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십니까?”
[그래요, 들립니다. 젊은 목소리군요.]
“정확하십니다. 저는 흑마술 수색 특수군 측입니다. 물론 들으신 대로 이종족이기도 하고요.”
[우리에게 협력하시겠다는 겁니까?]
그 말에 에이프릴은 침묵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뇨, 그쪽이 우리에게 협력하라는 겁니다.”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에이프릴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지금 그쪽은 도망 다니는 신세고,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처지라는 걸 모르시지 않으시지요? 우리는 언제라도 이 수정구를 통해 2황자군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황제군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수정구 너머에서 언짢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협력을 원한다면서 우리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저 저희의 관계를 확실히 해 두자는 것뿐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협력하는지.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쪽에도 이득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쪽에서도 이종족과 협력을 하면 어떨지 의견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협상이 어려울 것 같아 자체적으로 걸러냈지만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겁 없는 집단일지는 몰랐는데.]
“아무리 우리가 오랜 시간 제국에서 천대받았더라도, 현재 실패한 반란군이 되어 완전히 몰락하기 직전인 그쪽보다는 처지가 나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우선 어떤 방식의 협력을 원한다는 건지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에이프릴이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2황자를 부활시키기 위해 블랙 드래곤의 심장을 찾고 있다죠?”
[그렇습니다. 뭔가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상대는 한때 국경방위군으로서 마물을 사냥했던 우리에게 희망을 걸어 보는 듯했다.
하지만 아마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은 그의 예상을 깨 버릴 것이다.
“아니요, 아마 블랙 드래곤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몇 년 전에 딱 한 마리가 나타났던 걸로 아는데, 블랙 드래곤의 생태 특성상 그렇다면 당분간 나타날 일이 없어요.”
[…그렇군요. 역시 무의미한 일이었군. 그때 2황자가 죽은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틀린 거였나.]
슈비드 백작의 목소리에서 체념의 기운이 느껴졌다.
[정보를 줘서 고맙긴 하지만, 이걸로 생색내고 우리의 협력을 사려는 겁니까? 그래서 우리를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는 겁니까?]
“잠깐만요, 얘기는 끝까지 들어보셔야죠.”
에이프릴이 또렷한 발음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2황자를 되살려내는 멍청하고 비효율적인 계획은 그만두고, 대신 다른 계획을 세워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가 마치 유혹하듯 달콤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직접 권력을 잡는 겁니다.”
[그 말은….]
“황제를 퇴위시키고, 대신 귀족들이 공화정을 세우는 거예요.”
통신구 너머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우리는 잠시 그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통신구에서 답은 금방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원하는 게 뭡니까?]
“계약 마법의 해방, 이종족의 자유. 그리고….”
에이프릴이 우리를 돌아보며 윙크하듯이, 가벼운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저희와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데.”
우리가 황제를 제거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반발하는 귀족들까지 모두 제거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권력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권력이 분배되도록 하면 되겠지.
다만 이건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이후 하층민들까지 포함해 모두가 공화정에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지고, 최종적으로는 지금까지 정치에서 소외되어 왔던 사람들에게 권력이 분배되는 것.
그게 우리의 진정한 최종 목표였다.
“계약 마법이 풀리기만 한다면, 저희는 여러분의 검이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에이프릴이 다시 한번 덧붙였다. 그를 설득할 수 있을 만한 강력한 한 방이었다.
“어쩌면 국경방위군 전체를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 말에 슈비드 백작은 잠시 침묵했다. 제발 우리에게 혹해서 침묵하는 거였으면 좋겠다.
[알겠습니다. 뭘 원하시는 건지, 잘 이해했습니다….]
“예, 그렇다면….”
[하지만 결정은 저 혼자 내리는 게 아니니까요. 논의 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백작님, 저 좀 구해 주세요! 백작님… 읍읍!”
뒤에서 누군가가 차이키의 입을 틀어막는 소리가 들렸지만 슈비드 백작도 에이프릴도 개의치 않고 통신을 그만두었다.
“내가 희생자가 또 늘 줄 알았지!”
브레이브에 의해 입이 틀어막힌 차이키의 모습을 보고 반응한 건 빅팀뿐이었다.
그는 차이키에게 가해지는 겁박을 보고 겁에 질리는가 싶더니 곧장 나에게 다가와 헤헤 웃으며 뭐든 시켜 달라고 말했다.
오늘도 고맙다, 산체스….
* * *
2황자군과 처음 접선하고 며칠 후.
아직까지 우리는 연락을 받지 못했고, 그동안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었다.
물론 이제는 우리의 전력에 흑마술사 둘이 늘었지만 말이다.
“이,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검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피를 이용한 흑마술을 쓰며 차이키가 외쳤다.
“분명 탈옥하게 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왜 반항을 하세요…. 주인님의 말을 잘 들어야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제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던 빅팀이 우리의 눈치를 봤다.
나는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차이키에게 말했다.
“흠, 네 말이 옳다…. 함께 탈옥하면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지.”
“그럼 풀어 주시는 겁니까?”
“그래, 너는 필요가 없지. 일단 우리에게는 빅팀이 있고.”
“주인님!”
빅팀이 감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너처럼 말을 안 듣는 흑마술사는 필요 없어!”
“아, 그럼 좀 이제 놓아주십쇼!”
“하지만 너는 너무 위험해.”
내가 그에게로 손가락을 쭈욱 뻗었다.
“너는 우리가 혁명을 준비한다는 비밀을 다 알고 있잖아. 그걸 어디 가서 불고 다니면 어떡하지?”
“저도 어차피 현 정부에 찍힌 처지인 거 아시면서요!”
“흠.”
차이키를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고민이긴 했다.
부려 먹기 쉬운 빅팀과 달리 차이키는 부려 먹기 까다로워서 차라리 풀어 주는 편이 속 편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정보를 유출하면 어떡하는가? 자고로 이런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비밀을 지키는 것이란 말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뭡니까?!”
“흑마술로 계약을 맺는 거야. 만일 네가 맹약을 어기고서 우리의 비밀을 떠벌리고 다닌다면 어마어마한 고통을 받는 걸로.”
“에이씨!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이대로 우리한테 평생 감시당하면서 살던가. 아, 구치소에 신고해야지~.”
“에잇, 진짜!”
결국 조금 뒤 차이키는 나와 손목을 맞대고 계약 마법을 걸고 있었다.
흠, 제대하자마자 계약 마법을 또 걸게 되다니.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갑이잖아.’
역시 갑이 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원래 로판 빙의하면 늘 갑이 되는 거 아니었나? 난 왜 이렇게 소박하게 살고 있는 거지?
오랜만에 이 세계에 대한 억울함을 잠시 표출한 뒤, 나는 드디어 차이키를 놓아주었다. 물론 그의 통신구는 중요한 물건이므로 돌려주지 않았다.
“차이키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렴~.”
“에이 씨!”
후다닥 도망쳐 달려 나가는 차이키의 뒷모습이 웃겨서 내가 킥킥거리고 있을 때, 마침 통신구가 진동했다.
“뭐야?”
아무래도 타이밍 좋게 2황자군 측에서 연락을 보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난 이 통신구를 다룰 줄 몰랐고,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사람은….
“빅팀!”
“예, 주인님!”
역시 검증된 노예가 좋긴 좋단 말이지.
빅팀이 재빠르게 달려와 통신구를 받았고, 나는 그 틈에 본부에 남아 있던 부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 통신이 왔습니다!”
쾅-!
그 말에 레온과 브레이브가 문에 몸통 박치기를 하며 들어왔다. 역시 무식하리만큼 강한 인간들다웠다.
“어떤 놈들이 문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거야?”
그들의 뒤에서 에이프릴이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성질을 아는 부대원들이 쫙 갈라져 그녀에게로 길을 터 주었다.
“이, 이제 받겠습니다.”
빅팀이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조작하며 통신구를 에이프릴에게로 건넸고, 에이프릴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여기는 슈비드 백작.]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군요. 이쪽은 에이프릴입니다.”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예, 저희는 뜻을 하나로 굳혔습니다.]
어떤 답이 돌아올지 몰랐기에, 본부 안에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 뜻은….]
치지직-
“뭐야? 왜 끊기지?”
갑자기 통신구가 흐려지면서 이상한 잡음을 냈다. 에이프릴이 통신구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빅팀, 이거 왜 이러는 거야?”
그 모습을 보는 우리 또한 속이 타 죽을 지경이었다. 60초 후에 공개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빅팀은 에이프릴의 손에서 통신구를 가져가서 살핀 후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런 종류의 통신구가 있습니다. 중간중간 60초씩 끊기는 통신구인데, 60초가 지나면 다시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60초였어?!’
우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빅팀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서 있었다.
마침내 60분과도 같았던 60초가 지나가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끊긴 모양인데, 이제 들립니까?]
“예, 들립니다. 이왕이면 빨리 말해 주세요. 통신이 다시 끊기기 전에.”
에이프릴이 빅팀을 흘기며 대답했다.
통신구에서는 마침내 우리가 기다리던 답이 들려왔다.
[여러분과 힘을 하나로 합치기로 했습니다.]
“와…!”
나는 짧게 탄성을 냈다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만 다른 부대원들도 놀라고 있었기에 내 탄성에 별 의미는 없었다.
“이시나 님,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내가 마침 내 옆에 있던 이시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이시나도 어쩐지 감동이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사루비아. 나도 기뻐. 이 지옥 같은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는 게….”
“…….”
어쨌든 에이프릴은 슈비드 백작과 정확한 협력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저희가 먼저 황성에 침입하여 계약 마법을 해제하겠습니다. 그럼 그날 저희에게로 시선이 쏠렸을 때, 황성에 침입하여 황제를 사로잡고 폐위시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로원의 9할 이상이 동의할 시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는 관례가 있었죠. 필요하다면 저희 측에서 바로 황제를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폐위 쪽이 좋을지 암살이 좋을지는 차차 대화해 보도록 하죠. 그걸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할 것 같군요.]
“저희 측에서는 계약 마법에 대해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황성의 구조도요.”
[황성의 구조는 이쪽에 충분한 정보가 있습니다. 황성 자유 출입 권한이 있는 고위 귀족이 몇 명 있어서요. 허허.]
“잘됐네요. 그렇다면 계약 마법은….”
그들은 황성 함락 작전에 대해 더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당분간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통같이 보안을 지키며 각자의 계획을 보완하기로 했다.
조만간 비밀리에 대면하고 연합 본부를 마련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혁명군의 본거지라니!’
그야말로 만화나 소설 속에서만 본 것 같은 설정인데, 정말 심장이 뛰지 않는가? 그곳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혁명군과의 로맨스를 전개할 수 있을 듯한….
‘아, 내가 소설 여주고 혁명군이었지.’
나도 참, 이렇게 자주 잊어버린다니까!
하여튼, 나는 앞으로 다가올 본격적인 혁명의 깃발을 기대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고 있었다.
내 사랑도, 내 혁명도,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았다.
* * *
“안 돼….”
“도망쳐, 사루비아.”
아퀼라가 숨죽여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뭔가 일이 잘못됐다.
그러니까 우선 이 상황에 대한 결론부터 전달하자면….
우리는 현 황실에게 발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