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지금 네가 나에게서 도망을 가? 피식, 재미있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루비아를 보며, 이시나는 생각했다.
사루비아가 이상하다.
사루비아가 얼마 전 흑마술사를 발견했지만 놓쳤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에이프릴의 경우에는 사루비아에게 흑마술사를 놓친 것에 대해 뭐라고 잔소리를 하려는 듯했지만, 사루비아의 태도를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왜냐하면 사루비아가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피식.”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사루비아가 이상한 웃음소리를 입으로 내는 걸 보며 이시나는 머리를 감쌌다.
지금 사루비아는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고개를 쳐든 뒤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요즘은 그게 사루비아의 기본 자세였다.
게다가 사루비아는 자꾸 “피식, 재미있군.”과 같이 이상한 말을 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흑마술 수색 특수군의 제복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며 검은색으로 바꿀 것을 종용했다. 루이즈가 째려보자 금방 꼬리를 말긴 했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자꾸 저녁으로는 피가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를 고집하고, 저녁마다 와인 한 잔씩을 마시는 것 같았고, 오렌지 주스 같은 걸 권하면 단 건 먹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루비아가 단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이시나로서는 어이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도망친 흑마술사를 대하는 사루비아의 태도였다.
사루비아는 “네가 날 두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도망이라…. 후훗, 재미있군.”, “넌 절대 나를 못 떠나.”와 같은 이상한 대사들을 했는데, 어쨌든 흑마술사를 확실히 잡아 오겠다는 얘기 같아서 에이프릴도 그녀에게 뭔가 더 이야기하려다 그만둔 듯했다.
대신 괴로운 건 사루비아의 주변에 있는 동료들일 뿐이었다. 이시나는 사루비아가 자꾸 “피식.” 하고 웃을 때마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건 아퀼라도 마찬가지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루비아는 집에 있는 식품 저장고에 물만 두고 모두 비워 두기를 원했기에, 아퀼라는 강제적으로 함께 단식을 하고 있었다.
‘사루비아, 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거야….’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사루비아가 또다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모양이다.
부디 사루비아가 이번 역할 놀이를 빨리 끝냈으며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시나는 눈물을 훔쳤다….
* * *
“아 비서, 그래서 새로 찾아낸 정보 있나?”
“아직 없습니다.”
내가 딱딱한 목소리로 한 질문에, 아퀼라가 마찬가지로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즘 나는 집착 사루비아가 되어 흑마술사를 추적하고 있었고, 아퀼라는 내 장단을 잘 맞춰 주었다. 내가 그를 ‘아 비서’라고 부르는데도 아퀼라는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시나가 아퀼라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긴 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 결과 나는 나날이 훌륭한 집착 사루비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나에게 명령하지 못한….
“사루비아, 요즘 실적이 부족한 것 같은데? 일해야지, 일. 호호.”
“예! 일하겠습니다!”
내가 방금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정신이 번쩍 드는군.
내가 집착 사루비아 놀이는 그만두고 일을 시작하려 했을 때, 알타이르가 신문 한 부를 들고 부대 건물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다들 모여서 이것 좀 보십쇼!”
“왜, 뭔데 그래?”
에이프릴이 그의 손에서 신문을 빼앗으며 물었고, 난 덕분에 신문 1면에 쓰인 내용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신문 1면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헤드라인은 바로….
『황제 폐하, 국경방위군에 대한 군 복무 단축을 발표하셔….』
“구, 군 복무 단축?!”
황제가 우리한테 이로운 일을 해 줄 리가 없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 순간 과거의 일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설의 미친X 달린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었다.
“음…. 저는…. 복무 기간? 단축? 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녀가 황제에게 직접 그렇게 건의했었지!
‘그렇다면 설마 황제가 달린의 건의를 진짜로 받아들였다고?’
“참고하도록 하지.”라고 말했는데, 그 건의를 진짜로 참고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군.’
아무래도 내가 황제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
‘아니, 그런데 애초에 국경방위군에 우릴 억지로 집어넣은 게 문제잖아!’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황제를 증오하기 시작한 나는 복무 기간 단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XX, 진즉에 단축시켜 주면 좋았잖아.’
신문 기사에 따르면 국경방위군의 복무 기간을 총 3개월을 단축한다고 했다. 3개월이라니, 8년에 비하면 짧은 것 같지만 그래도 엄청난 기간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카론은….”
카론은 원래라면 두 달 후 제대였는데, 그럼 그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카론의 이름을 중얼거리니, 차분한 눈으로 신문을 읽던 에이프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기사에 따르면 카론의 기수는 2주 후 제대라고 되어 있네. 곧 제대하게 될 거야.”
“아하,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사루비아, 카론도 제대하면….”
“예,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말입니다.”
나는 에이프릴과 눈을 마주치며 음흉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물론 카론은 자발적으로 나를 따라올 테지만, 어쨌든 나는 그도 이 흑마술 수색 특수군으로 끌고 올 생각이었다. 나 혼자 고통받는 건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미소 짓고 있자니 왠지 알타이르가 몸을 오소소 떨었다.
“불쌍한 카론….”
나는 알타이르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아퀼라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제대 전 카론에게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지는 이미 말해 두었다. 나와 아퀼라의 경우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지 불확실하므로 그는 일단 이시나의 집에 연락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보다는 다른 방법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아퀼라에게 신문 기사를 가리키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퀼라, 응당 우리의 책무를 다해야 해.”
“그래.”
“데리러 가자!”
“그래.”
지금까지 길들인 책임이 있는데, 당연히 카론이 제대할 때도 우리가 직접 데리러 가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시나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너희는 정말… 카론을 키우는구나….”
“그래도 맞선임의 정이 있는데, 당연히 데리러 가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이시나 님은 왜 저희 보러 안 오셨습니까?”
“왠지 너희가 거기서 키스하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오…. 역시 이시나 님….”
“…정답이었어?”
나는 잠시 이시나의 혜안에 감탄했다. 역시 흑막캐는 달라도 뭔가 달라.
“이시나 님도 카론을 데리러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 왠지 너희가 가는 길에도 키스할 것 같아.”
“역시 이시나 님….”
* * *
마침내 카론이 제대하는 날.
우리는 벌써 도착한 다른 부대 병사들로 인해 시끌벅적한 광장에서 카론을 찾고 있었다.
“어때, 카론이 보이는 것 같아?”
“걔는 머리 하나가 더 크니까 바로 눈에 띌걸.”
“음, 아냐. 그것보다도 우리를 먼저 찾아내서 달려올 수도 있어.”
곧 우리의 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게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카론이 광장으로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카론을 볼 수 있었고, 카론도 우리를 향해 미친 속도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사루비아 님!”
그는 아퀼라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내게 돌진했다. 그의 무게에 깔려 거의 뒤로 넘어갈 뻔한 나를 아퀼라가 재빨리 붙들어 주고서 잔소리했다.
“카론, 얘 넘어가지 않게 하라고 했잖아.”
“앗, 반성하겠습니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싱글벙글하게 웃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조기 전역이 무척이나 기쁜 듯했다.
하, 왜 나 때는 군 복무 기간 단축이 안 됐던 거지? 생각할수록 XX 빡치는군.
“그래서 군대에서 별일은 없었냐? 뭐 누가 XX하지는 않았고?”
“음, 말년에 간부들이 훈련을 늘렸긴 했는데 어쨌든 저는 잘 지냈습니다!”
역시나 매사에 긍정적인 카론다웠다. 훈련을 늘렸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저렇게 방긋방긋 웃다니.
“사루비아 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나는 아퀼라랑 함께 집도 구했다고. 되게 좋은 곳에 있어.”
직장이랑 아주 가깝지. 그 말은 생략하며, 나는 속으로 슬픈 미소를 지었다.
“카론, 지낼 곳은 있어?”
내가 그렇게 물으니, 카론이 일말의 걱정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해맑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꼭 ‘문제 있나?’ ‘없습니다!’를 연상시키는 씩씩한 대답이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아퀼라, 아무래도….”
“제길, 그 나이면 독립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곧 독립하겠지만 집을 구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한 카론이 눈을 빛내며 외쳤다.
“앗, 저는 좋습니다!”
결국 카론은 집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말은 아퀼라가 조금 더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였고.
더불어, 카론에게 흑마술 수색 특수군이 되라고 꼬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거다.
* * *
“카론, 조금만 기다려 봐! 우리가 맛있는 걸 해 줄게!”
카론은 그대로 우리 집에 초대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멋진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막 식량 저장고로 가려던 그때 아퀼라의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사루비아, 거기 물밖에 없어. 식재료는 새로 사 와야 해.”
“아, 그랬지….”
내가 한창 집착 사루비아 놀이를 한다고 식량 저장고를 홀랑 비웠었지, 흠.
나는 잠시 카론을 돌아보며 생각에 빠졌다. 나는 아직 흑마술사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카 비서!”
“예? 예!”
내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카론이 답했다.
“아니, 그냥 불러 봤다. 요즘 흑마술사가 없으니 헛것이 다 보이는군, 피식.”
“괜찮으십니까, 사루비아 님?!”
나에게 열심히 장단을 맞춰 주는 카론을 보며 나는 조금 행복해졌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행복한 얼굴의 카론을 보니, 카론은 이게 뭔지 영문도 모르면서 그냥 재미있으니 좋아하는 듯했다.
비로소 내 일상을 되찾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야….”
요즘 내 일상이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카론이 없어서였구나! 물론 아퀼라도 내 장단을 잘 맞춰 주긴 하지만 이런 일에는 카론이 적격이란 말이다.
아퀼라의 묘한 시선 속에서 카론과 역할 놀이를 즐기고 난 뒤, 나는 아퀼라가 사 온 재료를 요리하여 카론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며, 나는 카론을 영입하기 위해 그를 넌지시 떠보았다.
“카론, 너 혹시 이 사회에 불만 같은 거 없니?”
“예? 없습니다!”
젠장, 너무 긍정적이어서 탈이군.
“그래? 나는 이 사회에 불만이 있는데.”
“앗, 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진작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였군.
나는 카론을 영입하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카론은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듣지 않는가.
예를 들어 내가 이렇게 말해도 말이다.
“카론, 나와 함께 재입대할래?”
“커헉!”
옆에서 식사하던 아퀼라가 사레가 들렸는지 열심히 콜록댔고, 나는 카론에게 들려올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런데 카론은 갑자기 굳은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인간적으로 재입대는 좀….”
…카론에게도 생각할 줄 아는 머리라는 게 존재했구나,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