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왜요? 제가 로판 여주로 보이시나요?
내가 아르콘 계약 마법의 진실을 알린 이후로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긴 했는데,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재입대를 하게 됐다.
…너무 많이 요약해 버렸군. 그렇다면 처음부터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선 내 이야기를 듣고 옛 선임들은 몹시 분개했다. 당장이라도 나를 끌고 혁명을 하러 갈 기세였다.
“제발, 이, 일주일만 있다가 입대하면 안 되는 건가요? 제발!”
나는 처절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지만,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내 의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퀼라와 함께 흑마술 수색 특수군의 부대 건물에 도착해 있던 것이었다.
“하, 하하….”
흑마술 수색 특수군의 건물은 작았다. 여기 오기 전 듣던 대로 국가에서 제대로 된 체제를 갖춰 운영하는 군대라기보다는 거의 민간단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내, 내가 재입대라니….”
에이프릴이 우리를 위해 친히 입대 서류를 찾고 있는 걸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옆에 서 있던 아퀼라의 손을 힘을 주어 꽉 붙잡으니, 그 또한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재입대를 하게 됐지만 난 사루비아 너를 사랑해….”
“와, 참사랑이다….”
나는 이로써 다시 한번 나에 대한 아퀼라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를 따라 재입대를 하다니,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
한편 나는 우리의 뒤에 서 있던 익숙한 인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시나 님….”
그는 우리를 따라 이곳에 끌려와 있는 상태였다.
“저 때문에 재입대를 하게 되다니, 정말 죄송하….”
“사루비아….”
어쩐지 이시나가 아련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이미 재입대를 했어….”
“…네?”
“네가 제대하면 여기로 오겠다고 했잖아. 너를 함부로 사회에 방생할 수는 없으니 미리 재입대를 해 뒀지….”
“네?!”
도대체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러나 옆에서 에이프릴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시나의 말을 확정 지어 주었다.
“맞아, 사루비아. 이시나는 이미 삼 개월 전 재입대를 했단다.”
…이거 정말 미친놈 아니냐?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미친놈들이 많은 거지?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나는 아까부터 내 쪽을 관찰하는 듯하던 윈터와 눈이 마주쳤다.
“윈터 님, 그런데 윈터 님은 왜 재입대를….”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야 하니까.”
“아하….”
역시 늘 원칙을 중시하는 윈터다운 대답이었다. 정도를 추구하느라 재입대마저 꺼리지 않는 모습!
나는 윈터의 말에 크게 감명받아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그의 뒤에 서 있던 알타이르가 내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를 가리킨 뒤 자신의 머리 옆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려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 신호를 알아듣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아하, 나한테 미쳤다는 거구나!’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 세 명의 원작 남주들은 모두 나 때문에 재입대를 했다는 거지?
역시 원작 제목인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는 참 잘 지어진 제목이다. 그들은 ‘미친놈’이 맞다.
“어휴, 왜 이렇게 내 주위에는 미친 사람들이 많은 거지…. 재입대 같은 걸 하다니….”
“사루비아, 그런데 제일 먼저 재입대를 결정한 건 아마도 너야.”
이시나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음, 설마 내가 이 원작 남주들보다 더 미친놈일 리는 없지.
“사루비아.”
“네?!”
그때 에이프릴이 내 이름을 불렀기에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손에는 이제 두 장의 종이가 팔랑거리며 들려 있었다.
“자, 입대 서류야. 여기 서명하면 돼.”
“…혹시 이 서류도 서명하면 계약 마법이 그려지고 탈영하면 죽게 되는 그런 겁니까?”
“아니, 그냥 평범한 입대 서류인데. 탈영하면 처벌을 받게 되긴 하겠지만 네 머리통이 날아가지는 않아.”
그 말에 내 눈에 감동이 깃들었다. 나는 환한 얼굴로 아퀼라와 말을 주고받았다.
“와, 탈영해도 머리통이 날아가지 않는다니. 확실히 여기는 선진 병영인 것 같아.”
“그러게, 흑마술 수색 특수군은 참 좋은 곳인 것 같아.”
“호호, 맞아, 얘들아. 그러니까 얼른 서명해.”
나는 아퀼라와 함께 서류 위에 각자의 이름을 적었고….
‘…그런데 원래 탈영하면 머리통이 날아가는 게 비정상 아닌가?’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XX.
결국 나와 아퀼라는 재입대를 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일이다.
* * *
아퀼라와 내가 허망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을 때, 에이프릴은 기쁜 얼굴로 우리를 이끌고 흑마술 수색 특수군에 대해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 주었다.
“자, 먼저 여기는 출퇴근 식이야.”
“와아….”
“훈련 같은 것도 없어. 근무만 하면 돼.”
“와아….”
“그리고 간단한 교육만 이수하면 소위 계급부터 시작할 수 있어. 왜냐하면 너희는 이미 팔 년의 군 근무를 마쳤으니까.”
“와아….”
그건 좀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내가 소대장과 같은 계급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군복에 달린 계급을 살펴보았다. 이시나는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소위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윈터와 알타이르, 유리도 소위 계급을 달고 있었으니까.
반면 그들보다 짬을 더 먹은 에이프릴은 중위 계급을 달고 있었다.
그랬구나, 역시 그녀는 나보다 언제나 계급이 더 높은 거구나….
“어때, 정말 좋은 곳 아니니?”
“예, 참 좋은 곳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많았지만, 몇 주 동안의 자유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에이프릴의 후임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때 에이프릴이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린 틈을 타 가까이 다가온 유리가 우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 보급품 XX 안 나와. 그냥 전부 너희 돈으로 사야 돼.”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네가 소위가 되든 중위가 되든 별 의미는 없어. 어차피 여기는 발령받는 병사들이 없거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긴장 어린 눈으로 유리를 쳐다봤는데, 그녀는 안타까운 것을 보듯 연민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아르콘들은 국경방위군으로 가고, 제국민들은 입대하더라도 보통 다른 곳에 지원하지. 여기는 애초에 국가가 보여 주기식으로 만들어 놨던 허울뿐인 부대라고.”
“그 말씀은….”
“국가는 오히려 우리의 입대에 더 놀라고 있을걸. 아무도 입대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았던 곳이니까. 그러니까 네 아래로 병사들은 영영 없을 거라는 소리야.”
…잠깐만, 그 말은 설마….
“제가 다시 막내라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그렇게 됐다.”
결국 나는 머리를 감싸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XX! 분명 몇 주 전까지는 최고참이었는데, 막내 신세가 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물론 여기서는 귀찮게 빨래를 하거나 잡일을 할 필요도 없을 거고, 이 인간들과 24시간 붙어 있는 게 아니니 훨씬 자유롭긴 하지만!
그래도 막내라는 건 언제나 그렇듯 끔찍한 기분이었다!
‘잠깐, 아직 끝이 아니야.’
내가 막내를 탈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카론, 얼마 뒤에 보자, 후후후.”
“어휴, 저 미친X.”
카론에게는 미안하지만, 제대한 그를 역시 이쪽으로 끌고 오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 *
그다음으로 우리는 군복을 신청했다.
우리 사이즈에 맞는 군복이 제작되어 오기까지는 며칠이 소요된다고 했는데, 이곳의 군복은 이전에 입던 것보다 훨씬 멋진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흰색 셔츠 위에는 금장 단추와 장식이 되어 있는 흰색 자켓을 입었고, 바지 또한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어 멋져 보였다. 무엇보다도 흰색의 긴 케이프가 달려 있어 상당히 간지나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내 가오와 남주들의 가오 모두가 살 수 있는 옷이었다.
‘물론 활동하기에 그리 편할 것 같지는 않지만.’
도대체 왜 이 세계에서는 왜 자꾸 군인들에게 불편한 옷을 입히는 거지? 이 세계가 로판 속이라는 증거 중 하나인 걸까?
나는 부대 안 건물에 걸려 있는 군복 한 벌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옷은 누가 디자인했을지 궁금해졌다. 명목상으로 대략 만든 부대인데, 군복은 또 잘 디자인되어 있다니.
내가 유심히 군복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방 안으로 누가 들어오며 말했다.
“그건 내가 디자인했다.”
“누구… 앗!”
그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해 눈을 가늘게 떴던 나는, 그의 긴 초록색 머리카락으로부터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입을 벌렸다.
“루이즈 님!”
그는 예전에 내가 훈련병이던 시절 검을 가르쳐 주었던 상등병, 루이즈였다!
‘게다가 무려 에이프릴의 맞후임이기도 했지.’
그 사실이 인상 깊어서 내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던 선임이었지. 그는 에이프릴과 별 탈 없이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임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 시절과 비슷하게 차분한 얼굴에 긴 녹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엘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옷을 디자인했다고?
“왜 루이즈 님이 이 옷을 만드신 겁니까?”
“원래는 군복이 없었거든.”
그가 테이블에 대충 기대서며 말했다.
“매일 군복을 입었는데 앞으로 사복을 고르라고 하면 귀찮잖아. 어차피 지원금도 나오길래 디자인했다.”
역시, 뼛속까지 박혀 있는 군인 정신. …그런데 사실 나도 옷을 고르는 일이 귀찮긴 했다. 젠장, 국경방위군이 나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오, 루이즈 님께 그런 능력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일어, 나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루이즈에게 물었다.
“그, 루이즈 님은 어쩌다가 여기….”
“…그건 내 맞선임이….”
“아하, 이해했습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잠시 침울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에이프릴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왔구나….
왠지 루이즈만 여기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에이프릴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전부 여기로 끌려온 게 아닐까?
“여기는 또 어떤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루이즈에게 그렇게 물으니, 그는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우선 플라토가 있고….”
플라토, 그는 꽤 공명정대한 데다가 선임들 중 드물게 정상적인 사람이었지.
“타로 님이 계시고….”
“…예?”
세상에, 타로는 누구보다도 군 생활에 의욕이 없었는데? 그는 매사를 대단히 귀찮아하는 남자였다! 게다가 그는 분명 에이프릴과 연도 없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끌려온 거지?
‘불쌍한 타로…. 제대한 뒤에는 행복하게 살라고 빌어 주기까지 했는데….’
아무래도 그는 정말로 굿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인생에 무슨 마가 낀 게 틀림없다.
“그리고 레온과 브레이브가 있지.”
그들은 내 선임들 중 폭력과 공포의 대명사였던 사람이었다! 그 이름을 듣고 나는 잠시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전부 이곳으로 끌려와 있다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인성 파탄 85기라든가.
“혹시 블레어와 토피오 님은 여기 없습니까?”
“아, 안 그래도 에이프릴 님이 영입하려고 하고 계시더라고. 뭐라고 했나, 뇌 없이 돌진하는 데 재능 있는 애들이라던가?”
역시, 그렇게 된 거였구나….
나는 왜 하필 에이프릴의 레이더에 걸린 걸까?
물론 나도 혁명이라는 목표를 위해 여기 합류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왜 에이프릴은 내가 입대한 처음부터 나를 눈여겨본 걸까?
내가 그 사실에 억울해하고 있던 그 순간, 일을 마친 듯한 에이프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이프릴 님.”
내가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삐죽 내밀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왜, 사루비아? 뭐 불만 있니?”
“아, 아니, 그게…. 전 그냥 왜 저를 영입하기로 하셨는지 궁금해서….”
그러자 에이프릴은 반기던 질문을 받았다는 것처럼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 사루비아…. 왠지 너를 보면 심장이 뛰더라.”
“예?”
“너를 자꾸만 내 근처에 두고 싶고, 우리 사이에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예, 예?”
뭐지? 내 인생의 장르가 또 바뀌는 건가? 그쪽 장르는 별로 읽어 보지 않은지라 좀 곤란한데.
“마치 우리가 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너를 내 아래에 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
“아, 예….”
그냥 사이코패스 같은 발언을 하려던 거구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