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는 건 바로 귀족 영애들이었던 것이다!
‘큰일이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그들과 마주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넬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달리 ‘진짜’ 귀족 영애들이다! 진짜 귀족 영애의 말투를 쓰는 사람들 말이다!
‘아냐, 우리도 귀족 영애처럼 보일 테니까 괜찮아.’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드레스를 입은 거라고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는 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진짜 귀족 영애는 아니니까.
내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는 동안, 결국 그 영애들과 우리의 눈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상대편에 있는 귀족 영애들은 세 명. 그들은 각자 손에 부채를 들고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도 무턱대고 움직였다가는 군인 특유의 각이 딱 잡힌 걸음으로 인해 귀족 영애가 아님을 들킬 것 같아서, 나는 달린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일단 움직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어머나.”
내가 앞으로 한 번도 들어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귀족 영애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건 건 가운데에 있는 붉은 머리의 영애였다. 생김새가 로판 속에서 악녀로 나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시죠?”
그녀의 말에 오른편에 서 있던 금발의 귀족 영애가 끼어들었다.
“그 머리 색은….”
‘맞다, 머리 색!’
우리의 머리 색은 어딜 봐도 이종족이었다. 하필 이종족 중에서도 머리 색이 가장 화려한 우리 둘이 이 자리에 있다니.
제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간절히 빌고 있을 때, 금발의 영애가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말했다.
“델피늄 자작가의 라즈베리 영애의 머리 색과 닮았군요! 이번에 라즈베리 영애의 동생들이 사교계에 데뷔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분들이시군요!”
우리랑 비슷한 머리 색의 귀족 영애가 있다니, 기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이종족의 피가 섞였겠지.’
이제는 제국민과 이종족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피가 섞인 경우가 많아서, 아마 그 영애 또한 이종족의 피가 약간 섞였으면서 운 좋게 계약 마법에는 해당되지 않은 경우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여튼 이렇게 직접 걸어온 말에는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호… 맞답니다.”
로판에 나오는 귀족 영애의 말투를 최대한 따라했지만 영 어색했다. 누가 봐도 잔뜩 긴장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사교계가 처음이라 많이 긴장하신 모양이군요! 하필 승전 기원 연회가 처음이니, 긴장하실 법도 하지요.”
다행히 우리를 첫 데뷔탕트 때문에 긴장한 사람쯤으로 오해해 주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 가운데에 서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영애가 우리를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흩어봤다. 왠지 우리에게 호의적인 눈빛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긴장했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델피늄 자작가의 분들이 그런 옷을 입을 줄을 몰랐네요, 호호. 델피늄 자작님이 두 분을 위해서 많이 애쓰셨겠어요.”
‘……!’
나왔다, 로판 말투!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내가 로판 말투를 구사한 경험은 없지만, 남주들이 로판 말투를 쓰며 경쟁하는 장면을 왕왕 봐 왔기 때문에 저 비비 꼬인 언어를 잘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걸 해석해 보자면….
‘자작가의 형편에 맞지 않는 화려한 옷을 어떻게 입었냐. 너희 아버지가 그 옷 마련하느라 애썼겠다. 대충 그런 뜻이군.’
내가 로판 말투를 이렇게나 잘 해석하다니, 그간 내 앞에서 로판식 기 싸움을 벌여주었던 남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로판 말투를 해석할 수는 있지만 성격상 내가 직접 구사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말에 제대로 받아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귀족 영애들이 할 법한 고풍스러운 말을 고르고 있던 그 순간, 앞으로 나선 건 바로 달린이었다.
“엥? 별로 애쓰시지는? 않은 것 같던데요?”
“네… 네?”
격식이 없어도 너무나 없는 달린의 말투에 상대방은 당황한 듯했다. 달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파고들었다.
“헤헤, 아버지가 그냥 주시던데….”
“…하! 그런가요? 그 드레스가 얼마인지는 알고 계신가요? 가계 재정이 휘청이지는 않았을지 걱정이네요!”
상대 영애는 더욱 강한 말을 던졌지만, 달린도 만만치 않았다.
“가격 찔러보기는 사절이에요! 저는 가격만 답하는 기계가 아니랍니다! 예쁜 말♡ 부탁드려요!:)”
뭐, 뭐지? 말에 어떻게 하트랑 이모티콘을 넣을 수가 있는 거지? 게다가 저 멘트는 뭔가 익숙한데…. 아니, 이쯤 되면 달린 쟤도 빙의자 아니냐?
“아, 아니, 가격만 물었는데 기계 취급이라니요!”
“하지만 제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힘낼 수 있었어요!:) 늘 응원해주는 내 사람들, 고마워요!”
“뭐라고요?”
이제 달린은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달린을 이길 수 없었다.
“이익…. 역시, 막 데뷔탕트를 치른 어린 영애들이란. 하, 우리가 누군지는 아시는 걸까요?”
금발의 영애가 전형적인 멘트를 날렸지만.
“엥? 누군데요?”
“이이익!”
달린은 특유의 ‘엥’ 전법으로 상대를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고.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품위? 예절? 그런 게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무려 상대에게 먼저 선공을 날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쯤에서 깨달았다.
‘달린 얘, 지금 즐기고 있군.’
음, 그냥 즐기도록 내버려둬야겠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는데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때, 아까부터 왼편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던 백금발의 영애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그녀는 다른 영애들보다도 훨씬 우아하고 귀족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왠지 힘을 숨기고 있는 대단히 높은 가문 아가씨일 것 같았다.
“귀족이 맞으신 건가요?”
역시나, 스트라이크!
우리의 정곡을 정확히 찌르는 말이었기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앞으로 사교계에 잘 적응하실 수 있을지 우려가 되어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풋풋한 분들 같아서요.”
물론 긴장한 건 나뿐만인 것 같았다.
달린을 무시하지 말아라, 지금 그녀는 한창 물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래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달린은 자신이 말을 할 때면 빙빙 돌려 말하고, 남들이 말을 걸 때는 그대로 해석해서 상대의 속이 터지게 만드는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곧바로 백금발의 영애를 향해 달린 어택이 날아갔다.
“그리고 제가 쉽게 상처를 받아서… 말 좀 예♡쁘♡게 부탁드려요!:)”
아니, 그러니까 대체 말에 하트는 어떻게 붙이는 건데!
나뿐만 아니라 귀족 영애들까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고, 그 틈을 타 달린은 내 손목을 붙잡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자리를 떠나는 우리를 붙잡지 못했다.
“달린….”
내가 애틋한 목소리로 달린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너는 정말… 아니다,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린은 이곳에서 재능을 낭비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녀는 21세기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뛰어난 인플루언서가 됐을 거다. 정말 아까운 일이다. 아니, 하다못해 귀족 영애만 됐어도 사교계에 잘 적응했을 텐데.
우리는 연회장 옆 정원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고, 황성으로 통하는 입구를 찾는 데 성공했다.
“가블 님이 보내주신 설계도에 따르면 저 입구가 맞아.”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세 병의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아퀼라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여기의 경비가 적은 편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우리 힘으로 저 병사들을 따돌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기절시킬까?”
달린도 그래도 중대장까지 올라간 병사인 만큼 자기 힘으로 한 명 정도는 기절시킬 수 있을 거다. 그럼 내가 두 명을 기절시키면 되겠지.
다만 그들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가 신경 쓰였다. 달린과 내가 각각 한 명씩과 싸우는 동안 남은 한 명이 그 호루라기를 불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진지한 얼굴이 되어 고민하던 그 순간, 달린이 내 이름을 불렀다.
“사루비아 님.”
“응?”
돌아본 달린은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더니 말했다.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뭐어?”
“제가 시선 끌기는 또 잘하는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알고 있었다. 달린이 어그로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린을 혼자 위험에 빠뜨릴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내가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던 그때, 달린이 덧붙였다.
“저는 아까 공작성에 불을 지른 걸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남은 일은 사루비아 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아….”
“저에게 아까 그곳에 불을 지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린이 이토록 진지하게 말하는 건 정말로 처음이었다.
나는 뜨거운 눈빛을 받아내며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달린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녀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았으니까.
“…그럼, 믿을게.”
“예.”
서로 마지막으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달린은 곧장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몸을 웅크려 수풀 속으로 숨었다. 달린이 병사들과 언쟁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이곳으로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에잇, 좀 비켜요!”
“안 됩니다! 여긴 금지 구역입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이잇!”
달린이 아까 전 귀족 영애들을 흉내내며 진상 짓을 했고, 병사들은 어떻게든 달린을 내쫓으려 애쓰는 듯했다. 하지만 쉽지 않겠지. 왜냐하면 달린은 그들보다 힘이 강할 거거든.
“뭐야? 이 여자 왜 이렇게 힘이 강해?”
“자꾸 이러시면 구금되실 수 있습니다!”
“아, 들어가야 한다니까! 황제 폐하를 꼭 봬야 한다고요!”
“역시 황제 폐하의 눈에 들어보려 하는 멍청한 여자들 중 한 명이군!”
“뭐해? 끌어내!”
곧 달린이 내 앞에서 두 명의 병사들에 의해 질질 끌려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달린은 힘껏 퍼덕이며 어떻게든 그들의 힘을 빼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 명만 남았겠군.’
내 시야에서 달린과 병사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몸을 일으켜 입구를 향해 달렸다. 나를 발견한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흡!”
내가 얼른 품에서 마비 침을 꺼내 쐈기 때문에 그는 깔끔하게 기절했다. 음, 역시 마비 침이 최고야. 타로, 고마워요!
이제 방해물은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궁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