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거대한 도마뱀의 발자국 같기도 했고, 사슴의 발자국 같기도 했고, 곰 발자국 같기도 했다. 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동물이 아닌 몬스터가 확실했다.
게다가 발자국의 사이즈로 보아 크기가 꽤 큰 몬스터 같았다.
“다들 긴장하도록.”
우리는 발자취를 좇아 추적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몬스터 한 마리를 대면할 수 있었다.
크르르르-
온몸이 파란색으로 되어 있었고 청록색 점이 찍혀 있는 도마뱀. 얼음과도 같은 투명한 갈기와 푸른 혀.
희미해진 내 기억이 가까스로 마물 도마뱀에서 본 몬스터의 이름을 꺼냈다. 그러니까 저건….
“아이스 리자드.”
그 직관적인 이름답게, 저 몬스터는 추운 지역에서 서식하며 얼음을 다루는 도마뱀 같은 몬스터였다.
입에서는 불 대신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무시무시한 입김이 나왔고, 거대한 꼬리를 휘두르면 그 주위가 초토화가 된다고 들었다.
설산 대대 시절 루나에게 아이스 리자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상대하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가뜩이나 추운데 아이스 리자드 때문에 정말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내 약점을 정확히 공략하는 몬스터였단 말이다.
생리적인 공포가 먼저 밀려오는 느낌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손을 검을 잡았다. 그래도 내 옆에 윈터의 부모님이 있으니 좀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얼음 속성에 아주 강할 것 같았기에.
몬스터를 발견하자마자 아버님이 곧장 검에 얼음 속성의 오러를 둘렀다. 윈터의 얼음 속성은 그의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구나.
어머님은 바람 속성의 오러를 둘렀다. 베니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크르릉-
그리고 아이스 리자드와 우리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전투가 시작했다.
쾅-!
대련을 하면서도 느꼈지만, 아버님은 정말 무지막지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날리는 대신 오러를 실은 검을 그대로 아이스 리자드에게로 내리쳤다.
휘이익-!
어머님은 뒤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날리며 아버님을 서포트해 주셨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 온 합이 돋보이는 전투법이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곧장 아이스 리자드의 뒤쪽으로 접근했다.
“엄마야!”
중간에 한번 거대한 꼬리가 휘둘러지며 나를 덮치려 들었지만 땅을 박차고 힘껏 뛰어오르면서 가까스로 꼬리를 피할 수 있었다.
아이스 리자드가 입에서 얼음이 섞인 입김을 내뿜었지만, 아버님이 얼음 속성의 오러를 쓰시는 덕분에 그걸 막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오러를 휘두르며 팽팽하게 아이스 리자드와 대치했다.
“이얏!”
그 틈을 타 나도 뒤에서 검으로 아이스 리자드의 꼬리를 내리찍었다. 우선 전투에 방해가 되는 이것을 없애는 게 급선무였다.
크르르르-
그러자 고통스러웠는지 아이스 리자드가 격하게 반응하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이를 악물고 겨우 그것의 앞발을 피하실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그것의 꼬리를 밟고 몸통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쾅-!
내가 아래로 내리찍은 검과 아이스 리자드의 단단한 껍질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아이스 리자드의 껍질은 단단했다. 손이 찌르르 아파 와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위에서 공격하자 아이스 리자드가 어떻게든 나를 떨어뜨리려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고개를 돌려서 날 공격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윈터의 부모님이 앞에서 오러를 날리고 있는 탓에 그것은 역부족이었다.
“사루비아 양! 계속 내리찍도록!”
“네!”
그들이 아이스 리자드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맡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몬스터의 몸을 내리찍었다.
바로 그 순간,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몬스터가 거세게 요동쳤다.
몬스터는 구석에 있던 릴리를 공격하려는 듯 릴리에게로 빠른 속도로 기어갔다.
“꺄악!”
릴리가 비명을 지르며 프라이팬을 들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곧장 몬스터에게 오러 블레이드를 날렸으나 간발의 차로 빗겨나갔다.
일촉즉발의 그 순간, 나는 몬스터의 몸통에서 뛰어내려 릴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몬스터의 입김이 우리에게로 직격했지만….
‘이제 괜찮아.’
릴리를 반드시 지켜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동안 그녀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전이었다면 아이스 리자드가 불러올 추위를 두려워하며 공황에 빠져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정말로 추위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 차가운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추위가 불러오는 악몽을 덮을 만한 좋은 추억들을 많이 쌓았다.
나는 차가운 눈을 뭉쳐서 릴리와 눈싸움을 했고, 나만큼이나 큰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눈 덮인 마을은 절대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빙글빙글 돌고 즐거워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윈터의 부모님과 릴리는 늘 나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추위 속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었다.
이제 추위가 닥쳐올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초조함과 긴장감이 아니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하며 몸을 피하는 대신, 릴리의 앞을 가로막고 검에 오러를 둘렀다.
쾅-!
아이스 리자드의 입김과 내 오러가 충돌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틈에 윈터의 어머님은 아이스 리자드의 목을 찌르는 데 성공했다.
흥건한 푸른 피가 바닥으로 흐르고 나서야, 나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헉….”
오랜만에 몬스터와 하는 전투라, 그동안 이 감각이 어떤지 잊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뒤 느껴지는 이 짜릿한 쾌감, 그리고 아드레날린.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뒤 느껴지는 쾌감이 엄청나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해냈다.’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실실 미소 지었다.
‘내가 언젠가는 해낼 거라고 했지.’
나는 추위를 극복했다. 스스로 해내기로 마음먹은 일을 정말로 해낸 것이다.
몬스터와도 성공적으로 싸웠고, 릴리도 지켜냈고, 트라우마도 이겨 냈다.
실패의 끝에 떠밀려온 이 북부에서, 놀랍게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을 얻었다.
“사루비아 양.”
“예.”
아버님이 고개를 돌려 내 이름을 부르셨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검도 아주 잘 쓰는군.”
그에게서 칭찬을 들은 게 좋아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윈터나 그의 부모님처럼 딱딱한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크르르-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 나는 몸을 움찔했다.
분명 목이 찔려 완전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스 리자드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뒤처리를 해야겠다.’
트라우마를 이겨 낸 기쁨에 취한 내가 뒤처리를 위해 아이스 리자드에게 다가갈 때….
깡-!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아이스 리자드는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릴리가 아이스 리자드의 앞에서 프라이팬을 휘두른 것이다. 나는 멍청한 얼굴이 되어 눈을 깜빡였다.
“릴리…?”
“헤헷, 프라이팬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답니다!”
…뭐지? 저게 바로 힘숨찐?
어쩌면 내가 아까 안 도와줬어도 그녀가 알아서 아이스 리자드를 죽이지 않았을까?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릴리의 모습을 보자니 다시 웃음이 나와서, 나는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오랜만에 보람 있는 하루였다.
* * *
수도로 돌아가기 3일 전, 마차 한 대가 윈터네 성 앞에 급하게 멈춰 섰다.
“누구지?”
성에 손님이 찾아왔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윈터의 부모님은 그 마차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왔나 보군.”
“그래요, 왔군요.”
마부석에서 내린 건 바로….
“윈터 님!”
윈터의 얼굴을 본 내가 놀라움과 반가움에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윈터 님, 다들 괜찮습니까? 잡힌 사람은 없습니까?!”
그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것은 역시 동료들의 안부를 묻는 말이었다. 윈터는 그런 나를 달랠 수 있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래, 다행히도 한 명도 체포되지 않았다. 황실군을 피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있지만 서서히 회복되고 있고. 지금은 각자의 집에 숨어 있는데, 연결망이 튼튼히 이어져 있어서 모두와 연락이 가능하다.”
“아….”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윈터의 말이니 그 누구보다 정확하겠지.
그제야 그가 타고 온 마차가 내 눈에 들어왔다. 윈터는 직접 마차를 몰고 온 듯했다. 말까지 몰 줄 안다니, ‘역시윈터’.
한편 윈터 또한 내게 궁금한 것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제 부모님께는 가볍게 묵례만 하고서 곧장 내게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사루비아, 괜찮나?”
“예, 전 괜찮습니다. 윈터 님의 부모님께서 감사하게도 정말 잘 대해 주신 덕분에….”
“지옥의 검술 훈련을 하진 않았고?”
“…….”
나는 침묵했고, 윈터는 알 만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어쩐지 마차를 급하게 몰고 왔다 했더니, 나를 걱정했나 보다. 좀 다른 의미로. 그도 자신의 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 잘 알고 있군.
“그렇게 심한 훈련은 아니었는데.”
“너도 어릴 때 다 겪은 거였다.”
두 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좀 억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했던 검술 훈련이 얼마나 지옥의 훈련이었는데! 손에 물집이 마르지 않고 굳은살이 지독하게 배길 정도였다!
“사루비아, 그럼 이만 떠나도록 하지.”
“앗….”
물론 떠날 때가 되기는 했지만, 다소 갑작스럽게 출발하게 된 느낌이어서 난 슬쩍 윈터의 부모님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분들은 나보고 어서 가 보라며 손짓했다.
“이만 가 보도록. 갈 때가 됐지.”
“다음에 또 와도 된단다.”
그 말을 들은 윈터는 나를 바라보며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분이 네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군….”
“하하… 감사하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성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사루비아 님!”
어김없이 손에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릴리였다.
혹시나 저 프라이팬으로 내 머리를 후려치려는 게 아닌가 싶어 잠깐 몸을 움찔했지만 릴리는 눈물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외쳤다.
“흑흑, 가지 마세요!”
“릴리….”
“사루비아 님이 가신다면 저는 다시 이 얼음성에서… 흑흑!”
“릴리이!”
그동안 이 얼음성에서 릴리가 홀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릴리의 고초가 깊이 이해되어서 나는 눈 밑을 스윽 훔쳤다.
“사루비아 님 덕분에 이 성에도 봄이 왔는데… 안 돼요!”
그녀가 치맛자락을 휘감아 잡고 빠르게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래요! 사루비아 님이 성에 남으시려면 차라리…!”
“차라리?”
…설마 여기서 나보고 윈터랑 결혼하라는 등 눈치 없이 커플로 엮는 로판 조연처럼 행동하지는 않겠지?
“윈터 님 대신 사루비아 님이 이 집에 들어오세요~!”
…그냥 윈터를 버리려던 거군.
윈터는 릴리의 외침에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윈터의 부모님은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군.”
“우리 아들보다는 사루비아 양이 훨씬 귀염성이 있지.”
“…….”
말은 저렇게 해도 저분들은 윈터를 사랑하신다…….
아마도.
“…내 가족을 너에게 뺏긴 것 같군.”
“그, 어쩌다 보니….”
왠지 윈터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어, 나는 눈을 굴리며 뒷걸음질 쳐서 마차로 향했다. 빨리 마차를 타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