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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9화 (183/233)

“사루비아.”

“예.”

윈터의 목소리였기에 난 존댓말로 답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리에 우뚝 선 윈터가 내게로 뭔가를 내밀었다.

“윈터 님, 이게 뭡니까?”

그에게서 주머니 하나를 받으며 내가 묻자, 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용돈이다.”

“…예?”

“원래 선임이 후임에게 용돈을 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

…물론 옆에서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시나를 보면 전혀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 나는 그의 말을 수긍하기로 했다. 그래, 준다는데 안 받는 것도 이상하지. 역시 건물주야.

“오늘은 네 첫 출근이니 식사라도 든든히 하라는 의미로 주는 거다.”

“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 뒤 윈터는 왠지 엄청나게 불길한 떡밥같이 느껴지는 말을 던졌다.

“간혹 급한 임무면 여러 팀이 지원을 나가기도 하니, 중간에 만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알아 두도록.”

“예, 예….”

뭐지? 이거 누가 봐도 떡밥인데?

왠지 이시나와 함께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위험에 처한 여주인공 포지션이 되고, 아퀼라와 윈터가 날 구하러 오기라도 할 것 같은 불길한 감각이 느껴진다.

“하, 하하. 잘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그렇게 인사했지만, 윈터가 남긴 말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윈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나는 옆에 있던 이시나를 돌아보았다.

“이시나 님, 오늘의 임무는 뭡니까?”

“오늘은, 보자….”

이시나는 위로부터 전달받은 종이를 펼쳤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에서는 흑마술의 영향이라고 추측되는 것들을 처리하는 일을 하는데, 제국 곳곳에서 제보를 보내면 그것이 흑마술 수색 특수군 앞으로 도착하는 방식이었다. 윗선에서는 그 일들을 잘 분류해서 우리에게 내려 주었다.

‘현장 임무를 안 나가는 위치가 되면 편할 텐데.’

물론 그 일을 직접 분류하는 위치가 되려면 앞으로 짬을 많이 먹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일은 저주받은 땅을 축성하는 거라는데?”

“예? 저희가 어떻게 땅을 축성합니까?”

이젠 우리가 사제 노릇도 해야 하는 건가? 내 인생에 오컬트물도 추가되는 건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이시나는 그게 아니라며 손을 저어 보였다.

“축성은 그냥 비유적 표현이고. 흑마술에 의해 오염된 땅이 있는데, 흑마술을 깨뜨려서 해당 땅을 정화하라는 내용이야.”

“흑마술에 의해 어떻게 땅이 오염된 겁니까?”

“여기 들어온 제보에 의하면….”

그는 내가 생각해 보지도 못한 방식의 흑마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점점 격해지면서 마을 내에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고 해. 사람들이 점점 거칠어지고 직설적으로 변하면서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고.”

“그게 확실히 흑마술 때문인 겁니까?”

“응, 마침 우리가 얼마 전에 해당 마을에서 흑마술사 한 명을 체포했거든. 혹시 아직 파괴되지 않은 흑마술이 남아 있다면 마을 주민들이 그 영향을 계속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해. 흑마술사의 집에 걸린 흑마술은 이미 파괴했으니 마을 전체에 흑마술이 걸려 있을 가능성이 높고.”

“아하, 이해했습니다.”

국경방위군에 있던 시절 간혹 맡던 임무와 별다를 게 없었기에 나는 금방 이 일에 적응할 수 있었다.

수색군 입단 후 흑마술에 관한 기초 교육을 받았으니까. 마을 땅에 흑마술이 걸려 있을 때 어떻게 파괴해야 할지도 대략 짐작이 갔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보받은 마을을 향해 출발하려 했을 때, 내 어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루비아.”

“엄마야!”

그 높이에서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에이프릴밖에 없었기에 나는 황급히 뒤돌아섰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아, 별 건 아니고. 이번 일이 네 첫 임무니까.”

에이프릴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방긋 웃었다.

“그냥, 앞으로의 네 임무에 도움이 되는 말을 좀 해 주려고 했지?”

“예,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직접 새겨줄까?”

“그, 비유적 표현이었는데….”

내가 겁에 질려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니 에이프릴이 장난이었다는 듯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호호, 농담이었단다. 뭐, 내가 하려던 말은….”

그 순간, 먼 옛날 어느 순간에 그러했듯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가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뭘 하려고 하는지 끝까지 생각해. 네가 무슨 이유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늘 고민하도록 해.”

“예?”

무슨 말인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아서 난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그건 무슨 뜻이십니까?”

“흐음…. 사루비아, 비록 우리가 외부의 눈을 속이기 위해 평범하게 흑마술 수색 임무를 하고 있다지만, 현재 우리의 목적은 뭐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것…. 아, 아니, 혁명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 목적은 그거라는 걸 늘 잊지 마.”

그녀가 가벼운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이건 네 인생에도 적용되는 말이야. 너는 영리한 애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그걸 스스로 해내.”

아무래도 주체적으로 내 삶의 목적을 위해 행동하라는 이야기 같은데. 그런데 갑자기 내 인생 이야기는 왜 하는지 몰라, 내가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제 인생에 관한 조언은 갑자기 왜 해 주시는 겁니까? 불만이 있는 건 아니고, 조심스럽게 여쭈어봅니다….”

“으음, 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요즘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말에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에이프릴의 말대로 요즘 나에겐 고민이 있었다.

‘남주들의 기싸움 때문이지….’

굳이 거기 끼어들고 싶지 않아 아퀼라와 윈터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으면 행복회로를 돌리거나 이시나의 뒤에 가서 숨어 있곤 했는데.

나는 조금 전 용돈을 건네던 윈터의 진지한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직접 나서야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난 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에이프릴 님.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돼야지, 호호호!”

“…그,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꼭 미친 사람처럼 웃기에,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얼른 이시나를 데리고 본부를 빠져나왔다.

일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지금은 일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한참을 이동했다.

“이곳입니까?”

“응, 그래….”

눈앞에 있는 마을 풍경을 보며 이시나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마을을 누가 보더라도 흑마술이 걸려 있는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낮인데도 안개가 껴 있었고, 해가 잘 비치지 않아 어둑했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서 저절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이건 흑마술인 걸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마을 사람들이 신고한 이유를 알겠네.”

이시나와 대화를 나누며 마을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문득 우리도 위험에 빠질 수 있지 않은가 싶어 발걸음을 멈췄다.

“이시나 님, 혹시 마을 전체에 흑마술이 발동하고 있는 거라면 저희도 흑마술에 당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갑자기 성질이 거칠어져서 저희끼리 막 싸운다든가….”

“음.”

이시나가 고민하는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흑마술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내가 너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동안 그렇게 참고 또 참았는데 고작 흑마술 따위가 영향을 줄 수 있을 리 없지.”

“예?”

“그리고 너도 지금 거기서 더 거칠어질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예?”

“아냐, 그냥 괜찮을 것 같다고, 하하.”

뭔가 방금 이시나가 대놓고 내 욕을 한 기분인데. 하지만 선임인 그가 괜찮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마침내 마을의 경계 너머로 들어간 순간, 나는 이상한 기분이 곧장 내 안에서 싹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 안에 있는 어지러운 것들을 그대로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그런 충동적인 느낌. 그것들을 밖으로 당장 쏟아내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아….”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이었다. 주로 패티매티달린을 앞에 두고 있으면 느끼는 바로 그 감정.

“아오, XX 빡치네!”

“…사루비아, 뭐라고?”

“헉,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이시나의 제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임 앞에서 이렇게 욕을 하다니, 이건 내 실책이다.

“정말로 감정이 통제가 안 됩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표출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가 흑마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시나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뭐라 하는 대신 이상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아냐, 난 평소의 너랑 너무 똑같아서 좀 놀랐을 뿐이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예? 그나저나 이시나 님은 괜찮으십니까?”

“응, 묘한 분노 같은 감정이 느껴지긴 하는데, 난 늘 답답한 상태니까 이 정도 답답함이야 이겨낼 수 있지, 하하.”

“…….”

왠지 여기 와서 계속 이시나에게 한 방 먹는 기분이다.

하여튼 우리는 이 흑마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으니, 계속해서 마을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마을 전체에 흑마술이 걸려 있다면, 추정되는 건 두 가지 경우이다.

첫째, 마을 전체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경우. 이때의 마법진은 엄청나게 커서 오히려 모양을 파악하기 힘들므로, 바닥과 건물의 벽 등을 잘 관찰하며 걸어야 했다.

둘째, 마을 어딘가에 아티팩트가 놓여 있는 경우. 마을 전체에 흑마술을 퍼뜨릴 수 있는 아티팩트라면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혹은 화려한 물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경우를 염두에 두고 마을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저 너머에 마을 주민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시나 님, 저기 마을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한번 가 보자.”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모습이 더욱 잘 드러났다. 젊은 남자와 여자 한 명이 얼굴을 맞대고 서 있는데,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할 듯 그들 사이의 기세는 흉흉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아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니까!”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걸 어떡해!”

“사랑의 도피를 하자니까!!”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고!! 난 효를 아는 여자란 말이야!!”

“하지만 사랑한다고!!”

“나도!!”

그들의 대화를 들은 내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저거 싸우는 겁니까?”

“음, 그 마술의 영향을 받으면 지나치게 솔직해진다고도 하는데, 정말 솔직한 사람들이네.”

그들은 우리가 옆에서 구경하든 말든 완전히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 그만 싸우자!”

“그래!”

“그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자!”

“어머, 너무 로맨틱해!”

“마침 이 마을에 외지인들이 왔길래 바깥소식을 좀 들었어! 내가 떠나기 좋은 마을을 알아뒀어!”

“우리 그렇다면 지금 당장 떠나자!”

“그래!”

그러고서 그들은 갑자기 손을 맞잡더니 함께 어딘가로 떠나 버렸다….

그들에게서 뭔가 단서를 찾을 순 없을 것 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정말 미친놈들이 세상에는 많구나.’

그러나 나 또한 그런 미친놈을 곧바로 겪게 되리란 것을,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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