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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2화 (176/233)

* * *

어색한 식사 자리가 끝난 후, 우리는 잠에 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 맞다. 이시나 님께 편지 써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이시나가 나한테 전역하면 어디 있는지 바로 편지 써서 알려 달라고 했지. 아직 집을 어디에 구할지 정한 건 아니니, 내일 수도로 올라가서 보내면 되겠지만.

‘그리고 윈터 님께도 연락을 해야 해.’

윈터는 나에게 자신의 집 은행 금고 열쇠를 주는 기행을 저질렀다. 정말 남주다운 스케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만나서 이 열쇠를 처리해야 할 텐데, 그와는 또 언제 연락… 아.

‘윈터의 주소가 있었구나!’

내일 집을 구하면, 이 주소로도 편지를 쓰면 되겠다!

내가 편지를 보내야 할 곳들을 모두 정리하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아퀼라가 내 쪽으로 슥 고개를 기울였다.

“사루비아, 이제 잘까?”

“아, 어! 그러고 보니 졸리네.”

아퀼라의 말을 듣고 보니 졸음이 밀려오는 기분이어서 나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응, 아까부터 네 눈이 반쯤 감겨 있었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속도가 느렸으니까.”

역시 아퀼라,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구나.

“잘까?”

“응, 그래.”

아무런 생각 없이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여기서 말하는 ‘자다’의 의미는 전체 연령가야! 왜냐하면 내 인생은 아직 전체 연령가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그런 게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응?”

갑자기 내 인생이 전체 연령가에서 19금으로 바뀌는 건 아주 곤란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로맨스 장르에도 적응을 못 했기 때문이다.

내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아퀼라를 노려보고 있을 때, 그는 덤덤한 태도로 팔을 뻗어 방의 불을 끄며 말했다.

“알았어.”

순식간에 방 안이 어두워졌다.

“네가 싫다면 안 해.”

“…음, 그런데 싫은 건 아니고,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그런 거라고 할까나….”

“안 싫은 것도 다 알아. 내가 사루비아 너를 모를 것 같아?”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이상해 보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퀼라의 멱살이라도 잡으려다가, 나는 얼른 허공에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생각해 보니 침대 위에서 멱살을 잡는 건 안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응, 클리셰를 밟을 뻔했네!

내가 몸을 조금 옆으로 움직인 뒤 잠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옆에서 아퀼라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사루비아.”

“응.”

“나는 네가 3개월 안에 마음의 준비가 끝날 거라는 데에 걸게.”

“…….”

왠지 그의 말이 맞아떨어질 것 같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 자식은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옷을 사러 가기로 했다. 군복을 입고 자는 건 아주 끔찍이도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군복을 입고 그대로 상점에 가자 상점 주인이 놀란 얼굴을 했지만 우리에게서 금방 눈을 뗐다.

“사루비아, 원하는 거 있어?”

“원하는 거? …아, 있어.”

이 세계에 온 뒤 내가 입은 옷이라고는 지겨운 군복, 군복, 군복밖에 없었다.

로판 세계에 빙의했는데 군복밖에 입지 못하다니, 그건 상당히 불합리한 일이었다.

나는 예쁜 걸 좋아했다. 드레스는 더 환장했다!

비록 파티에 참석하는 귀족 영애 같은 드레스는 입지 못하더라도, 나는 몸을 움직이기 적당히 편한 드레스를 한 벌쯤 살 생각이었다.

“무슨 색이 좋을까?”

“사루비아, 너는….”

아퀼라는 짧은 기장의 드레스들이 모인 곳을 유심히 보더니, 그중 한 벌을 꺼냈다.

“흰색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내 얼굴 아래로 흰색 드레스가 덧대어졌고, 순간 아퀼라는 숨을 멈췄다.

“왜?”

“…억울하네.”

“뭐가?”

“네가 흰색 옷을 입은 걸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는 게.”

…얘 왜 대사도 점점 더 로판 남주처럼 치는 거지?

역시 이건 국경방위군이 잘못했다. 지금까지 그의 남주력을 막고 있던 건 모두 국경방위군 탓이었다고 나는 확신했다.

아퀼라의 말대로 내 머리 색 때문인지 흰색 옷을 입으면 얼굴이 환하게 빛나긴 했다. 난 남색 옷이 사실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사루비아, 예쁘다.”

이건 아퀼라가 나에게 분홍색 드레스를 갖다 대며 한 말이었다.

필요량보다 다소 많긴 했지만, 나는 움직이기 편한 옷 몇 벌과 함께 흰색과 분홍색의 드레스를 샀다.

이제 남은 건 아퀼라의 옷을 고르는 일이었는데.

“검은색은 아닌 것 같아.”

그의 얼굴 아래에 검은색을 갖다 댄 내가 얼른 옷을 회수하며 한 말이었다.

물론 그의 얼굴이 잘생긴 덕에 검은색 옷을 입어도 마찬가지로 잘생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눈매가 사나워서 그런지….

“이건 좀 무서워 보이네.”

로판 남주 중에서도 상당히 무시무시한 유형일 것 같았다. 아퀼라는 그런 타입은 아니란 말이다.

이 자식은 겉보기로는 무시무시한 암살자 타입처럼 보여도, 사실은 예민하고 멘탈도 자주 깨지고, 어쨌든 뭐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애란 말이다.

그다음으로, 나는 한참 동안 이것저것을 대 보다가 그에게는 은회색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동안은 옷의 색깔을 선택할 자유도 없이 남색 군복만 입어 대서 모르고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각자 어울리는 색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맞아, 원래는 이런 게 당연한 일들이었는데….’

밖에서 내 마음대로 음식을 고르고, 옷을 고르고, 그런 것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루비아?”

내가 멍하니 서 있었더니 아퀼라가 내 이름을 불러서, 나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붙잡아 주었다.

“있잖아, 앞으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자연스러울 거야.”

“그래.”

나는 내 손에 들린 옷을 흘끔 보며 생각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는 옷은 아퀼라랑 고른 거구나.’

우리는 정말로 처음으로 하는 모든 일을 함께하고 있었다.

아퀼라는 나와 한 약속을 정말 지켰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세계가 정말로 좋았다.

* * *

“아퀼라, 수도에 가면 뭐 할 거야? 집을 산 다음에 말이야.”

내가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한 질문에, 아퀼라가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나는 사루비아 네가 하는 거라면 전부 좋아.”

“그래? 내가 생각해 둔 게 있긴 해.”

아퀼라에게 내 인생 계획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히 말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이 계획을 설산 대대에서 혼자 정했으니까. 이건 내가 충분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계획을 세우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게다가 이 계획은 편지로 정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퀼라에게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떨어져 있던 2년 동안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생겼을 것이다. 이제 그걸 다시 알아갈 시간이다.

즉, 아퀼라도 내 혁명 계획에 대해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퀼라, 나는 나라를 바꿀 거야.”

그러나 당혹스럽게 느껴질 법한 내 말에도 불구하고, 아퀼라는 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덤덤한 태도에 나는 당황했지만, 일단 그에게 하고자 하던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국가가 숨기던 진실에 대해 알아냈거든. 우리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었는지.”

“그렇구나.”

“그래서 다른 아르콘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나라를 바꾸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싶어.”

“그렇구나.”

“…너 왜 이렇게 태연해?”

이렇게까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자, 아퀼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말했다.

“사루비아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예상이 가고, 난 네가 하는 거라면 다 좋으니까.”

“나도 그래….”

그렇게 다시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조성… 아니,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니었지.

“나는 황제를 직접 만나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응, 함께할게.”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선 흑마술 수색 특수군으로 가려고.”

“…뭐라고?”

아퀼라가 처음으로 내 말에 반응을 보이며 몸을 움찔했다. 그는 이 순간 진심이냐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아퀼라가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그거야….

“맞아, 그곳에는 에이프릴 님도 계시겠지.”

“그, 그렇구나.”

“너 내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다며?”

“응, 뭐든지 좋지.”

그렇지만 아퀼라의 목소리는 확실히 이전과 달리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나는 가볍게 웃었다. 평소라면 여기서 남주력을 깎아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남주력은 내 눈으로 확인했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퀼라에게 남주력으로 태클을 걸지 않기로 했다.

* * *

마차가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 또한 점차 변했다.

사람들은 길 위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제국의 관료로 보이는 사람들은 황성 쪽으로 걷고 있었으며,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들이 도시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지났던 시골 마을과는 달랐다. 사람들이 꽉 차 있는 도시, 다양한 상점들이 모인 번화가.

그야말로 거대한 아돌브 제국의 도시에 걸맞은 광경이었다.

정말 새로운 세계에 입성한 것 같아,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그래, 이게 로판이지….’

로판 속 제국은 이런 광경이 정상이란 말이다! 산 속에 처박힌 군대의 풍경이 아니라!

내가 감격에 젖어 낯선 도시를 열심히 관찰하는 와중에도 아퀼라는 여전히 덤덤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 그가 늘 속을 알기 어려운 표정이기는 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진짜로 별 감흥이 없는 듯했다.

“너는 안 신기해?”

내가 아퀼라에게 그렇게 물으니 그가 별거 아니라는 어조로 대답했다.

“어릴 때는 수도에서 살아서.”

“음,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그가 어릴 때 부모님에게 글을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고향이 바로 수도인가 보다.

…왜 그 이후로는 부모님 얘기를 하지 않은 건지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원작을 통해 그의 과거를 대강 알고 있었으니까.

때마침 비오튼 지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마부의 외침이 들렸고, 마차가 멈췄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나는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가자, 아퀼라!”

내가 그에게 기사처럼 손을 턱 뻗으며 그렇게 외치자, 아퀼라는 그 모습을 보고 드물게 활짝 웃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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