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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30화 (203/233)

나는 물론 언젠가 그들에게 연락해 힘을 모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북부가 워낙 먼 곳이다 보니 미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편지가 오는 데도 한참 걸렸고.

그런데 마침 내가 북부에 오게 되었으니, 이건 운명 아니겠는가? 이 기회에 그들과 접선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2황자군과 접선하다가 걸려서 이곳까지 오게 된 주제에 또 접선할 생각을 한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산 대대는 내가 직접 경험해 봤던 곳이고, 그들은 나와 같은 아르콘이니 좀 더 믿을 만하겠지. 게다가 혁명 조직으로 추정하는 그 단체는 카론의 아버지 대부터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 같고 말이다.

이제 나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어떤 방법으로 연락할 수 있지?’

무턱대고 설산 대대의 본부에 침입했다가는 수상한 사람으로 걸려서 피격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은신하는 데 능했지만, 내가 떠난 사이 또 건물의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외부에서 설산 대대로 편지를 보내는 건 불가능했다. 이 망할 놈의 국경방위군은 위문편지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지휘사관들끼리 부대 간에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예외적으로 간부의 가족들은 편지를 보낼 수 있었는데, 나는 간부의 가족으로 미리 등록된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방법은 기적적인 확률로 그들에게 대민 지원 임무가 내려져서 마을에 내려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내가 있을 당시를 돌이켜보면, 설산 대대는 워낙 험한 곳에 있는지라 대민 지원 자체를 잘 나가지 않는 조직이었다.

다만 유일하게 대민 지원을 나갈 때가 있긴 했는데, 그건 바로….

‘제설!’

으윽, 제설을 떠올리니 다시 속이 안 좋아지는군.

하여튼 그 XX 망할 놈의 눈이 잔뜩 내려서 마을이 눈에 덮이면, 우리는 제설을 위해 삽을 들고 산을 내려오고는 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 잊고 있었지만.

‘그럼 언제 눈이 오지?’

나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슬쩍 내다보았다. 날이 추운 만큼 길이 꽁꽁 얼어 있기는 했지만 눈이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똑똑똑-

“사루비아 님, 점심 드세요!”

릴리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두드리기에, 나는 현지인에게 물어보자는 생각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오늘 점심은 사루비아 님이 말씀하신 대로 토마토 수프를 준비했어요!”

“정말요? 고마워요! 아, 릴리, 혹시 이곳에는 눈이 언제 내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눈이요?”

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갑자기 어쩐지 뿌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에, 눈이 내리시는 게 보고 싶으신가 보군요! 귀엽기도 하시지, 호호호….”

“그래, 그런 걸로 쳐요….”

릴리가 나를 ‘차가운 북부에 봄을 불러다 준 꽃 같은 아가씨’ 정도로 취급하는 건 익숙했기에, 나는 더 말을 얹지 않고 릴리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윈터의 부모님께 물어볼 생각이었다.

“왔구나.”

어머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씀하시더니 스푼을 드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물었다.

“혹시 이곳에는 눈이 언제쯤 올까요?”

“눈?”

어머님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시고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여셨다.

“눈이 내리는 게 보고 싶은 거니?”

“이곳은 눈이 내렸을 때 아주 아름답지.”

아버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며 거들었기에, 내가 얼른 해명했다.

“아, 아니, 그냥…. 제가 설산 대대에 있었을 때는 눈이 많이 내리면 이곳으로 대민 지원을 오고는 했거든요. 그곳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서요.”

“대민 지원이라….”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윈터의 아버님이 허공을 쳐다보셨다.

“그러고 보니 네가 오기 몇 주 전에도 대민 지원을 나왔었지. 요즘 날씨가 추워서 눈이 올 법도 한데.”

“느낌이 오는구나.”

갑자기 어머님이 서늘하면서도 비장한 어조로 말을 뱉으셨다.

“곧 눈이 올 거야.”

“네?”

“느껴진다. 하늘의 변화가.”

…역시 윈터의 부모님이구나.

윈터가 기척을 읽을 수 있었던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윈터의 부모님은 날씨도 읽으시는데, 뭐….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이다!”

어머님의 말씀이 맞았는지, 정말로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밤새 눈이 왔는지 마을은 눈에 뒤덮여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으,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린다….”

밀려오는 PTSD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눈을 다 치울 생각을 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 아니, 이제 내 일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눈이 예뻐 보여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난 후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감사하게도 윈터의 어머님이 드레스를 빌려주셔서 옷도 갈아입었다. 디자인도 두터운 하얀색 공단 드레스에 털 달린 망토로 눈 내리는 날을 본격적으로 즐기는 데 적합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있던 옷을 빌려주신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새로 구매하신 것 같았지만 굳이 알은체하지는 않았다. 역시 북부대공 일가다운 사람들이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니 밖에서 기다리던 릴리가 볼을 붉히며 잔뜩 들뜬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어머, 눈이 내리셔서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네, 정말 좋아요!”

“호호호…. 야호, 이 얼음성에도 봄이 찾아오다니~.”

릴리가 랄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어린이 만화 영화의 조연처럼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의 노랫소리처럼 나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들뜬 상태로 아침 식사를 하고, 들뜬 상태로 오후가 되기를 기다렸다. 보통 대민 지원은 오후에 내려오니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됐다고 느꼈을 때,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기 위해 출발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활기차게 인사하며 성을 나섰다.

“세상에, 저렇게 밝게 인사하실 수가!”

“인사성 없는 아들놈보다는 낫군.”

“윈터는 조금도 귀염성이 없는 아이였지.”

내 뒤로 그런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난 그것도 무시했다.

…윈터 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부모님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렇지만 설산 대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뭐지? 이 정도면 내려올 때가 됐는데? 설마 정책이 바뀌었나?’

군 복무 기간도 단축되더니, 정말로 황제가 국경방위군에 관용을 베풀기로 마음이라도 먹어서 이제 대민 지원을 안 하는 건가?

내가 초조한 마음으로 마을을 돌고 있던 그때, 어딘가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설 속도가 이렇게 느리다니….”

‘저기군!’

그 목소리와 함께 여러 명이서 삽질을 하는 듯한 인기척까지 느껴졌기에 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저쪽에서 삽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리 써 놓은 편지가 주머니에 잘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만일 저곳에 대대장이 있다면 직접 편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대대장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스스로 위험을 불러올 수는 없으니 이 편지를 남에게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들린 곳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어쩐지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들을 갈구던 목소리 말이다.

‘아는 사람 같은데? 누구지?’

하지만 새로운 중대장이 내가 아는 사람일 리가 있나?

그때, 다시 중대장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엥? 제설을 이렇게 못 해? 중대장은 너희에게 실망? 아무튼 뭐 그런 걸? 한 것 같다.”

잠깐만, 저 말투는!

저런 유니크한 말투를 가진 사람은 이 세계에 한 명밖에 없었다!

“달리이이이이인!”

거의 ‘달링’이라고 들릴 정도로 내가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허리에 손을 얹고 얄미운 포즈로 서 있던 달린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 사루비아 니이이이임!”

그야말로 극적인 상봉이었다.

* * *

“달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달린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잠시 병사 무리에서 떨어졌다. 난 한껏 반가운 목소리로 그녀와 안부를 나눴다.

“세상에, 벌써 중대장이 되다니! 너 진짜로 말뚝 박았구나!”

원래 달린과 이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예상외의 장소에서 예상외의 사람을 만나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 같다.

비록 중대장이 되었다지만 달린은 내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연주황색 머리카락과 황갈색 눈, 사랑스러우면서도 내 눈에는 얄미워 보이는 얼굴, 뺀질뺀질한 표정까지.

내 눈에는 여전히 지옥의 고문관 훈련병으로만 남아 있는 그녀가 중대장이 되었다니, 정말 감회가 새로워져서 나는 따뜻한 눈빛으로 달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달린이 몸을 배배 꼬며 답했다.

“저는 국경방위군 근무를 오래 서다 가서 진급이 빨랐습니다. 그런데 혹시….”

달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이제 말 놓아도 됩니까?”

…아하, 내가 제대했고 이제 우리는 같은 군대의 사람이 아니니 말을 놓겠다? 물론 아주 합리적인 소리였다. 내가 여기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 꼰대겠지. 그러니까….

“어디 한번 해보시지.”

“…죄송합니다.”

달린은 금방 꼬리를 말았다. 마치 내가 에이프릴을 대하는 듯한 태도 같았다… 아니, 근데 내가 그 정도는 아니지! 정말 억울하다!

하여튼 내가 달린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을 때, 달린은 자신이 중대장까지 진급한 점이 뿌듯한 듯 다소 으스대는 톤으로 말했다.

“저 간부 교육을 무사히 통과하고, 소대장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진급 시험도 무사히 통과했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설산 대대의 1중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래, 잘했… 뭐? 설산 대대?”

내가 그토록 찾던 설산 대대의 중대장이 바로 달린이었다고?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린을 바라보았다가, 문득 마음속에서 연민 한 자락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달린, 너도 설산 대대로 가게 되었구나….”

“사루비아 님…!”

“그래, 설산 대대는 어땠냐?”

“정말 최악입니다….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습니다, 흐흑!”

그래, 설산 대대는 국경방위군 중에서도 최악의 부대. 그런 부대에 배정받았다니, 달린 얘도 지지리도 운이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사루비아 님은 밖에서 뭘 하면서 지내십니까?”

이번에는 내 얘기가 궁금했던 듯 달린이 그렇게 물었다.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것을 하고 있어.”

“예?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혁명을 하고 있단 거지.”

“풉, 콜록, 콜록! 와, 저 미친X….”

“너 지금 뭐라 했냐?”

“예? 방금 아무 말도? 안 했지? 말입니다?”

…달린 얘는 왜 지금까지도 이렇게 얄미운 거지?

나는 그녀를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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