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편, 사루비아를 마차에 태워 안전하게 대피시킨 뒤, 아퀼라는 흑마술 수색 특수군의 본부로 빠르게 내달렸다.
“잡아라!”
뒤에서 여러 명의 황실군이 그를 쫓았지만 아퀼라는 뒤도 보지 않고 계속 달렸다. 본래 뛰어난 아르콘의 체력에 국경방위군에서의 훈련이 더해져 이 정도로는 힘들지 않았다.
그가 열심히 달리고 있었을 때, 어느새 그의 곁에 익숙한 인영이 따라붙었다.
“윈터 님.”
“그래, 아퀼라. 너와 같은 목적으로 왔다.”
윈터 또한 아퀼라와 함께 본부에 있을 대원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온 것이었다.
‘여전히 싫긴 하지만….’
아퀼라는 윈터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데에서는 그의 인품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원들을 대피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뜻이니까.
“다들 도망치십시오!”
본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퀼라가 크게 외쳤다.
“들켰습니다! 황실군이 쫓고 있습니다! 빨리!”
“뭐, 뭐?!”
“이런? 정말이잖아!”
밖에서 그들을 쫓는 병사들을 확인한 엘이 외쳤다.
본부에 남아 있던 이들은 허둥지둥하면서도 신속히 몸을 움직였다. 그동안 비상시를 대비해 훈련했던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며 아퀼라는 다시 윈터에게 물었다.
“혹시 이런 경우에 대피할 곳이 정해져 있습니까?”
“아니, 일단 집으로 가도 괜찮다! 이럴 때를 대비해 상부에는 가짜 인적 사항을 올려놓았으니 우리를 바로 추적하지는 못할 거야. 물론 언젠가는 들키겠지만!”
그 말에 아퀼라는 다시 한번 윈터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기에 아퀼라는 고개를 숙였다.
“치잇!”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한 뒤, 아퀼라는 허리춤에 꽂혀 있던 검을 빠르게 뽑아 황실군과 검을 맞댔다. 몇 번의 경합이 오가고, 황실군의 검은 그대로 날아갔다. 실력은 수색군 쪽이 뛰어났지만, 포위한 병력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아퀼라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윈터도 그와 마찬가지로 황실군에 둘러싸여 한창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살아서 나갑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퀼라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기 시작했다.
* * *
그 후로 나는 윈터의 성에서의 생활에 차차 익숙해져 갔다.
나는 혹시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눈치를 봤지만, 윈터의 부모님은 정말로 나를 돕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하셨다.
한편 릴리의 경우에는….
“뇨끼는 입에 맞으세요?”
“…네, 쫀득한 식감이 너무너무 좋고요. 그리고 트러플 향이 진하게 나네요!”
“호호호!”
그녀는 나를 정말로 좋아했다. 하루 종일 나를 붙잡고 수다를 떨 정도였다.
물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건 꽤 재미있어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는데, 가끔씩 윈터의 부모님이 흐뭇하게 웃고 지나가고는 했다, 음….
식사를 마친 뒤, 나는 평소와 같이 내가 지내던 방으로 올라가려다 정원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윈터를 따라 언뜻 봤던 정원이 참 아름다웠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원으로 나가 보니 예쁘게 정리된 나무들과 화려하게 핀 꽃이 보였다. 무채색투성이인 이 성에서 유일하게 색깔이 있는 곳이었다.
‘아퀼라 보고 싶다….’
그의 눈 색을 닮은 붉은 꽃을 보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불쑥 나타났다.
일반인이라면 소스라쳤겠지만 난 윈터 덕에 이런 등장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 자리에 서 있던 건 윈터의 아버님이었다. 그는 내 인사를 받더니, 드물게 평정을 깨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기척을 알아차리는군. 나는 기척을 거의 내지 않는 편인데.”
“윈터 님 덕분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 윈터와 많이 친한가 보군….”
그가 말끝을 흐리더니 미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가 이 사람들의 속내를 어떻게 알겠는가.
한편 윈터의 아버님은 꽃을 보고 있던 내 옆에 서더니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지내는 건 불편하지 않나?”
“네, 잘 대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들었는데….”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윈터의 아버님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셨다.
“혹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제대하고 갓 사회로 나온 이종족에게 집으로 사기를 치려는 자들이 많으니까.”
“아, 그건 윈터 님의 도움으로 잘 해결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구매한 집의 주인이 바로 윈터 님이십니다. 게다가 보안 시스템으로 종을 달아 주셔서, 누가 집에 침입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이종족에게 사기를 치려는 자들이 많다는 데는 정말 동의합니다! 저도 처음 집을 구할 때 많이 고생했습니다. 나무밖에 안 보이는데 마운틴 뷰라고 하질 않나, 귀신 들린 집을 소개해 주지 않나, 휴, 정말 애먹었습니다!”
“고생이 많았군.”
“그리고 부모님이 안 계셔도 불편한 건 없었습니다! 음, 저는 고아원에서 잘 자랐…다고 생각하고, 국경방위군을 무사히 제대한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대신 저는 꼭 훌륭한 가족을 이루는 게 꿈입니다. 이미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도 있습니다. 새로운 가족이라는 건 저에게 정말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번에 갑자기 에고트 마을에 도착해서 혼란스러웠을 때에도, 그 사람을 생각하며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의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을 때, 나는 아버님이 어쩐지 묘한 표정을 짓고 계신 걸 발견했다.
“아, 아버님?”
“그래….”
왠지 감동을 받은 눈빛이 된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사루비아 양은….”
“예.”
“말이 정말 많군.”
“…가끔 그런 말을 듣긴 합니다.”
특히 이시나가 나한테 조용히 하라고 한 적이 좀 있었다, 응….
혹시 너무 시끄러웠던 게 아닐까 싶어 슬쩍 그의 눈치를 봤지만, 아버님은 어쩐지 약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탓하려는 게 아니다. 표현이 풍부하다는 건 좋은 일이지.”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루비아 양처럼 긍정적인 사람은 처음 봐서….”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인상적이야.”
“예?”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그대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윈터의 아버님은 어쩐지 예전보다 나에게 묘하게 잘해 주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건 어머님도 마찬가지였다.
‘내 어떤 점이 마음에 든 거지?’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이 파스타는 뭐죠? 이것도 맛있는데….”
며칠 뒤, 내가 식탁에 나온 메뉴에 대한 감상을 줄줄 늘어놓자 침묵을 지키시던 윈터의 아버님이 입을 여셨다.
“사루비아 양은 표현이 참 풍부하군.”
“아, 음, 네…. 그런 소리를 자주 듣죠.”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 내가 어정쩡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윈터의 어머님도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덕분에 집에 활기가 넘치는군.”
“참 잘된 일이야.”
두 분은 그렇게 대화를 끝내더니,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그리고 나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뭐지?’
방금 그거 칭찬이었나? 나를 좋게 봐주시고 있는 건가?
물론 나를 좋게 봐주신 건 참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슬쩍 눈을 굴렸다.
로판에 비유하자면, 이곳은 북부대공의 성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보통 계약 결혼을 해서 온 여주인공 덕분에 성의 분위기가 밝아지면, 사용인들 중 한 명이 하는 말이 있지.
그래, 생각해 보니 요즘 분위기가 이상하다 했다. 그렇다면 혹시….
“호호, 사루비아 님.”
그 순간 릴리가 내 이름을 불렀기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이 타이밍인가? 설마 정말로 그 대사를….
“사루비아 님이 오신 뒤로 북부에도 봄이 온 것 같아요!”
‘아, 안 돼…!’
결국 나와 버린 릴리의 대사에 난 애써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설마 이 대사 하나 때문에 로판 전개로 돌변해서 윈터와 엮이는 건 아니겠지? 잘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렇게 되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래서 이 대사를 듣는 일만큼은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 건데.
그때 릴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 성에 계속 머무셨으면 좋겠어요….”
“계, 계속 머문다면 설마….”
지금 정말로 나와 윈터를 엮으려는 건가? 안 된다, 그건 바람이라고!
그러나 릴리는 윈터의 부모님을 흘끗 바라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불쑥 말했다.
“두 분이 사루비아 님을 입양하신다거나요!”
“풉!”
나는 파스타를 뿜을 뻔한 걸 간신히 참으며, 콜록대다가 물을 들이켰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러나 당황한 나와 달리 윈터의 부모님은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 이런 딸이 있으면 좋겠군.”
“동의한다.”
그러더니 그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나는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을 겨우 삼키며 눈치를 봤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윈터의 아버님이었다.
“아가, 저번에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윈터의 전우는 우리에게도 딸이나 다름없지.”
“그래, 우리를 친부모님처럼 생기고 도움을 요청해도 된단다.”
“가, 감사합니다….”
어쩐지, 그동안 나를 대하던 태도가 이상하더라니….
‘나를 며느리가 아니라 양딸 삼으려던 거구나, 응….’
왠지 허망한 기분이 들어 허허 웃어 보이며, 나는 천장에 걸린 화려한 샹들리에를 쳐다봤다.
윈터 님, 졸지에 부모님을 뺏게 되어 죄송합니다….
* * *
가까스로 황실군의 추적을 따돌린 후, 아퀼라는 지친 얼굴로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아퀼라 님!”
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카론이 놀란 얼굴이 되어 뛰쳐나왔다.
“상처가…!”
“누가 보면 안 돼. 들어가.”
아퀼라는 저를 살피는 카론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명의 황실군을 상대하느라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상처는 그와 함께 싸운 윈터도 얻었고, 그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집으로 들어가자 카론과 마찬가지로 놀란 눈이 된 빅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집에 아무렇지도 않게 머무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아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루비아와 달리 그는 이 집에 둘 말고는 아무도 없기를 바랐으니까.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일단 사루비아를 찾아야 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아퀼라가 말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 수도는 위험해. 내일 밤에는 이 집 말고 다른 안전한 거처를 찾아봐야 할 거야. 사루비아가 간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수도로 돌아오지 않는 게 맞아.”
“사루비아 님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카론이 울먹거리며 물었지만, 아퀼라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이제부터 찾아봐야겠지.”
다만 이를 악물며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디 있을지 모를 사루비아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 * *
며칠이 흐르고 난 북부의 생활에 거의 완벽하게 적응했다. 그날도 아침을 먹으러 나온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 나는 매일 신문을 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혹시나 우리에 관한 소식이 이곳에 실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오늘도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에이….”
시무룩한 얼굴로 신문을 내려놓다가, 나는 문득 광고란에 시선을 주었다. 오늘 신문에 광고란에 실려 있는 건 비누 광고였다.
『<광고>
한번쓰면못끊습니다
한달만딱써보시면그
뒤에는효과를체감합
니다만일효과가없을
시환불해드립니다한
번만써보시고만에하
나별로면환불해드리
는데고민필요없이빨
리주문하십시오주문
하러가실때는흰색과
갈색비누모두좋으니
길게고민마십시오』
지면의 길이 탓에 어설프게 잘린 것처럼 보이는 단문 광고였다.
그러나 사실 이건 흑마술 수색 특수군 시절에 배운 적 있는 조직 고유의 암호였다. 입단한 후 받게 되는 기초 교육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그재그 드립!’
첫 번째 글자와 두 번째 글자를 지그재그로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한 달 뒤 다시 만나. 데리러 갈게.’
누가 쓴 편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를 향해 보내는 것만은 확실했다.
왠지 찡한 기분이 들어, 나는 한참 동안이나 광고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무사했구나….’
이런 광고를 실을 수 있을 정도의 인력이 남아 있다면 단체가 모두 와해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내게 유일한 사람들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한 달. 한 달만 있으면 돼….’
하지만 가만히 있는 건 너무 답답했다. 이 동안에도 다른 동료들은 수도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 아니겠는가? 나도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뭔가 해야 해.’
에이프릴이 내게 해 준 말, 내가 해야 할 일을 늘 생각하라는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고민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 ‘그 단체’의 존재가 떠올랐다.
‘설산 대대의 혁명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