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10화 (184/233)

* * *

“이시나 님, 이번에는 이쪽… 아!”

이시나와 함께 길을 걷던 나는 옆을 보지 못하다가 실수로 누군가와 부딪쳤다.

물론 나는 잽싸게 몸에 힘을 주고 중심을 잡았으므로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지만, 나와 부딪힌 남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안 돼!”

남자가 뒤로 넘어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나는 기겁했다. 군인이 민간인을 다치게 하면 절대로 좋은 결과가 일어날 리 없단 말이다!

‘안 돼, 깽값!’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팔을 쭉 뻗어 남자를 붙드는 데 성공했고.

“헉…!”

드라마 속 남주와 같은 자세로 남자를 내 품으로 휘익 끌어당겼다.

그때 갑자기 남자의 눈이 이상한 모양으로 돌변했다.

‘저, 저건 분명….’

이상하다, 저건 만화적 허용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 거지?

그래, 내 앞에 있는 남자의 눈이 하트 모양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었다!

“하, 하하, 죄송하고 그럼 가던 길 잘 가세요….”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나는 이시나와 함께 얼른 자리에서 내빼려 했지만.

“이게 사랑일까요?”

이미 남자는 멍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니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네, 확실히 아닙니다. 이시나 님, 얼른 가시….”

“아하! 이건 사랑인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니라니까!”

“첫눈에 반했습니다! 사랑합니다! 결혼해 주십시오!”

젠장! 이딴 전개라니!

‘이렇게 된 이유는 역시 흑마술 때문이겠지.’

평소라면 그냥 ‘와우, 설레는군.’ 이러고 지나갈 상황이었을 텐데.

아까 보는 눈도 개의치 않고 서로를 사랑한다고 외쳐 대던 커플들을 떠올려 보면, 이 남자가 이러는 이유도 흑마술의 영향 때문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내 얼굴은 무척 예쁘며 사랑스럽다. 내 얼굴이지만 나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내가 로판 여주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이 남자는 더더욱 나에게 개연성도 없이 갑작스럽게 반해버린 거겠지.

나는 “초면에 이러지 마세요!” 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이시나의 반응이 더 빨랐다.

“지금 애한테 뭐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표정이 딱딱하게 돌변한 이시나를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루비아, 이리 와.”

이시나가 평소에 내게 보여준 적 없는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나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럴 일 없으니까 애한테 말 걸지 마십시오.”

“당신은 뭐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이시나 님, 그냥 제가 가서 깨부수고 오겠습니다.”

내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이시나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는 몸을 움찔했지만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저런 놈들과는 말만 섞어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한다고.”

“그냥 오해는 하게 두고, 제가 주먹으로 잘….”

“내가 저런 별 볼 일 없는 놈한테 보내려고 그렇게 내버려 둔 줄 알아? 차라리 내가 낫지, 절대 안 돼!”

‘안 돼, 나와버렸다….’

그의 ‘차라리 내가 낫지.’라는 대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옛날에 이시나가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네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데리고 왔으면 내가 진즉에 뜯어말렸어. 그리고 차라리 내가 데리고 살았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그 대사를 듣고 우리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데. 이 타이밍에 변주된 대사가 또다시 나오다니! 젠장!

‘왠지 여기서 끝이 아닐 것 같아.’

내가 지금 이시나의 상태에 대해 열심히 충격받고 있던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루비아, 저건 누구야?”

…젠장.

난 울 듯이 웃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응, 아퀼라….”

그리고 내 뒤에 선 아퀼라와 윈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역시 우리 쪽으로 지원 나왔구나. 게다가 방금 그 황당한 광경을 다 봤고. 이제 이놈들이 다시 나를 피곤하게 만들겠구나….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역시나 아퀼라가 사나운 얼굴이 되어 남자에게 말했다.

“얘는 저랑 결혼하기로 했으니 이만 가시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목소리에 담겨 있는 분노를 채 숨길 수가 없었다.

한편 윈터도 침묵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계속 지그시 쏘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의 냉랭한 태도에 남자는 잠시 동공이 흔들렸지만 이내 굴하지 않겠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제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퀼라가 남자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가더니 위협적으로 읊조렸다.

“글쎄…. 감히 네가 지금 누굴 사랑한다는 거지?”

XX, 이놈의 흑마술! 이딴 흑마술을 쓴 놈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내가 반드시 감옥에 처넣고 말 것이다!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야, 꼴값 좀 떨지 마, XX들아!”

“…….”

“아니, 내가 알아서 잘 대처할 텐데 왜 아무 때나 끼어드는 거야?! 아주 꼴값을 떤다, 꼴값을!”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험한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선임인 윈터조차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양심이 있다면 그래야지.

내가 분노에 차 씩씩대며 노발대발하자 낯선 남자는 “히익…! 저, 저럴 수가!”라고 외치더니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되어 도망쳐 버렸다.

물론 그동안 아퀼라와 윈터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 있었고 말이다.

곧 이시나의 만류 하에 조금 진정하고 난 뒤, 나는 깨달았다.

이제 진짜로 저 인간들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기 전에, 빠른 시일 내에 저 인간들의 다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점을.

* * *

내가 진정된 것처럼 보이자, 이시나 또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한눈에 봐도 이 쪼그마한 애한테 어떻게 청혼을 할 수 있지? 양심이 없는 놈이 아니고서야….”

나는 객관적으로 여자들 중에서도 별로 작은 편이 아닌데. 이시나의 눈에 필터가 씌워져 있는 건 아닌가? 양심이 찔려온다.

물론 그 와중에 아퀼라는 이시나의 말을 듣고 좀 할복하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했다. 저 자식도 양심이 찔리기는 한가 보다.

그러나 내가 이제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이시나에게 눈을 부라리니, 다행히 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남주들 중 가장 눈치가 있는 자다웠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뒤 우리는 원래 우리가 해야 하던 일을 마저 하기로 했다.

“마을 단위의 흑마술 피해니 위험도가 높은 임무로 분류가 되어서, 루이즈 님이 추가로 우리를 보내셨다.”

루이즈 님, 그렇게 눈치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사루비아, 그래서 좀 발견한 건 있어?”

“으응, 아직.”

내 답에 아퀼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제부터 찾아보면 되겠다.”

그렇지만 솔직히 그는 임무보다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에 더 만족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다들 이 마을에 들어와서 폭력성이 강화되는 느낌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아퀼라와 윈터 또한 흑마술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내가 그렇게 묻자, 윈터가 먼저 대답했다.

“흑마술의 영향을 받는 건 흑마술 수색 특수군다운 일이지. 난 흑마술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매일 마음을 단련한다. 아, 혹시 원한다면 함께 명상을….”

“아하, 이해했습니다!”

음, 역시 남주는 명상까지도 잘해야 하는 거군.

“나는 방금 좀 화가 나긴 했는데, 흑마술의 영향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원래 화가 나서 화가 난 건지 모르겠어.”

“응, 아마 후자일 거야….”

나는 아퀼라를 보며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아하, 그래서 다들 흑마술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거구나….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그때, 이시나가 끼어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사랑은 어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분노 같은 감정 말고, 사랑의 감정이 증폭되지는 않았냐는 거야.”

이시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난 지금 정상은 아닌 것 같아서.”

이시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런 대사를 쳐서 또 장르를 치정극으로 몰고 가다니!

한편 아퀼라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답했다.

“듣고 보니 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역시 그렇구나.”

“예, 평소에는 심장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다면,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심장도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 대체 왜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거야?”

이시나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지만, 나는 아퀼라의 말을 듣고 뺨을 붉혔다. 어쩜 저렇게 로맨틱할 수가.

한편 윈터 또한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 어쩐지 평소처럼 사랑의 감정을 통제하기가 힘들다 했더니, 감정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었군.”

아니, 평소에도 통제를 잘하는 편은 아닌데요….

나는 그의 말에 무어라 다시 태클을 걸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아까 짜증을 냄으로써 한동안 조용했는데, 이시나가 다시 불을 붙여 버린 것이다. 나는 윈터 쪽으로 스윽 다가갔다.

“윈터 님.”

“그래.”

“제가 보기에는 요즘 윈터 님이 감정 통제를 잘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최근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윈터 님답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그랬다고?”

“예, 그러니까 앞으로는 평상시 통제에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윈터는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인내심을 잃었다니…. 알았다. 노력해 보도록 하겠어. ”

“예, 그러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자신의 능력을 고양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니까. 인내심을 더 길러보겠다.”

…그런 이유로 인내심을 기른다고?

하여튼, 나는 윈터와의 대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다툼이 좀 일단락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는 원래 있던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자리로 돌아오자, 아퀼라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마 내가 윈터와 나눈 대화를 들었을 테니까.

“사루비아.”

“응.”

“…아니, 그냥 사랑한다고.”

“뭐야? 싱겁게.”

사실 아퀼라가 어떤 속내로 저런 말을 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내가 윈터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만큼 아퀼라를 사랑한다는 뜻과도 같으니까, 음.

그렇게 우리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을 때, 때마침 침묵을 깨고 이시나가 지금까지 우리가 찾았던 것에 대해 간단하게 요약했다.

“아무래도 마법진 종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딜 봐도 마법진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아티팩트 종류겠군. 아티팩트 종류라면 보통 유물이나 보석, 책이지. 혹시 이 마을에 수상한 점이나 수상한 사람은 없었나?”

“네, 없었습… 잠깐.”

윈터의 말에 대답하려던 내가, ‘수상한 사람’이라는 말에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말을 멈췄다.

이 마을은 수도 밖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이고, 외딴 곳에 있기 때문에 외지인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아까 그 커플들은 뭐라고 말했더라?

“마침 이 마을에 외지인들이 왔길래 바깥 소식을 좀 들었어! 내가 떠나기 좋은 마을을 알아뒀어!”

대체 이 마을에 외지인들이 올 이유가 뭐가 있지?

“이시나 님, 마을에 온 외지인들을 조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이 마을은 흑마술로 인한 이상 현상 때문에 통제가 내려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외지인? …아! 아까 그 커플들…. 잠깐, 혹시….”

이시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추론을 내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수상한 외지 사람이라면 이 일을 벌인 흑마술사일 수도 있어!”

“그럼 그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위치에 대해 묻기 위해서는 커플들을 먼저 찾아내야 할 거고.”

대화를 나누면서 무언가를 깨달은 우리는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커플들을 그대로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