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라면 내가 있던 자리를 꽁꽁 얼려야 했을 얼음은 윈터의 검에 막혀 팽팽하게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크으윽….”
이장은 버거운 듯 신음 소리를 냈고. 마침내 한참 동안의 대치 끝에 승자가 정해졌다.
쾅-!
윈터의 힘을 이기지 못한 이장이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부딪친 것이다. 윈터는 바닥에 떨어진 얼음 폭죽을 주우며 중얼거렸다.
“얼음으로는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제야 한숨 돌린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문가에서 엄호하고 있던 이시나가 곧장 내게 달려와서 걱정스레 나를 살폈다.
“사루비아, 다친 데는 없지, 응?”
“예, 없습니다. 다만 아퀼라는, 음….”
나는 나를 밀쳐낸 아퀼라 쪽을 봤다가, 그가 멀쩡함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윈터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호루라기 소리를 들었다.”
“그 작은 소리가 들리셨습니까?”
“나는 당연히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역시윈터’, 남주력 +30.
“어쨌든… 감사합니다.”
나는 구해 준 것에 대해 윈터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번에는 나 혼자 추위와 싸워 보려 했는데, 아직은 무리였나 보다. 이장이 나에게 얼음 폭죽을 쐈을 때 평소보다 몸이 느리게 움직여서 혼자 피하지 못했던 걸 보면.
‘좀 더 단련해야겠군…. 산체스가 제대하면 강해지는 법을 물어봐야겠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퀼라가 창밖을 흘끔 보고 말했다.
“눈이 멎었어.”
“뭐?”
아퀼라의 말대로, 정말로 하늘에서 내리던 눈이 멎어 있었다.
아마도 그동안 눈이 내리던 것도 이장이 얼음 폭죽을 어떤 방법으로 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아티팩트의 사용법이 뭔지는 돌아가서 연구해 봐야겠지만.
“이 이장은 체포해서 함께 가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윈터의 말에 대답하며 나는 아퀼라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평소의 아퀼라라면 이 순간 윈터가 나를 구해 준 것에 대해 질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너무나도 무덤덤해 보였다.
“왜, 사루비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기에, 내가 은근슬쩍 물었다.
“상관없어?”
“뭐를?”
“윈터 님이 나를 구해주신 게.”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눈을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 걸로 질투하지는 않아. 너를 구해 줬으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퀼라는 나를 상당히 배려해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질투 날 만한 상황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런데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그걸 스스로 해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추위 이겨 내기’가 아니었다. 최근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오늘의 내가 해야 할 일, ‘남주들의 관계 정리하기’.
저번에 임무를 함께했던 마을에서 윈터에게 한번 가볍게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우리는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진솔한 대화를 나눠야 할 날이 바로 오늘인가 보다. 더 이상 어색할 것 같다는 이유로 피해서는 안 되겠지.
나는 타로술사의 예언이 맞아떨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예, 미래에는 당신이 그들을 다루는 법에 익숙해질 거라는 뜻이지요. 즉 고객님은 스스로 정답을 찾아낼 거라는 뜻이랍니다!”
결국에 나는 정답을 찾아냈다. 정답은 바로….
“윈터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윈터가 짐작했다는 듯 나를 따라 이장의 집에 있던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우선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하기로 했다.
“오늘 구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윈터가 나를 구해 준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고스트그룸에게 먹혔을 때도, 흑마술사의 함정에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리고 오늘도.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윈터에게 감사함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게 바로 내가 그동안 윈터와 확실히 선을 긋지 못했던 이유이다.
물론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차례지만.
“저는 윈터 님께 감사한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윈터 님은 제가 가장 신뢰하는 선임이기도 합니다.”
윈터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딱 신뢰하고 존경하는 선임, 그 정도인 것 같습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가, 윈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그렇듯 차가워 보여서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미묘하게 떨리는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신경 쓸 일 없도록 하지.”
깔끔하게 대답한 그가 덧붙여 말했다.
“사루비아, 저번에 감정이 격화되는 마을에 갔을 때 네가 나에게 요즘 통제를 잃은 것 같다고 말했었지.”
“예.”
“사실 그때의 나는 마을 밖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 늘 감정을 참기가 어려웠으니까.”
“…….”
적어도 그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다는 것은 알 것 같아서 나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인내심이 매우 뛰어난 편이라 자부할 수 있었지만, 네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인내심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내가 노력했을 때 원하는 무언가를 얻지 못한 척은 처음이니까, 그 감정이 생소했어. 하지만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해서 더 분발할 필요가 있겠지.”
나 또한 나를 몇 번이고 구해 줬던 고마운 선배인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깨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윈터 님의 존재마저 부담스러웠던 건 아닙니다. 저한테는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 중 한 분이십니다.”
“안다. 나도 국경방위군에서 함께했던 시간을 잊지는 않아. 그리고….”
이제는 완연히 안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윈터가 응답했다.
“…혹시 아퀼라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말하도록. 어떤 방식이든 네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에서 나는 나에 대한 윈터의 진심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다치지 않길 바란다는 그의 말만큼은 진짜였다.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훈훈한 대화가 오가고, 내가 따뜻한 눈으로 윈터를 보고 있던 그때.
“사루비아?”
이시나가 그답지 않게 문을 벌컥 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이시나 님?”
“아, 여기 있었구나. 난 또 네가 어디서 사고를 치고 있나 했지.”
“아닙니다!”
이시나의 뒤를 따라 나가며, 나는 윈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윈터 또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우리 사이에 이전과는 다른 감정의 끈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한편, 윈터에 대한 내 감정을 깨닫는 것뿐 아니라 오늘 내가 얻게 된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혁명에 대한 다짐이었다!
‘역시 혁명은 꼭 필요해.’
제국의 기득권은 흑마술사를 등에 업고 약자들을 수탈하고 있었다. 결국 흑마술사는 기득권의 편인 것이다.
이 제국에는 문제가 많았다. 제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희생되는 아르콘은 물론이고 제국민들조차도 황권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라를 바꿀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아마도….
‘역시 흑마술사의 도움이 필요해.’
비록 흑마술이 불건전한 목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흑마술 자체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임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만일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우리에게 협력할 수 있는 흑마술사의 힘이 있다면 그를 빌려야겠다.
자, 이제 내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시간이다.
* * *
“흑마술사를 저희의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의 대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는 선언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모든 대원들이 미쳤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지금까지 흑마술사에게 당한 게 얼마인데!”
“흑마술사는 2황자군의 편이잖아!”
“흑마술 수색 특수군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도, 나는 꿋꿋하게 서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던 아퀼라가 내 어깨 위에 자신의 팔을 올리고 나를 더욱 강하게 붙들었다. 나는 그 온기에 조금 위안을 느꼈다.
그때 윈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그만하십시오. 우선 끝까지 말을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는 묘한 위력이 있어서, 한참 시끄럽게 굴던 부대원들도 입을 닫았다. 나는 윈터에게 고맙다는 신호를 보낸 후 입을 열었다.
“…따져보면 흑마술 자체가 나쁜 힘은 아니지 않습니까. 흑마술사 중 나쁜 놈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일단 흑마술이라는 힘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저희가 이용할 수만 있다면 상당히 유용한 힘입니다.”
다행히 이 말에는 반박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 만일 그 어떤 세력에도 속하지 않았고 범죄를 저지른 이력이 없는 흑마술사가 있다면, 저희의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큰 전력이 될 겁니다.”
“글쎄….”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내놓은 건 루이즈였다.
“하지만 흑마술사는 예측 불가능하지. 그들은 규율을 지키지 않고 살아온 존재들이라, 어디로 튈지 몰라. 우리를 돕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기 전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한 명 정도라면 저희가 잘 통제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자유를 주지 않고 저희도 늘 감시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루이즈를 회유한 건 이시나였다!
나는 이시나에게도 고개를 가볍게 꾸벅 숙였다.
“하지만 어떻게 통제할 수 있지?”
이번에는 플라토가 그렇게 물었고.
“주어진 원칙에 따라 사람을 다루는 건 자신 있는 일입니다.”
윈터가 대신 답했다. 순간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국경방위군 시절엔 짬이 모자라 나를 돕지 못하던 남주들이 이제 이렇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가 되었구나….
‘전원 남주력 +100….’
마지막은 논쟁을 촉발한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아, 나는 한 발자국 다시 앞으로 나섰다.
“어쨌든 흑마술사의 능력이 저희에게 필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흑마술은 지금까지 제국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오며 그 능력을 이미 증명했습니다. 한편 저희의 힘만으로는 제국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니, 분명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긴 합니다. 저는 그 대상으로 흑마술사를 추천합니다.”
그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방금 한 말대로, 우리의 힘은 황실에 대항하기에는 아직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정치적 권력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 사회적 위신과 명예가 높은 것도 아니고 큰 부를 축적한 집단도 아니다.
그나마 우리의 강점이라면 무력인데, 제국은 수십만 명의 군사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우리의 무력만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흑마술사의 힘을 이용하여 우리의 강점인 무력을 극대화시킨다면, 괜찮은 전략을 세울 경우 황실과 대항해 볼 만도 하다.
내 의견 표명을 끝까지 들은 후 부대원들은 모두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잠시 뒤,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바로 레온이었다.
“무력, 중요하지.”
“맞아, 무력은 중요하지.”
레온과 함께 ‘폭력과 공포’를 숭상하던 브레이브가 맞장구쳤고, 다른 선임들도 하나둘씩 긍정의 의사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루비아의 말이 맞아. 아직 우리의 힘은 부족해.”
“흑마술사를 이용한다면 황실에 은밀하게 잠입할 수 있을지도…. 우리가 싸울 병사들의 수를 줄이는 거지.”
“다른 흑마술사들을 더 소개받는다면, 큰 전력이 될 거다.”
그렇게 한참의 의논 끝에, 마침내 우리는 합의에 도달했다.
“믿을 수 있는 흑마술사가 있다면, 그들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