀼라를 향해 외쳤다.
“아퀼라, 길을 만들 수 있겠어?”
“사루비아….”
나를 발견한 그가 낭패라는 듯 말했다.
“…어렵겠는데.”
“미안, 조금만 더 버티고 있어! 내가 다른 길을 찾아볼게!”
아퀼라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지에 몰린 아퀼라를 보니 가슴이 아파 왔지만 이럴 때일수록 행동을 멈춰서는 안 된다.
나는 검으로 길을 만들며 뒷걸음질 치다가, 다시 윈터와 빅팀을 끌고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사루비아, 왜 다시 들어온 거지?”
“아무래도 밖으로는 길을 만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곳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집무실 한쪽에 나 있는 커다란 창이었다. 인간이 족히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것이었다.
나는 창문을 통해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3층 높이, 생각보다 높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이 정도 높이에서 강하하는 거야 나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레펠 훈련을 했으니까!’
국경방위군의 훈련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옆에 있던 커튼 여러 개를 뜯어낸 뒤, 그것을 묶어 밧줄을 만들기 시작했다. 윈터도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나를 도왔다.
곧 튼튼해 보이는 밧줄 하나가 만들어졌다.
나는 밧줄을 묶을 만한 곳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창가 주변에는 그럴 만한 곳이 없었다. 이상하다? 로판에서는 커튼으로 밧줄 만들어서 잘만 내려가던데?
내가 당황하고 있던 그때, 윈터가 내 손에서 커튼을 받아들며 말했다.
“사루비아, 내가 위에서 밧줄을 잡고 있을 테니 네가 빅팀과 함께 내려가도록.”
“그럼 윈터 님은…!”
“나는 이곳에 남겠다. 아무래도 나는 아퀼라를 도와야 할 것 같다. 저 상황이라면 혼자서는 역부족일 거야.”
아까부터 어쩐지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주기 위해 점점 동료들이 한 명씩 희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 바보같이 “흑흑, 윈터 님을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사루비아.”
“…감사합니다.”
나는 윈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국경방위군에서 배운 모범적인 자세로 커튼을 잡은 후, 아래로 강하할 준비를 마쳤다.
“그럼 윈터 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부디 성공시키기를.”
나는 손에 힘을 느슨하게 주었고, 그대로 내 몸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탁-!
곧 나는 완벽한 자세로 착지한 후 위에서 빅팀이 내려오기를 기다렸고.
“으아아아악!”
쿵-!
빅팀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추락한 것을 일으켜 세워주며 주위를 살폈다.
“얼른 가자.”
빅팀이 워낙 시끄럽게 내려온 탓에 경비병들이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몰려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데리고 빠르게 이동했다.
“남쪽 입구… 남쪽 입구…. 찾았다!”
다행히 우리는 경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남쪽 입구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국경방위군에서 익혔던 은신술이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거의 벽과 한 몸이 되어 이동했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풀숲을 헤치려던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그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나는 낭패감에 젖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주인은….
‘귀족 영애!’
아까 황성으로 침입할 때 시비를 걸었던 귀족 영애들, 그 중에서도 대장 격으로 보이던 금발 영애가 홀로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대체 왜 연회장을 벗어나 여기까지 와 있는 거지?
내가 당황해하고 있던 그때 그녀가 오만한 태도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흥, 지금 침입자가 발생했다고 경비병들이 난리가 났더군요. 나는 호위를 잃어버려서 그를 찾고 있었어요. 호위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가 없다면 누가 저를 마차에 올려 주겠어요? 그런데 당신은 여기서 뭘 하는 거죠?”
그녀가 수상하다는 눈길로 나와 빅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젠장, 정말 오만하고 재수 없는 귀족의 표본이군.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해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절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달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필 지금처럼 필요한 순간에 달린이 없다니!
그렇지만 여기서 질 수는 없다. 나 사루비아, 그 어떤 싸움이든 이겨왔지 않은가. 이 정도 싸움에서 질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제일 먼저 달린의 말투를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엥?”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음에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난 달린이 아니잖아!’
그래, 나는 달린이 아니다. 내가 달린처럼 행동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달린이 아닌 내 방식대로 이 귀족 영애를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방식은 바로….
“합!”
나는 손날을 세워 그녀의 뒷목을 내리쳤고 그녀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폭력과 공포가 모두를 구원한다….”
나는 뿌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 나는 빅팀과 함께 풀숲을 뒤졌고, 황제의 말대로 지하로 향하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켜 봐! 하나, 둘!”
내가 기합을 주어 문을 들어 올리자, 캄캄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꼭 예전에 흑마술사의 집에서 본 지하 계단 통로를 닮아 있었다.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따라와.”
“꼬, 꼭 저도 함께 가야 합니까?”
“베니, 베니!”
“경애하는 사루비아 동지께서 친히 길을 안내해주신다니 너무나도 영광되어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