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잠시 뒤, 나는 윈터와 함께 왔던 그 성에 윈터 없이 그의 부모님과 함께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내게 건넨 제안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았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그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들의 동료를 내팽개칠 수는 없다.”
…역시나 윈터의 부모님다운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윈터의 행방에 대해서도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겉보기로는 전혀 염려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윈터의 표현방식을 잘 아는 내가 보기에는 염려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윈터는 잘 도망쳤을 거다. 강하게 자란 애니까.”
“하지만 만일 황실군 정예에게 발각당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장담할 수 없어 걱정이군.”
“여보, 윈터는 아마 잘 있을 거예요.”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윈터 님은 잘 도주하고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그래, 그렇겠지. 우리는 윈터를 믿는다.”
어쩌면 그들도 윈터에 대한 염려를 이겨내기 위해 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가 무사히 있는 것을 보면서, 윈터 또한 무사하리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
하여튼, 그래서 나는 그들을 따라 성으로 이동했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노숙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지만 이 성에 있어도 되는지는 걱정이 되기는 했다.
“저, 황실군이 곧 추적해 올 텐데….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 겁니까?”
“흑마술 수색 특수군이라는 단체 전부가 발각당했다고 했지….”
아버님이 무언가를 생각하시는 듯 천천히 말씀하셨다.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성원의 가족이 있는 데까지 추적하는 데는 한참 걸릴 거다. 아마 규정을 그대로 따른다면 최소 나흘이 걸릴 거고, 에고트 마을까지 다시 나흘이 걸리니 일주일이 넘게 시간을 벌 수 있겠군.”
“여보, 그리고 윈터라면 아마….”
“그래.”
두 분이서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게 설명하셨다.
“그 단체가 처음부터 반란을 목적으로 했다면, 흑마술 수색 특수군의 구성원을 보고할 때도 일부러 틀린 정보를 올렸을 거다. 그게 우리가 윈터에게 가르쳐 줬던 기밀 유지의 원칙이니까.”
…그런 것도 가르쳤다고? 윈터를 인간 병기로 키우셨던 건가?
윈터의 어머님은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짓고 있던 내게 질문을 던지셨다.
“아가, 혹시 그곳에서 입고 있던 제복에 네 이름이 박혀 있었니?”
“아니요, 저희는 아예 제복을 저희가 디자인해서 입었어요.”
“역시. 그렇다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던 거진 자치 단체나 다름없었을 텐데, 너희의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을 리 없다. 아마 너희의 진짜 인적사항을 알아내고 추적하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릴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은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에 한 번도 자기 이름을 쓴 적이 없었다. ‘줄리’라는 이름을 썼었지.
나는 그게 나도 모르는 선임의 이름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녀의 가명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보다 꼼꼼하게 대비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아퀼라도 무사히 몸을 피했을지 모른다. 그제야 좀 기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윈터의 부모님의 성함을 소개받았다. 아버님의 성함은 폴라, 어머님의 성함은 스노우라고 했다.
‘정말 윈터의 부모님다운 성함이군.’
아무래도 이 로판 세계는 작가가 이름을 대충 지은 것 같은데, 그래서 이름을 외우기 편하니 나에게는 좋은 일이긴 했다.
“이 주 후 돌아가는 마차로는 우리가 안내해주겠다. 그때까지 너는 이 방을 쓰면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그들은 2층 복도에 있는 방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본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와….”
그건 정말로 로판에 나오는 방 같았다!
흰색 레이스 커튼, 커다랗고 예쁜 침대, 방 안 곳곳에 놓여 있는 비싸 보이는 장식품들….
“저, 이 방을 제가 써도 되는 건지….”
너무나 잘 꾸며진 방이어서 감히 내가 저 침대에 몸을 누여도 되는 건지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아버님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으셨다.
“음? 혹시 방이 너무 작다면, 다른 곳으로 바꿔 주겠다.”
“아, 아니…! 충분합니다! 너무 좋아서 물어봤어요! 혹시 손님방인 건가요?”
“그래, 손님방이 맞아.”
어머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셨다.
“그러나 이 성에서는 손님이 자고 간 적이 한 번도 없어, 늘 비어 있었지. 이 손님방을 쓰는 건 네가 처음이다.”
“여, 영광입니다….”
심지어 방에는 화장실까지 딸려 있었고, 그들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씻으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식사 시간에는 부담가지지 말고 1층의 식당으로 내려오라는 말도 덧붙여 주셨다.
“그런데 식사는 두 분이 직접 하시는 건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도움을….”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버님이 그렇게 답하더니, 1층 쪽으로 고개를 내민 후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셨다.
“릴리 씨! 잠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네, 가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고, 곧 누군가가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건 메이드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갈색 머리의 여자였다. 정말 로판의 전형적인 메이드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이 아가씨는 혹시….”
“그래요, 손님입니다.”
“어머나!”
‘릴리’라고 불린 여자가 감격하여 입을 탁 틀어막더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누가 데려오신 손님이신가요? 이렇게 젊은 아가씨가 손님이라니, 혹시….”
“윈터의 전우라고 하더군.”
“어머! 도련님께도 친한 동료가 있으시다니! 저는 알타이르 님 말고는 친구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윈터에게 실례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말을 턱턱 해댔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아, 혹시 성함이….”
“사루비아입니다.”
내가 얼른 자기소개를 하며 그녀와 악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아, 반가워요! 저는 릴리입니다! 이곳의 가정부로 오래전부터 일해 왔죠!”
“그러시군요. 앞으로 이 주 정도 지낼 텐데, 그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내가 이 집에 손님으로 온 게 상당히 기쁜 기색이었다. 보통 손님이 오면 일이 늘어난다고 싫어할 텐데, 왜 그러는 거지? 좀 수상한데.
그 이유는 곧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한 말에 의해 밝혀졌다.
“저는 늘 이 집에 손님이 있었으면 했어요! 윈터 님도 알타이르 님 말고 친우를 사귀셔야죠!”
아하, 윈터의 사회성을 염려한 거였구나! 정말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엔 윈터 님이 안 계신데, 혹시 무슨 일로 홀로 오신 건가요?”
“아, 저는 길을 잃어서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됐는데, 그동안 지낼 곳이 없어서….”
“그런 거군요! 뭐, 손님이라니 아무래도 좋아요! 혹시 드시고 싶으신 저녁 메뉴가 있으신가요?”
“아, 저는 다 잘 먹어요.”
예의상 그렇게 대답했더니, 갑자기 그녀가 실망한 눈빛을 했다. 내가 혹시 뭘 잘못 말한 건가?
릴리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윈터 님의 친우라서 그런지, 윈터 님과 비슷하시구나….”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나는 앞으로도 평생 ‘다 잘 먹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리를 하게 될 운명인 걸까….”
…젠장, 뭘 좋아하는지 제대로 말해주길 원하는 거군.
하긴, 원래 제일 까다로운 게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그 말을 오랜 시간 동안 들어왔으면 질리긴 하겠다. 물론 이 사람들은 진짜로 아무거나 다 잘 먹었겠지만.
왠지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렸다.
“음…. 오늘은 라자냐가 먹고 싶은 것 같아요.”
“라자냐라고요?!”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의 안색이 놀라울 정도로 밝아졌다.
“와! 오늘 저녁으로 라자냐를 준비할게요! 앞으로도 드시고 싶으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네, 네….”
“사루비아 양.”
그때, 릴리와 나의 대화에 윈터의 아버님이 끼어드셨다.
“부모님이 걱정하시지는 않겠나? 연락을 넣어야 할 것 같은데.”
“아, 저는 부모님이 안 계셔요!”
내가 해맑게 외친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제야 나는 내가 뭔가 잘못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맑게 말할 내용이 아니었군.’
“…그렇군.”
윈터의 아버님께서 어색하게 혼잣말을 하시자, 릴리가 눈치를 보더니 얼른 끼어들었다.
“참, 먼 길 오신 분에게 뭐 하는 거람! 그럼 저는 요리를 하러 가볼 테니, 편히 쉬세요!”
“앗, 네….”
며칠 동안 씻지 못했던지라 아까부터 머리가 상당히 근질거리기는 해서, 나는 윈터의 부모님께도 꾸벅 인사를 한 뒤 방으로 뒷걸음질 쳤다.
젠장, 로판에서 머리를 감지 못하는 여주라니. 이건 여주 실격이다. 여주력 –100 감점이란 말이다.
“그럼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그래, 편히 쉬도록.”
나는 활짝 웃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웃으며 방문을 닫았고, 씻기 위해 방에 딸린 화장실로 이동했다.
* * *
“우와….”
사루비아가 방 안으로 사라진 뒤, 릴리는 두 손을 모으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방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가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폴라와 스노우에게 말했다.
“두 분을 저렇게 스스럼없이 대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폴라와 스노우도 그녀의 말에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나도 신기하더군.”
“윈터의 후임은 아주 용맹한 모양이야.”
릴리는 이제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눈을 하고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사랑스러우신 분이에요…. 이 성에 저런 색이 존재하다니….”
릴리는 소녀였던 시절부터 이 성의 가정부로 십 년도 넘게 일해 왔다. 마을에서 어린 동생들을 홀로 키우는 릴리에게 이 성은 아주 적합한 일자리였다.
이 성에서 일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성의 일원들은 전혀 까탈스럽지 않아서 릴리가 무얼 하든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고, 릴리가 실수를 해도 “다음부턴 조심하도록.”이라는 말이 끝이었다.
다만, 이 성의 분위기가 꼭 얼음과도 같은 건 릴리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딱딱한 표정과 말투를 유지했다. 그들은 실상 단란한 가족이었지만,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릴리가 어떤 농담을 던져도 그들은 딱딱하게 “방금 뭐라고 했나?”라고 하며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심지어 그들의 외모는 모두 무채색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가구마저 무채색이었던 탓에, 이 성 자체가 무채색 일색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폴라가 성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손님방 하나를 꾸며 놓으라고 했을 때 릴리는 몹시 신이 났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대로 화사한 색깔을 잔뜩 사용한 방을 꾸며 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방에는 몇 년 동안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윈터와 인사하는 사이인 듯한 유리도, 윈터와 친한 알타이르도, 여관에서 잤지 이 성에서 묵고 가지는 않았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보니 이 성의 분위기가 너무 차가워서 적응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긴 릴리도 그들의 심정이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북부는 원래 추웠지만 그중에서도 이 성 안은 유난히 더 추운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루비아라는 새로운 손님을 보고 릴리는 너무나도 기뻤다.
씩씩하고 기운 넘치는 말투! 대화할 때마다 나오는 환하고 밝은 표정! 그리고 화사한 머리카락 색까지!
‘하, 정말 완벽해….’
거기다 릴리는 그녀가 저녁에 라자냐를 주문해준 것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늘 식사 메뉴를 혼자 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릴리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바랐다.
‘제발 사루비아 님이….’
혹시나 신이 있다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이 집안의 양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