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나는 주변의 눈치를 슬쩍 보며 달린에게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사실 문제가 좀 생겼어.”
“문제? 그게 뭡니까?”
“반역을 들켰거든.”
“풉, 콜록! 저, 저한테 앞으로 알은척하지 말아 주셨으면….”
“국가에 우리 명단이 넘어간 건 아니거든?!”
“아, 저는 또 사루비아 님이 쫓기고 있는 줄 알았지 말입니다, 하하.”
달린이 얄밉게 웃어 보였고, 나는 그녀를 째릿 노려봤다.
“어쨌든 네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어. 달린, 혹시 너희 대대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니?”
“어…. 고… 고블린 님? 이었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설마 가블 님을 말하는 거니?”
“아! 그런 것 같습니다!”
젠장, 달린 얘가 사람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까먹었군. 정말 여전하구나.
“여전히 그렇게 기억을 못 하면서 넌 대체 어떻게 중대장이 된 거니?”
달린에게 타박을 하긴 했지만, 내가 아는 그 대대장이 아직 그대로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제 나는 더욱 분위기를 잡고 달린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달린…. 혹시 너 그곳에 있으면서 뭔가 수상한 거 못 느꼈어?”
“수상한 거라면….”
“그쪽 간부들이 너한테 뭐 따로 얘기한 거 없어?”
그래, 생각해 보니 달린도 이제 설산 대대의 간부였다. 그럼 혹시 익명의 혁명 단체 같은 것에 달린도 가입되어 있는 거 아닐까?
달린은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언뜻 들은 얘기인데….”
“오, 뭔데?”
“사루비아 님, 혹시 설산 대대의 전설을 아십니까?”
“…….”
“설산 대대에는 유령이 사는데, 그 유령은 사람의 영혼을 빨아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반복되면 타깃이 된 사람은 완전히 목숨을 잃는다고 하는데….”
내가 만들어 낸 그 가짜 전설이 왜 이렇게 퍼진 거지? 대체 어떤 놈이야?
“에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린에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냥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군.
“달린, 내가 누군가에게 전해 줬으면 하는 편지가 있는데….”
원래 편지를 남에게 맡기지 않으려 했지만, 그 사람이 달린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중대장이니까 예전보다는 실수를 덜 저지르겠지, 아마도.
달린에게 대신해서 편지를 전해 줄 것을 부탁하려 그것을 꺼냈다가, 문득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언제 받을 수 있을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답장이 오겠지? 아니, 애초에 대대장은 내게 편지를 보낼 수 있지만 내 답장은 대대장에게 닿지 못할 텐데.
“…그 전에, 또 대민 지원이 언제 있는지 알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묻자, 달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외쳤다.
“잘 모르겠습니다, 헤헤!”
“네가 모르면 어쩌자는 거야!”
결국 나는 달린으로 인해 이제는 몇 번째일지 모를 뒷목을 잡고 말았다. 나를 대할 때 이시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정말 미안하군.
“아!”
그때 무언가 떠올랐는지, 달린이 손바닥으로 주먹을 탁 쳤다.
“아마 이 마을 말고도 옆 마을을 제설해야 할 거라, 내일도 내려오긴 할 겁니다! 사루비아 님이 내일 옆 마을로 오신다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좋아, 내일도 비슷한 시간에 거기로 갈게.”
옆 마을은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달린에게 편지를 전해 주며, 비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달린, 너에게 부탁이 있다.”
“무슨 부탁이십니까?”
“먼저, 이 편지를 대대장님께 전해 드려라.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한다.”
그 말에, 갑자기 달린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럼… 저한테 임무를 내리신 겁니까?”
“그래, 임무.”
왠지 달린이 ‘임무’라는 단어에 꽂힌 것 같아 더욱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여 줬더니, 달린은 이제 완전히 신이 난 것 같았다.
“야호! 언젠가 꼭 이런 걸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조직의 정보를 빼내는!”
정보를 빼내야 할 건 이쪽이 아닌데,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 이쪽에서 정보를 빼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나는 아직 설산 대대에 있을 혁명 조직이 어떤 규모인지,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들은 어떤 방법을 쓰려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과 협력하고자 한다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잘 알아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달린.”
“예!”
“혹시 진짜 스파이가 되지 않을래?”
“꺄아!”
그 말에 이제 달린은 환호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스파이라니, 제가 공작성에서 하녀로 일할 때부터 꼭 해 보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공작을 노리는 암살자가 저를 매수하고 정보를 캐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으응, 그렇구나….”
나는 문득 이곳에 패티와 매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린에 이어 그들까지 추가된다면 정말 정신 사나웠을 것이다.
이제 슬슬 달린을 부대로 보내 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 나는 마지막으로 달린에게 당부했다.
“달린, 네가 해야 할 일은….”
* * *
‘누구지.’
설산 대대의 대대장, 가블은 긴장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사고뭉치 신임 중대장 달린이 전달하고 간 것이었다. 그녀는 이 편지를 마을에서 누군가에게 부탁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대체 이런 식으로 편지를 전달할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이야 당연히 그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은가.
왠지 긴장되는 마음에, 대대장은 편지 봉투를 부욱 뜯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난 건 상상치도 못한 사람이 보낸 편지지였다.
『저의 옛 대대장님께
안녕하십니까, 대대장님. 저 사루비아입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붉은 색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병사 말입니다.
저는 제대한 후 제가 늘 목표로 했던 일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자면, 제 머리색과 비슷한 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대대장님의 조언을 구하고자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대대장님과 만나서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답장은 이 편지를 전해 준 사람을 통해 부탁드립니다.
사루비아 올림』
‘사루비아!’
제대한 지 꽤 시간이 지난 병사였지만 그는 아직도 선명하게 그 녀석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본 병사 중에 제일 당돌한 사람이었다. 중대장을 놀려먹고 이 부대에서 내쫓을 정도로.
‘그 머리색과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음.’
게다가 전 부대의 대대장이 쓴 코멘트도 인상적이었고 말이다.
지금 사루비아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명백했다.
그녀는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한 ‘일’이라는 건 그런 것이고, 사루비아는 혁명에 대한 자신의 조언을 얻으려고 한다. 즉, 자신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사루비아는 자신을 은근슬쩍 떠보고 있는 것이다.
‘겁이 없군.’
목적어를 정확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은근슬쩍 떠보는 솜씨도 기막혔다.
그는 눈을 감고 사루비아의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병사라면 괜찮을지도….’
그러나 사루비아에 대한 결정은 자신 혼자서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선 오랜 시간 뜻을 함께해 온 동료들과 힘을 모아야 했다.
‘편지를 써야겠군.’
그는 지금은 군부대 곳곳으로 흩어져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창밖에서 번뜩이는 눈으로 그걸 보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타스, 가브리엘, 크림슨….’
달린은 편지 봉투에 얼핏 비치는 이름을 얼른 자신의 수첩으로 적어 두었다. 스파이 짓을 하니 왠지 자신도 유능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지만 달린은 그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물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기에 히죽히죽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면 사루비아 님의 총애를 얻을 수 있다!’
사실 달린은 조직의 권력자를 파악하는 데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클레도어 산악 대대에 입대했을 때도 누가 그 부대의 실세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고 꼬리를 말았던 것이다.
거기에 사루비아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까지 더해져 사루비아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 건데….
‘사루비아 님은 제대한 뒤에도 그대로셨지.’
그렇다면 자신이 사회로 나갈 때의 미래를 위해, 앞으로도 사루비아와 잘 지내는 게 맞을 것이다!
사루비아의 총애를 얻어낼 생각을 하며 달린은 실실 웃음을 지었다.
* * *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예, 각자 어떤 군부대로 발송했는지도 제가 적어 왔습니다!”
“아주 잘했어!”
달린이 수첩에 적어 온 내용을 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달린 이 자식, 그래도 중대장이 되더니 병사였던 시절보다 영특해지기는 했나 보다.
달린과 만난 지 하루가 지나고, 나는 달린과 전날 약속했던 대로 옆 마을에서 달린을 만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가엾은 병사들은 여전히 제설을 열심히 하고 있었고 말이다.
‘군대 전체에 퍼져 있는 조직이구나.’
내가 생각한 혁명 조직은 정확히 따지자면 설산 대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제국군 곳곳에 퍼져 있는 모양이다.
하긴 군대에 말뚝 박기로 한 아르콘의 수가 꽤 될 것이고, 그들은 국가의 녹봉을 받아먹는 군인이긴 하지만 여전히 국가에 불만을 품고 있을 테니까. 그들로 이루어진 혁명 조직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빼면 말이다.
‘좀 오래 걸리겠는데.’
자신의 동료들과 의논해야 해서인지, 대대장은 오늘 나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음에는 달린이 언제 대민 지원을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럼 나는 그때까지 이 마을에서 기다려야 하는 건가?
“하아….”
나를 찾고 있을 다른 부대원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일이 내 생각보다 길어지면 그들에게 편지라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다음 마차를 타고 가는 대신, 그 마차를 통해 편지를 전달하는 거다. 그러면 나를 걱정하지 않겠지.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2황자군과의 협력이 결렬된 대신, 어떻게든 해서 새로운 협력 조직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달린.”
내가 다시 비장한 목소리로 달린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어떤 일을 시킬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 말씀하십시오!”
“아무래도 진짜 스파이가 되어야겠다.”
“그 말씀은….”
“너, 조직 하나에 들어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