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과거를 반추하던 황제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으려 애썼다.
“잠깐, 일단 먼저 대화를 해보지. 알고 있지 않나? 여기서 무작정 나를 죽이면 자네들은 인질로 잡을 사람을 놓치는 거야.”
그는 혼자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대화로 풀어나가려는 것 같았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우리를 묶어 놓으려는 속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하실로 가는 통로와 계약 마법의 매개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와 대화를 해야 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니, 나는 그의 대화에 응해주기로 했다.
“대화라…. 뭐, 저희한테 궁금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여기까지 어째서 쳐들어온 거지? 계약 마법이라도 해제하러 왔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 폐하께서도 이종족에게 하사하신 계약이 만고에 부당하다는 건 알고 계시니 참 다행이옵나이다.”
내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대꾸하자, 황제의 미간이 더욱 찌그러들었다.
“…계약 마법은 이 제국의 존속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우리는 아돌브 제국민도 아니다? …아니긴 하지. 어쨌든,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만든 얄팍한 평화의 맛은 어떠셨습니까?”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가 계약 마법을 일부러 즐기고 있는 것쯤으로 오해하고 있군. 나도 그게 이종족에게는 잔인한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
“내가 황태자이던 시절, 국경방위군을 순방하고 온 뒤 아버님이신 선황제폐하께서 내게 진실을 알려주셨지. 당시에는 미성숙하고, 통치자의 정의에 대해 믿음을 가진 소년이었기에 충격으로 받아들였지만.”
아, 우리 부대를 갑자기 찾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종족의 강제 복무에 숨겨진 진실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계약 마법이 이 제국과 제국민 전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안다. 선조들은 겨우 이종족을 정복했지만 그들을 통제하기는 역부족이었지. 내란으로 통치 체제가 계속 흔들리면 제국민들 또한 환란을 겪게 된다. 이종족들을 국경에 묶어놓고 점점 피를 희석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어.”
“그 방법이 어떻게 최선입니까? 통제하지도 못할 이종족을 왜 지배하기로 한 겁니까?”
“국가의 숙명이지. 제국의 영토를 넓혀야 신민들의 생활이 향상된다. 주변 군소세력을 정리함으로써 대륙 내 최강의 국가가 되었으니 올바른 결정이었던 셈이지.”
“저희를 완전히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보고 계셨군요.”
나와 황제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팽팽하게 말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건 황제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야! 비록 그 결정이 비윤리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내가 그 시대의 황제가 된다면 나라도 같은 결정을 내릴 거다. 황제가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건 이 나라니까!”
“그럼 지금까지 계약 마법을 유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피는 충분히 희석되지 않았습니까?”
“이종족이라는 배타적인 존재가 제국 전체를 단결하도록 만드니까.”
“아, 그래서 저희를 배척하신 겁니까?”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종족이 제국과 융화됨을 파악하고 후속 조치를 취했다. 자네들의 군 복무도 줄여줬고, 계약 마법으로 선별되는 이들의 인원도 서서히 줄일 계획이었지! 그랬기에 새로운 적을 설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브테인 왕국을 목표로 하여 이번 전쟁을 일으킨 거다.”
황제는 진심으로 그가 우리에게 시혜를 베풀어 줬다고 여기는 듯했다.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종족만이 아닌 전체 제국민을 통치해야 하는 황제로서 최선의 결정은 이종족을 국경방위군으로 활용하는 것이야.”
“예, 저는 평생 폐하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입을 다물고 품에서 스윽 폭탄 모양의 물건을 꺼냈다.
에이프릴이 제 안위마저 포기하면서 내게 건네주었던 흑마술 아티팩트. 그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미향이었다. 이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마치 술에 취한 것과 같은 효과를 줘서 진실을 술술 불어놓게 된다고 했다.
“폭탄?”
황제가 반응하자마자 나는 방 안으로 폭탄을 던졌다.
펑-!
방 안에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올라 잠시 시야가 가려졌다가, 금세 연기가 가라앉으며 요란하게 기침하는 황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계약 마법의 아티팩트는 어디 있지?”
“내가 그걸 말해줄 것 같나?”
그러나 그는 진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당황하는 얼굴이 되자, 상황을 알아차린 황제가 비웃듯 덧붙였다.
“지원군이 곧 올 걸 뻔히 알면서도 계약 마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다는 데에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 방에서 흑마술은 통하지 않아.”
뒤에서 빅팀이 속닥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사실입니다. 마력이 아예 차단되어 있습니다.”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은?”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더 끌어 주십시오.”
나는 빅팀을 스윽 가리며 앞에 섰고, 윈터에게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하며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검을 고쳐잡고 앞으로 나섰다.
“용기가 있다면, 저와 검으로 대련하십시오.”
“하, 내가 질 게 뻔한 싸움 아닌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황제는 우리의 술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황제가 이 제안을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황제를 구할 지원군이 오기 위해서는 황제도 시간을 끌어야 하는 처지이니까.
‘괜찮은 이유만 있다면, 황제를 대련에 끌어들일 수 있을 거야.’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적절한 핑계를 찾아냈다.
“저희는 어차피 지금 폐하를 인질로 잡았고, 얼마든지 폐하를 고문해서 계약 마법의 해제에 대한 정보를 캐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폐하께서 승리하신다면 인도적인 방법으로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고, 고문?”
그건 생각도 못 한 듯, 황제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긴, 귀하게 자란 그가 고문 같은 잔혹한 일을 겪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너희들이 진다면?”
“그럼 그냥 고문을 하겠죠, 뭐.”
그러자 황제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담겼다.
“당연히 내가 질 텐데, 그냥 고문을 자행하겠다는 거 아닌가?!”
노기를 토하던 그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런데 자네들은 나와 대련을 해서 이득을 얻을 게 없는데, 왜 대련을 하려는 거지? 역시 숨기고 있는 게 있군.”
“아, 그건….”
거기에는 딱히 변명을 댈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끝내지 못한 대련이 있으니까.”
자신의 차례임을 눈치챈 윈터가 나섰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팔 년 전 저희 부대를 찾아오셨을 때 대련했던 병사입니다. 기억합니까? 그때는 전력을 다해 대련하지 못했는데, 그게 한이 되어 다시 대련을 해 보고자 합니다.”
생각보다 윈터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황제는 윈터가 누구인지 기억해낸 듯, 차가운 윈터의 표정을 보며 탄식했다.
“…그래. 내가 철없던 시절이었지. 자네는 그때 그 병사로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검을 고쳐잡았다. 그가 윈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알겠다. 고작 그게 한이 되어 대결 신청을 한 거라면….”
쿵-!
황제가 검으로 바닥을 찍으며 도발했다.
“그 대결 신청을 받아들이겠다.”
그 말이 끝나게 무섭게, 윈터는 검을 든 채 매섭게 황제에게로 날아들었다.
챙-! 챙-!
검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전투 양상을 지켜보다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와….”
윈터는 오러를 전혀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결을 완전히 주도하고 있는 건 윈터였다. 그의 검 솜씨는 완전히 다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황제도 알아차린 듯, 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크윽!”
황제는 자리에서 빠르게 한 바퀴를 돌며 급소를 노리는 윈터의 검을 피해냈으나, 윈터는 그보다 빠르게 발을 움직이며 황제의 목 부근에 다시금 검을 가져다 댔다.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금세 승패가 정해진 허무한 대결은, 당연하게도 윈터의 승이었다.
“그래. 그때 우리가 끝까지 대결했다면 이런 결과로 끝났겠지.”
황제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높여 밖을 향해 소리쳤다.
“아직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거냐!”
그러나 밖에서는 여전히 고함 소리, 불의 힘을 담은 오러가 타오르는 소리,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만이 연이어 들려 올 뿐이었다.
‘아퀼라가 잘 버티고 있군.’
그러나 아퀼라가 몰려드는 경비군을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니 빨리 일을 끝내야 했다.
때마침 뒤에서 빅팀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마력 차단이 해제됐습니다. 이제 아까 터뜨렸던 미향이 효과를 발휘할 겁니다요.”
윈터는 여전히 황제의 목에 검을 대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폐하, 마력 차단이 해제됐습니다.”
“뭐?! 그게 무슨…!”
그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상황을 눈치챈 듯 빅팀 쪽을 휙 보았다.
“설마 흑마술사가…! 아니, 분명 흑마술사는 씨를 말렸는데!”
물론 제국군은 흑마술사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흑마술 수색 특수군으로 활동하던 우리는 흑마술사 잔당을 접하기 좋은 환경에 있었다는 걸 그는 간과했던 것이다.
나는 품에서 다시 폭탄을 꺼냈다. 빅팀이 에이프릴이 준 것을 본떠 만들어준 두 번째 폭탄이었다.
다시 한번 그것이 방 안에서 터졌고,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크윽, 이러려고 시간을 끈 거였군….”
그 말을 남기고 황제는 입을 틀어막았지만, 아마 이미 미향의 효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효과를 느끼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면에 있는 말들이 그대로 쏟아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예쁘게 미소 지으며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저희가 무슨 이유로 여기 왔는지 아십니까?”
“반역이겠지!”
마침내 나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 대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