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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33화 (206/233)

자, 잠깐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급진적인 것 같은데?

물론 평소에 내가 붉은 혁명을 보여 주고 싶다고 농담을 하긴 했지만, 그걸 정말 입 밖으로 내다니!

내가 패닉에 빠져 있었을 때, 가블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치 국가를 운영하는 거다.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이지.”

“그, 그게 가능합니까?”

“중세에도 시민이 주체가 되는 도시 국가들은 존재했다. 그리고 불가능하면 이제부터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그게 우리의 룰 아니겠는가?”

‘안 되면 되게 하라’, 음,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그럼…?”

“해당 사상에 관한 서적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있었지.”

…어쩐지 활동이 없더라니! 조금 다른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뒷목을 잡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그냥 뒷목을 잡았다.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이 맑게 개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고민해 오던 문제가 싹 해결된 것이었다.

그래, 사실 어쩔 수 없이 타협하기는 했지만 귀족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화정은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도 적폐 아니겠는가?

하지만 시민을 중심으로 하는 자치 국가! 그건 충분히 혁명적이다! 내가 바라는 진짜 혁명!

어쩌면 이번 혁명이 실패한 건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 덕에 나는 진짜 내가 추구해야 하는 바를 깨달았으니까.

“…가블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루비아 양도 우리의 사상에 동의하는 건가? 역시 머리 색이 붉더니만.”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어쨌든 가능하다면 다음에도 저에게 책을 한 권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그리고 이제 암호를 가르쳐 줄 텐데….”

그 이후, 나는 그로부터 편지에 암호를 쓰는 법을 배웠다. 그리하여 나는 그와 안전하게 통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앞으로 무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 사루비아 양도 무탈하기를.”

* * *

에고트 마을을 향해 떠날 준비를 마친 아퀼라가 막 거처를 나서려 할 때,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윈터였다.

“아퀼라, 잠깐. 널 대신하여 내가 가도록 하지.”

“혹시 저를 못 믿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제가 가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아퀼라는 윈터의 제안을 싸늘하게 내쳤다.

지금 흑마술 수색 특수군은 수도에서 다시 모이기로 논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핵심 전투력 중 두 명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사루비아를 데리러 가기 위함이라 해도 한 명만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사실 아퀼라는 내심 윈터가 다시 사루비아에게 다가갈까 봐 걱정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윈터의 태도 또한 단호했다.

“아니, 사루비아가 걱정되어서 그렇다.”

“걱정되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게 아니야. 짐작 가는 바가 있다.”

“뭐가 짐작 가신다는 겁니까?”

“에고트 마을이라면 우리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지. 우리 부모님은 사루비아의 얼굴을 기억하고 계실 테고. 혹시 사루비아가 운이 좋았다면, 우리 부모님을 만나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윈터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루비아는 지금쯤 상당히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이시라면 보나 마나 사루비아에게….”

* * *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식사하다 말고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북부에서 추가로 2주를 보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그 시간을 아주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아, 실내는 따뜻하고 참 좋다….”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도 다 했고, 이제 남은 건 무사히 돌아가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마음을 놓고 편히 쉬어도 될 것이다.

그렇게 이대로 편안한 날들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에게 검을 가르쳐 주시겠다고요?”

“그래. 사루비아 양은 국경방위군에서 지낸 만큼 이미 검술을 충분히 잘 하겠지만, 그래도 앞으로를 위해 검술을 좀 더 연마하는 편이 좋겠지.”

“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내 검술 실력에 대해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나는 검을 잘 쓰는 편이었다. 평범한 제국민 여성이었다면 무거워할 검도 쉽게 휘두를 수 있었고, 한때는 찌르기와 베기 같은 자세도 하루에 수백 번씩 연습했기에 검술의 기본자세도 뼈에 새겨져 있었으니.

하지만 내가 총을 쓰기 시작한 후로 검을 손에서 놓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중간에 가끔씩 검을 쥘 일은 있었지만 그래도 아르콘 중에서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는 원래는 총을 주력으로 쓰고 있었는데요. 그래도 검을 배워야 하나요?”

“그렇다면 더더욱 검을 배우는 게 좋겠군. 원거리 전투나 잠입의 상황에서는 검을 다뤄야 하니까 말이다.”

“잠입….”

내가 혁명에 투신한다면 분명 언젠가는 잠입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아버님의 말에 구슬프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성의 뒤뜰에 서서 검을 잡고 있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꼼꼼한 눈으로 내 서 있는 모습을 살피셨다.

“기본자세는 잘 되어 있군.”

“실전 연습만 좀 더 시키면 되겠군.”

잠깐만, 어째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역시 윈터 님의 부모님다웠다. 그들은 대대로 교수 DNA를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어째 저렇게 똑같을 수가.

하여튼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찌르기와 막기, 베기를 비롯한 몇몇 자세들을 선보였다.

“나쁘지 않군. 그럼….”

아버님이 검을 들고 내 맞은편으로 와서 서셨다.

“이제 나와 대련을 해 보도록 하지.”

…진심으로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내 주특기는 총이고, 아버님은 로판 남주인공의 아버님답게 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대단한 분이시란 말이다! 내가 어떻게 저분과 맞설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오랜 시간 군대에서 지낸 탓에 까라면 까라는 정신이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나는 결국 검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대련할 자세를 갖추었다.

마침내, 아버님과 나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챙-! 챙-!

몇 번이나 검이 맞부딪치며 살벌한 소리를 냈다. 나는 그때마다 아버님의 힘에 깜짝 놀라며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곧 아버님은 빈틈을 찾아내 내 목에 검을 갖다 대는 데 성공하셨고, 그대로 대련은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패배했습니다….”

“흠.”

울적해진 내 얼굴을 보고 아버님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셨다.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정말이십니까?”

그의 실력에 비하면 내 실력은 한참 부족했기에 내가 놀란 눈을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검술을 평가하였다.

“사루비아 양은 확실히 인간과의 대련엔 능숙하지 않고, 다양한 공격법에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있다. 그 때문에 방어가 약하지. 하지만….”

하지만? 과연 내가 어떤 장점이 있다는 건가?

“잔머리가 아주 뛰어난 것 같군. 비겁한 타이밍에 공격을 잘해.”

…저거 칭찬인가?

“물론 사루비아 양이 기사라면 허용되지 않을 공격이지만, 실전에서는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지. 좋은 방법이다.”

나는 기뻐해야 하는 일이 맞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어쨌든 잔머리를 잘 쓰면 좋은 거지, 음….

확실히 내가 비겁한 방법으로 공격을 시도하긴 했다. 공격이 실패한 뒤에 바로 검 손잡이로 내리찍으려 한다거나, 상대방이 숨을 고르는 타이밍에 공격한다든가.

그나저나 아버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마물과의 싸움에만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건 주로 1대 1 싸움보다는 전략에 따라 단체로 덤비는 싸움이었지.

그러니 앞으로는 1대 1 대련을 연습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잠입을 위해 검술 훈련도 좀 해두고.

“예, 앞으로 더 정진하겠습니다. 오늘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 말게, 사루비아 양. 앞으로 내가 많이 도와줄 테니.”

“예?”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돌아가기 전까지 검술 훈련을 충분히 하다 가도록 하지.”

“…….”

그렇게 윈터 가문에서의 훈련 2탄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아이고, 뻐근하다….”

그날도 나는 훈련을 마치고 내 방의 침대에서 마구 뒹굴고 있었다. 이 손님방은 이제 내 방처럼 여겨질 정도로 편안한 경지에 올랐다.

윈터의 아버님은 정말 혹독하게 나를 훈련시키셨다. 윈터의 교육 방식과 꼭 닮아 있었다. 덕분에 나는 검술 실력을 단기간 안에 훌쩍 올릴 수 있었다.

나를 흡사 자신들의 딸처럼 여기는 듯했는데 대체 왜 검술을 이렇게 혹독하게 훈련시키시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그 질문에 대해 아버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원래 우리 집안은 검술에 능해야 하는 법이다.”

나를 정말 딸 취급하고 계시는군…. 음, 나에 대해 호의적인 건 좋은 일이지만….

하여튼 내가 그동안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을 때, 집 안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울렸다.

딸랑딸랑-

분명한 종소리였다.

“뭐지?”

나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윈터가 우리 집에 설치해 준 종은 그의 집안에서 쓰는 경비 방법이었다.

정해진 입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침입해서 투명하게 설치해 놓은 실을 건드리게 되면, 그 실과 이어져 있는 윈터의 집과 우리 집에 달린 종에서 소리가 나는 방식이었다.

그 방식은 이 성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낯선 사람이 침입하게 되면 성 안에서 종이 울린다.

“누가 침입했다는 건가?”

나는 얼른 방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검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누가 침입한 거지? 재산을 노린 건가?’

사실 이 성에 금은보화나 값비싼 물건들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의 외관만 보면 착각하고 침입하기 좋았다.

하지만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기껏해야 마을 주민들이 전부였으므로 침입자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예전에 윈터의 어머님이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는 가끔씩 몬스터가 나오기도 한단다.”

“아, 산에서 몬스터가 내려오는 건가요?”

“그래, 특히 날개 달린 몬스터가 자주 넘어오지.”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요?”

“이 마을 사람들은 몬스터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주로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도 몬스터를 잡는 일에 자주 참여하고는 하지.”

어쩌면 지금 이 성에 침입한 건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일단 침입자든 몬스터든 잡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벌떡 일어나 검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지낸 밥값은 해야지.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윈터의 아버님과 어머님도 검을 들고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나와 마찬가지로 종소리를 들으신 듯했다. 심지어 릴리까지 프라이팬을 들고 있었다.

“다들 종소리를 들으신 건가요?”

“그래, 아마 몬스터의 침입일 거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몬스터였다.

“그런데 그 프라이팬으로도 전투가 가능한 건가요…?”

내가 릴리의 프라이팬을 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호호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제가 주방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데요~. 프라이팬과 식칼만 있다면 무엇이든 요리할 수 있답니다!”

…어쩐지 무시무시한 답변이었다. 사실 숨겨진 고수일지도 모르지. 이곳은 로판 세계관이니까.

하여튼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정원으로 나갔다.

윈터의 아버님이 앞장서시고, 어머님이 뒤를 지키시고, 나는 릴리와 가운데에서 걸었다. 내가 약한 사람 취급받다니, 이건 또 새로운 기분이다.

그때, 아버님이 무언가를 발견하신 듯 걸음을 멈추셨다.

“이건….”

눈 덮인 바닥에 발자국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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