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침이 되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벌써 군대 밖에서 지낸 지 일주일째. 제대만 하면 하루 종일 늘어져서 잠자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대한 후, 나는 몇 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아퀼라, 잘 잤어?”
“응, 너도?”
아침 여섯 시, 지금 내 옆에는 나와 동시에 눈을 뜬 아퀼라가 누워 있었다.
그랬다. 우리의 생체 시계가 국경방위군에 맞춰진 탓에 아침 여섯 시만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졌던 것이었다. 8년 동안 익힌 습관은 결코 쉽게 깨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강제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식사 준비할까?”
“그래.”
우리는 가볍게 몸을 헹군 후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 부엌으로 향했다. 어제 열심히 청소한 집은 광을 내며 반짝반짝 빛났다.
이게 바로 두 번째 문제였다.
국경방위군에서 치약을 펑펑 써 가며 꼼꼼하게 청소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가정부를 고용한다 해도 그들의 청소는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저기, 혹시 이거 청소 다 끝나신 건가요?”
“예? 아, 사모님!”
“손가락으로 문질렀을 때 먼지가 나오는데….”
나는 가정부가 청소한 것을 볼 때마다 자꾸만 마룻바닥 틈의 먼지가 거슬렸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직접 청소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고,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부를 쓰지 않고 이렇게 직접 일을 하고 있었다.
아퀼라가 베이컨을 굽고 내가 계란 프라이를 굽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벌컥 연 난 예상치 못한 얼굴을 발견하고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윈터 님?”
냉랭한 얼굴의 윈터가 그 앞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가 집 근처에 살기는 했지만, 평소의 그라면 이렇게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윈터는 그런 내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들고 있던 바구니 같은 것을 내게 건넸다.
“자, 받도록.”
“이, 이게 뭡니까?”
나는 바구니 안에 든 것으로 시선을 옮겼고.
“단것…?”
요리를 위한 재료들과 함께 단 디저트 몇 개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윈터가 무슨 의도로 나한테 이걸 준…
건지는 당연히 알고 있지, 하하. 내가 눈치 없는 여주도 아니고.
그렇다면 내 호감을 사고자 이런 걸 건넸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뻘쭘하게 서 있을 때, 윈터는 혼자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시장에 갔다가, 새로 이사 온 이웃 생각이 나서.”
“아.”
그러니까 오늘 윈터는 ‘이웃’으로서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새로 이사 온 것도 축하할 기념.”
“예, 감사합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고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하자, 윈터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맞다, 사루비아.”
“예?”
“이 마을에 흉악 범죄를 저지른 강도 한 명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조심하도록.”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왜냐하면….
‘플래그 꽂지 말라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윈터는 내 인생에 플래그를 꽂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도록. 수색대가 찾고 있다고 하니 곧 잡힐 거다.”
“그런데 강도라면 밤에 갑자기 침입할 수도 있는 겁니까?”
명색이 강도인데 남들이 다 자는 밤중에 괴도처럼 들어오는 게 아닐까 싶어 내가 그렇게 묻자, 윈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 또한 걱정 말도록.”
어쩐지 믿음직스러운 어조로 그가 말했다.
“이 집의 보안은 튼튼할 테니까.”
짧은 대화를 마치고, 윈터는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나는 그가 건네준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인사를 건넸다.
“예, 사, 살펴 가세요!”
잠시 후, 그가 떠나고 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 안으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의도치 않게 플래그가 하나 꽂혔고, 윈터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거기다가….
옆에서 지켜보던 아퀼라의 눈에는 분명히 질투의 빛이 담겨 있었다.
‘삼각관계군.’
그런데 아퀼라 저 자식, 요즘 갈수록 질투가 심해지는 기분인데?
“흠….”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가만히 보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야.”
“응.”
“이리 와 봐.”
결국 나는 아퀼라를 가까이 불러서 입을 맞춰 주었다.
“…사랑해, 사루비아.”
“베이컨 타는데.”
“베이컨보다 너를 사랑해.”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한편, 나는 앞으로의 윈터와 내 관계에 대해 잠시 고찰했다.
윈터는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럼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그저 이웃 사람으로서 대하면 되는 걸까?’
고민해 봤지만 여전히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려운 문제였다.
* * *
딸랑딸랑-
그날 밤,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던 나에게 들려온 소리였다.
‘종소리?’
이 밤중에 갑자기 종소리가 왜 난단 말인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가 옆에서 갑자기 일어나자 아퀼라도 덩달아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가 나보다 더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침입자야.”
“뭐?”
“낯선 기척이 느껴져.”
역시 기척을 읽는 데에 있어서는 그가 나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모양이다. 흠, 원래 이런 건 윈터 전문이었는데.
“그런데 종소리가 왜 나지?”
아퀼라는 누가 우리 집에 침입한 거라고 했지만, 종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사실 짐작 가는 쪽이 있기는 했다.
‘강도.’
플래그가 꽂힌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회수될지는 몰랐지.
그렇지만 강도가 자신의 몸에 방울을 달고 다니지는 않을 것 아닌가? 강도가 침입했는데 방울 소리가 왜 들린단 말인가?
그래도 일단 침입자가 있다는 아퀼라의 말을 신뢰했기에, 나도 아퀼라의 뒤를 따라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아퀼라는 벽에 걸려 있던 검을 슥 뽑아 들었다. 나는 아퀼라의 검 옆에 걸려 있던 긴 소총을 뽑아 들었다. 가구를 살 때 함께 장만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무기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니까.
검과 총으로 무장한 지금의 우리는 이제 그 누구도 때려잡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웬만한 마물도 우리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고….
“강도다!”
창문을 통해 넘어오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내가 소리높여 외쳤다.
그는 누가 봐도 ‘강도다!’라고 외칠 정도로 수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옷과 검은 복면, 지저분한 콧수염까지, 그야말로 복숭아상과 자몽상의 뒤를 이을 ‘강도상’이었다.
우리에게 발각되자,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듯 그는 우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지금 보니 그의 손에도 무기가 들려 있었다. 단도 하나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우리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를 확인한 그가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여 줄행랑쳤다. 하긴, 내 손에는 총도 들려 있으니.
“쫓아!”
그런데 우리가 그의 뒤를 쫓으려 하던 바로 그 순간.
“사루비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강도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강도의 바로 앞에 나타난 그 남자는 들고 있던 검의 검집만을 이용해 강도를 재빠르게 쳐서 기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는 어벙벙한 표정으로 1층으로 들어오는 창문 앞에 서 있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윈터 님…?”
대체 이 시간에 윈터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축지법을 쓰기라도 하나? 아니, 설마 나에 대한 마음 때문에 늘 이 집을 자처해서 경비라도 서는 건 아니겠지?
내가 다시 말문을 잃고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윈터가 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설명했다.
“종소리가 들려서.”
“종소리…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어떤 직감이 들어서, 나는 윈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세상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들이 정원 곳곳에 달린 것을 발견한 내가 입을 벌렸다.
그건 아르콘의 시각이 아니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이었다. 게다가 곳곳에 종이 달려 있어서, 실을 건드리면 종소리가 울리도록 되어 있었고 말이다.
원래 이런 기구는 없었는데, 이 실을 새로 설치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윈터 님이 하신 겁니까?”
“그래.”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전 집주인이었으니, 안전이 보장되는 집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이 집의 안전은 내가 보장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아….”
“게다가 아까 네가 낮에 다소 두려워하는 것 같길래.”
“그건….”
차마 강도가 아닌 클리셰가 두려웠던 거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윈터 님,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아퀼라와 내 힘으로 충분히 잡고도 남을 하급 강도였지만, 그래도 그가 이렇게 세심하게 마음을 써 줬다는 것에 나는 감동받았다.
게다가 그는 그냥 막무가내로 우리 집 주변에서 호위를 서는 대신, 그의 집까지 들리도록 종소리가 나는 실을 설치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는 명분을 지키며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삼자대면이 어색하다고 무작정 피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윈터가 나한테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것도 아닌데, 명분이 있는 행동을 그저 쳐 내기도 이상한 것 같다.
윈터가 그럼 다시 숙면을 취하기를 바란다며 자리를 떠나고 난 뒤, 나는 아퀼라와 함께 강도가 망쳐 놓은 집을 정리했다. 그가 창문을 억지로 따고 들어오느라 창문이 고장 나 있었다.
아까 전 윈터의 일로 질투할 법도 한데, 아퀼라는 뒷정리를 하는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먼저 슬쩍 말을 던졌다.
“아퀼라.”
“응.”
“괜찮아?”
그 말에 아퀼라가 고개를 듣고 내 눈을 빤히 보며 답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이었어. 많이 놀라진 않았어?”
“응, 나는 전혀.”
“그래.”
다시 묵묵히 뒷정리를 하며, 아퀼라가 슬쩍 덧붙여 말했다.
“내 감정을 이유로 너를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어.”
“아….”
윈터와의 일을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그가 이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니 좀 감동이었다.
그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나는 마침내 어느 정도의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명분이 있으니까.’
전 집주인, 그리고 이웃.
그래도 윈터가 나한테 해 준 게 있는데, 내가 노력하면 앞으로도 우리는 좋은 옛 선후임 사이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 * *
쾅쾅쾅-!
“누, 누구세요?”
잠시 후, 아침 식사까지 마친 내가 낮잠이나 자려는 마음으로 누워 있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거친 소리였다.
거실에 있던 아퀼라가 나를 대신하여 현관으로 향했다.
“설마 윈터 님이 또 오신 건 아니겠지?”
하지만 윈터는 저렇게 세게 문을 두드리지도 않을 텐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후우…. 아퀼라, 애는 잘 있니?”
“사루비아는 안에 잘 있습니다.”
“이시나 님!”
다른 누구도 아닌 이시나가 찾아온 것이다!
반가운 목소리에 나는 얼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시나가 나를 살피더니 곧장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루비아, 무사했구나.”
“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뭐 걱정하는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네가 마지막에 보낸 편지를 보니 걱정이 돼서.”
“제가 보낸 편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편지를 쓰다가 끊긴 것 같길래.”
“아, 그때 잠시 다른 일이 있어서… 편지를 쓰다 말고 보내 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
이시나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기에, 뻘쭘해진 나는 그를 집 안으로 데리고 왔다.
이시나는 이전과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다만 국경방위군의 제복 말고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은 처음이라 흥미로웠다. 흰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역시 셔츠가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 같다. 남주들별로 캐릭터성이 참 확실하다니까.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고, 아퀼라는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이시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 그러면 내가 속이 터지거든? 그러니까 지금은 좀 자제….”
똑똑-!
그 순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체 오늘 왜 이렇게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많은 거지?
“아오, 진짜 아침부터 어떤 XX… 안녕하십니까, 윈터 님.”
“…내가 방해했나?”
“아니요…. 이번에는 어떤 일로 찾아오셨나요?”
“어젯밤은 시간이 늦어서 제대로 안부를 묻지 못했는데, 많이 놀라진 않았나 싶어서.”
“예, 일단 들어오십시오….”
나는 그에게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그런데 집 안에 있는 자들의 모습을 본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마침 우연히 이시나 님이 방문하셔서.”
“그렇군.”
윈터는 내게 집들이 선물이라며 와인을 건네주었고, 나는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오고 난 뒤 술을 마신 적이 있던가? 오늘 밤에 조져야겠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아 내가 문을 닫으려고 하던 그때, 문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또 불쑥 끼어들었다.
“히익!”
내가 놀라 비명을 지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진정시켰다.
“여어, 사루비아, 놀라지 마. 나라고, 나.”
“아, 알타이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