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폭력과 공포가 모두를 구원한다
마침내 붉은 태양이 뜨기 전의 새벽이 찾아왔다.
다만 원래대로라면 작전을 위해 바로 출발했을 우리는, 지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 앞에 나타난 한 인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달린?”
아니, 전쟁터에 있어야 할 얘가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 혹시 탈영했나?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살피자, 그녀가 손을 내저어 보이며 말했다.
“아아~, 저 탈영한 거 아닙니다! 저는 합법적인 사유로 여기 나와 있습니다!”
“합법적인 이유? 그게 뭔데?”
내가 그렇게 물으니, 달린이 생글생글 웃는 표정을 지었다.
“사루비아 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군대에서 흑마술 아티팩트를 터뜨려서 마물들을 국경 쪽으로 끌어모으는 미친 짓을 했으니, 당연히 영창에 가야 합니다.”
“맞아,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건데?”
“그건 대대장님이 저를 영창에 보내는 걸로 처리하고 몰래 탈출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스파이의 행동 아니겠습니까?!”
달린이 자신의 스파이 짓이 뿌듯한 듯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만, 그렇다면 네가 여기 온 건 설마….”
“예, 저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네가 함께하겠다고?”
달린의 말을 듣자마자 아퀼라가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그도 달린의 고문관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달린이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달린, 내가 장담하는데 넌 틀림없이 사고를 칠 거야.”
“아이, 이제 안 그럽니다~. 이제 저도 중대장 아닙니까!”
“으음….”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블 님이 저를 보내신 거 아닙니까?”
“잠깐만, 설마….”
가블이 말했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대체 달린이 어딜 봐서 도움이 된 거야!’
그냥 자신의 부대에 도움이 안 돼서 보내버린 거 아닌가? 전쟁에서 달린이 사고를 칠까 봐 우리 쪽으로 달린을 짬 처리한 거 아닐까?
나는 의심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달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흥분한 기색이 되어 외쳤다.
“저는 인민에 의해 굴러가는 국가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뭐?”
“『코뮌 운동이란 무엇인가』, 『천부적 인권 선언』, 『자치 도시 살펴보기』, 『인민의 주권에 대하여』 등 주요 서적은 전부 읽었습니다!”
그건 혁명 조직에서 퍼낸 주요 불온서적의 이름이었다….
그때 분명 달린이 그 조직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고 했는데,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성공한 모양이다.
나는 좀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달린을 쳐다보았다.
아니, 물론 나는 원작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엥?’을 말버릇으로 달고 살면서 다른 사람 먹이기를 즐기고, 군대에 말뚝을 박더니 이제 불온서적을 즐겨 읽는 원작 여주가 있다고? 참 대단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아냐, 달린도 어딘가에 쓸 데가 있을 거야.’
우리 부대에는 패티와 매티도 쓸 데가 있다는 속담이 있었다.
달린은 혁명에 진심인 듯 보였고, 잘 활용하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달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에이프릴을 대신하여 달린에게 이번 임무를 설명해 주었다.
물론 달린은 임무 내용을 전혀 외우지 못했다. 에라이, 대체 중대장은 어떻게 됐냐?
* * *
그 후, 우리는 미리 약속해두었던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낯이 익은 얼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테인 왕국에 가 있는 알타이르를 제외한 쿨민트아이스프로즌 78기, 인성 파탄 85기, 타로, 플라토, 루이즈, 브레이브, 레온, 엘, 캐롯 등등….
그들은 나로부터 달린을 소개받았고, 달린이 어떤 애인지 빠른 속도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반갑다, 나는 타로라고 한다. 너는 이름이 어떻게 되지?”
“예, 저는 달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타르 님!”
“…타로라고 했는데.”
“앗, 그렇습니까? 헤헤, 제가 기억력이 좀 안 좋아서!”
“참 긍정적이군.”
“어? 그런 소리도 자주 듣습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머리가 꽃밭이라는 소리도 자주 듣지는 않고?”
“와, 정말 그렇습니다! 정확해서 신기합니다!”
“이런 타입이군….”
역시 국경방위군에서 눈치를 기른 자들다웠다.
곧 거대한 마차 몇 대가 우리의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서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아저씨 한 분이 내렸다. 그분은 우리를 둘러보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단어 하나를 입에 담았다.
“패티도.”
“쓸 데가 있다.”
이 암호는 우리가 서로를 식별할 때 쓰기로 한 암호였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패티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는 제국에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투리치 상단의 상단주였다.
우리의 대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패티 그 자식… 군대에서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패티는 아주 후, 후, 훌륭한 병사였습니다.”
“그렇게 말을 더듬으며 말할 필요 없네. 보나 마나 짐을 정리하라고 하면 짐을 무너뜨리는 식이었겠지.”
자신의 아들에 대한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분이시구나…. 나는 잠시 십몇 년간 사고를 홀로 감당해야 했을 패티의 아버님께 애도를 표했다.
그 뒤 우리는 마차 여러 대에 조를 나눠 탔다. 위장을 위해 모두 평상복을 입은 채였다.
오늘 우리는 투리치 상단의 일원으로 위장해 황성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오늘은 상단이 황성에 물건을 납품하는 날이었으니까.
물론 실패한다면 이 상단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일을 성공시켜야 했다.
나는 가장 앞에 있는 마차에 올랐고, 아퀼라가 마치 로판에 나오는 남주처럼 내 손을 잡아 마차에 태웠다. 달린은 헤헤 웃는 얼굴로 나와 같은 마차에 탔다.
패티의 아버님은 내가 탄 마차의 마부석에 앉으셨고, 그대로 마차는 출발했다.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니, 내 옆에 바짝 앉아 있던 카론이 마냥 즐거운 얼굴로 답했다.
“예, 사루비아 님은 언제나 성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랑 함께 감옥에 갇혔던 네가 할 말은 아닌데….”
그런데 그 순간, 덜컹거리며 가던 마차가 멈췄다.
그러더니 마부석을 통해 패티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네.”
“예? 무슨 큰일입니까?”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한 듯해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아퀼라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황성을 통과할 때 거치는 검문이 더 까다로워진 모양이야.”
“대체 왜….”
“최근 민심이 흉흉해서 그런 모양이지. 전쟁이 시작되었기도 하고. 게다가 오늘은 황성에서 연회가 있는 날이니까.”
그렇다, 우리가 전쟁 첫날을 황성 침입 날짜로 정한 이유들 중 하나는 오늘 황성에서 연회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선포해 놓고 연회를 벌이다니 정말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건 아돌브 제국의 전통이라고 했다. 아돌브 제국은 전쟁 첫날 승전 기원 연회를 연다.
다만 그 연회의 분위기는 평소처럼 밝지는 않고, 주로 귀족들이 황제에게 전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충심을 드러내는 시간이라고 했다.
어쨌든 그 연회로 인해 검문이 꼼꼼해졌다면 우리에게는 낭패였다. 황성에 무사히 진입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까!
그때, 달린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저희가 지나고 있는 이곳이 혹시 베이드 공작령 맞습니까?”
“그래, 맞네.”
“그렇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베이드 공작령?
왠지 익숙한 이름에 나는 기억 속을 파고들었다가, 이곳이 달린이 하녀로 일했던 그 공작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달린은 이 공작령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렇다면 무언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시다시피 황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공작령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말인즉슨….”
아퀼라부터 윈터까지, 마차에 타고 있던 모두가 달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일 이 공작령에 큰일이 생긴다면 그곳으로 관심이 집중될 거고, 마차를 검문하는 경비 또한 느슨해질 거라는 뜻입니다!”
“그렇구나!”
드디어 달린이 맞는 말을 하다니!
‘역시, 그 속담이 맞았어!’
달린도 쓸 곳이 있었던 것이다. 달린이 황성으로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다!
마치 내가 달린을 키워낸 듯 기특한 기분을 맛보며 난 다시 한번 물었다.
“달린,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소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
“제 생각에는….”
* * *
잠시 후, 우리가 탄 마차는 다시 공작성을 향했다.
마차가 공작성을 지날 때쯤 마차에서 몇 명의 인원이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아직 새벽이었기에 우리를 보는 눈은 없었다.
나와 함께 마차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바로 이 공작성의 지리에 능한 달린과, 나와 손발이 맞는 아퀼라, 그리고 우리를 감독해줄 플라토였다.
“달린, 어디로 가면 돼?”
“저만 따라오십시오!”
우리는 달린의 뒤를 따라 공작성 안으로 침투했다.
새벽에도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있었지만, 달린은 다른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사용인들이 따로 쓰는 길입니다.”
달린의 뒤를 따라가니, 지하로 가는 통로가 나왔다. 나는 그 통로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혹시 평소에 우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우리를 여기 가두려는 속셈은 아니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달린은 능글맞게 넘어가며 우리를 지하 통로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곧 우리의 앞에 잡다한 물건들이 쌓인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이곳만큼 접근하기 쉬운 곳이 없어서, 여기 불을 지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우리의 계획은 방화였던 것이다!
‘내가 이젠 하다 하다 방화범이 되다니.’
조금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아퀼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가 종이가 쌓여 있는 곳을 향해 검을 쳐들었다.
화르르-
곧 그의 검을 둘러싸며 불길이 치솟았고, 아퀼라는 종이더미에 불을 붙였다. 종이가 매캐한 냄새를 내며 타기 시작했다.
“다들 물러나.”
아퀼라의 지시에 우리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품 안에서 기름 한 병을 꺼냈다.
황성으로 가는 상단의 마차에 실려 있던 물건들 중 하나였다.
아퀼라가 기름을 불에 뿌리면 불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질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 마차에 합류해 도망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신경이 쓰이던 구석이 있어서, 나는 달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달린은 종이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을 오묘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달린.”
“네?”
“네가 할래?”
“뭐를…?”
“네가 기름을 던지겠냐고.”
나는 달린이 공작성에서 지내는 동안 어떠한 수모를 겪었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 국경방위군에 왔을 때, 달린의 자존감은 완전히 박살나 있었던 상태였다.
작중에서 군대에 입대하기 전 달린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묘사되지 않았지만 아마 바로 그 시기, 입대 전 공작성에서 지내던 시기가 달린의 그 처참한 상처를 만든 원인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엷은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달린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이 체제를 바꾸겠다 다짐하게 만들었던 애였다.
‘이번 거사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달린, 그리고 차별받아온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달린은 공작령에 들어선 순간부터 미묘한 감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건 늘 가벼운 얼굴이던 달린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는데, 오랫동안 꾹꾹 눌러담은 원한 같기도 했고 처절한 저주 같기도 했다.
나는 아퀼라에게서 기름이 든 병을 받아서 곧장 달린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아.”
“달린, 네가 해.”
“제가, 제가 정말…. 제가 정말 이 공작성을….”
“그래, 네 손으로 파괴해.”
사실 창고에 불을 지르는 것 정도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금전적 손해나 좀 끼치겠지.
하지만 달린에게는 이 정도의 사소한 복수라도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윽고, 달린이 마음을 먹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과 팔을 힘껏 휘두름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떠나간 기름병이 포물선을 그렸고.
펑-!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빠져나왔다. 뒤편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져 왔다.
“흡!”
슬쩍 뒤돌아본 창고 안은 완전히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렸고 나는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숨을 참았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서 마차에 탑승하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웃을 수 있었다.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래, 달린, 네가 해냈어.”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 달린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나는 국경방위군 시절 달린이 밝게 웃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물론 그때마다 빠져 가지고는 어디서 웃냐고 핀잔을 주곤 했지만, 달린은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늘 환하게 웃었지.
그렇지만 지금 달린의 미소는 그때와도 달라서,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행복해서 나오는 웃음 같았다. 달린은 진심으로 홀가분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내가 동기들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했던 때와 닮아 보여, 나는 달린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달린.”
“네?”
“수고했다.”
달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웃었다.
…누군가는 달린이 저토록 웃기만 하는 게 답답하고 멍청해 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사실 그런 달린의 태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달린의 웃음은 그 어떤 상황도 꿋꿋하게 이겨 내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힘들 때 눈물을 흘리는 대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활짝 웃기로 다짐한 애였으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독자들에게 ‘고구마’ 소리를 들을 달린일지 몰라도, 나는 그녀의 삶이 충분히 그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달린을 따라 웃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