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2부 1화 (175/233)

#18. 이 세계가 로판이라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그 후, 우리는 집을 구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제대식이 거행되는 장소는 국경방위군이 있는 북부에 있어서 제국 내에서도 외진 곳이었고, 내 계획을 위해서는 수도 쪽으로 가야 했다.

“어디로 갈 거야? 난 수도가 좋던데.”

“미리 알아 놨어.”

아퀼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수도에 있는 비오튼 지역에 아르콘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하더라고.”

“좋아, 그럼 거기로 가자.”

처음으로 제국의 수도를 볼 생각을 하니 조금 신나는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마을은 전부 북부에 있는 곳이란 말이다. 이 제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난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다.

하지만 국경방위군이 제국의 최북단에 있는 탓에, 수도에 가기까지는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 결국 우리는 중간에 멈춰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이어서 수도로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적당한 여관을 골랐다. 사실 어디든 산에서 야영하던 국경방위군 시절에 비하면 감지덕지였기 때문에 숙소 선택의 기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1층에 있는 식당, 나무로 된 계단, 목가적인 분위기…. 딱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로판 속 여관이었던 것이다!

왠지 식당에서 변장한 황제라든가 공작이라든가 기사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내가 이 고전적인 분위기에 만족해하고 있을 때, 옆에 선 아퀼라가 물었다.

“사루비아, 이제 결혼할 건데 같은 방을 써도 되지 않을까?”

“…그런가?”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았다. 하긴, 어차피 결혼할 건데 뭐. 그리고 그렇게 하면 돈도 아낄 수 있을 거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우리는 여관의 주인으로부터 열쇠 하나를 받아들고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아르콘들이 이 지역을 많이 거쳐 가는지, 주인은 우리의 군복 차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아무래도 내일은 옷을 사야겠어. 이건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

“그래, 편한 옷으로 사자.”

아침에는 제대식을 진행하고, 점심에는 계약 마법을 제거하고, 저녁까지는 한참 동안 마차를 타고 달렸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서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침대 위로 엎어졌다.

“어휴, 죽겠다….”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겼다.

내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비비적거리고 있을 때, 머리 위로 아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도 되는지 물어보고 올게.”

“응….”

식사도 하지 못하고 마차를 타고 달린 탓에, 우리는 지금 졸린 데다가 배고프기까지 했다. 최악의 컨디션이다.

뭐, 그래도 제대했다는 자유의 기쁨 덕분에 뭘 해도 힘들지 않았지만!

낡은 여관의 공기는 다소 퀴퀴했고 침대도 그다지 푹신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나는 제대했고, 그 끔찍한 공간으로부터 자유가 됐다.

물론 미친 아돌브 제국의 황실 XXX들을 처리하는 일이 남아 있긴 하지만, 앞으로 나는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고 그 누구도 나를 구속하려 들 수 없다.

‘더 이상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이제 내가 마물로 인해 죽을 일도 없을 것이고, 내 주위 사람들이 언제 죽어 나갈까 노심초사하며 걱정할 일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아퀼라를 가졌다. 그는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행복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조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다. 주위에 아퀼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아까 식사도 되냐고 물어보고 온다고 했지.’

아무래도 여관의 1층에 내려간 것 같았다.

‘지금 씻어야겠다.’

몸에 남아 있는 국경방위군의 기운을 씻어 내야겠다. 그래, 이제 국경방위군과 상관없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거니까!

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가….

“어….”

씻으려고 했는지, 막 옷을 벗은 아퀼라와 눈이 마주쳤다….

“미, 미안….”

나는 당황하여 슬그머니 문을 닫아 주었다.

그래, 어차피 지금까지 우리가 서로의 얼마나 많은 것을 봐 왔는데 이 정도야….

게다가 어차피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고, 모든 처음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맨몸을 보는 것 정도야 상관 없… 잠깐만.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내 굳어 있던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면서, 방금 전 내가 보았던 광경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그런데, 좀 말이 안 되지 않나?

나는 다시 한번 문을 열어젖혔다.

“사루비아, 왜?”

그리고 조금 민망해하는 듯한 아퀼라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야, 그….”

하지만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아니, 그, 그거, 음….”

그렇게 말하는 내 얼굴은 아마도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내가 본인의 몸을 빤히 보고 있으니 아퀼라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느끼는 이 당혹감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아니, 잠깐만….”

그 순간,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이 세계, 로판이었지….’

그래, 그야말로 저건 로판 같았다.

이 세계가 로판이라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내가 말을 더듬으며 노골적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으니, 아퀼라도 뭐가 문제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혹시 놀랐어?”

“아냐, 아냐. 그런데 일단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서 들어 봐.”

정말로 심란했다.

내가 만약 로판을 읽고 있는 거였다면 ‘꺄악!’ 같은 수줍은 반응을 보이며 즐거워할 테지만, 그 당사자가 내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래…. 아퀼라가 나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말았겠지….

하지만 내가 쟤랑 결혼을 약속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너무 심란하다….

그렇구나…. 상대가 나구나….

예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네미집’은 꽤 메이저한 전개를 따르는 로판이었다.

남주들의 뛰어난 능력. 이건 아주 메이저한 요소였다. 남주들의 뛰어난 얼굴. 이건 더 메이저한 요소였다.

그리고 로판에는, 남주의 얼굴과 능력이 뛰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메이저 요소가 있었다.

그리고 아퀼라는 소설 남주였다…….

그래… 뭐 그랬다는 것이다.

아까부터 계속 그…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도록 만드는 아퀼라에게 따져야 하는 문제다.

“진짜 심란하다….”

그동안 수많은 소설을 읽어왔지만 처음 남주의 벗은 몸을 보았을 때 과장되게 놀라거나, 심지어 딸꾹질을 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여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소설에만 존재하는 과도하게 ‘순진하고 아방한’ 여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런 속 편한 생각을 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게 되었다.

“자, 잠깐만.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

나는 내가 순진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거대한 현실 앞에서 나는 심히 당황스러워졌다.

XX, 어휘력도 떨어지는 기분이군. 뭐라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믿기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로 ‘아방’했다….

아니, 그런데 이건 내 성격이 원래 이런 게 아니라, 소설 속 남주들이 강제로 여주를 그렇게 만들었던 거라니까? 불쌍한 여주들. 저런 거 앞에서는 누구라도 아방해지겠지….

“…이제 좀 적응은 됐어?”

아까부터 나를 기다려 주던 아퀼라가 뻘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아퀼라는 얼마나 민망하겠어…. 아니, 그런데 저건 진짜 아닌 것 같아.

“그, 잠깐만, 그, 잠깐만….”

모든 어휘력을 잃고 같은 단어만 반복하다가, 나는 용기를 내어 눈앞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나는 다시 심란해졌다.

“후우….”

“…실망해서 한숨을 쉬는 건 아니겠지?”

“미쳤어? 어, 어떻게 실망을 해?”

나는 잠시 이 세계의 모든 남성들이 저런 신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그럴 리는 없었다. 역시 남주… 대단해….

“…그, 그건 당분간 보류하자.”

“…왜?”

“아, 아플 것 같은데,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

“…괜찮아, 네가 안 아프도록 내가 노력해 볼게.”

“양심 뒤졌냐? 아니, 그건 네 노력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더 노력을 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이제 내 목소리는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아직 딸꾹질은 하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군. 하지만 내가 아방해진 건 전적으로 쟤 탓이야.

“너, 너 진짜 양심 뒤졌어? 어떻게 그, 그게 가능해?”

“괜찮아, 사루비아. 내가 잘해 볼게.”

그렇게 말하며 그가 한 걸음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그… 내, 내가 자신이 없다니까? 마음의 준비가 덜 돼서 그래!”

“이대로 뒀다가는 네가 평생 마음의 준비가 안 될 것 같아서.”

“그거야 당연하지…. 아니, 그런데 이건 다 네가 양심 없는 탓이야.”

“그러니까 내가 잘해 볼게. 한 번 하면 뭐든지 그다음부터는 쉬운 법이잖아.”

“아니, 아니, 한 번 한다고 해서 네 신체가 갑자기 변화하는 건 아니잖아. 잠깐만! 일단 거기 있어 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똑똑똑-

“식사 가져왔는데요.”

“예!”

여관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일단 밥 먹자, 응?”

아퀼라의 표정은 묘하게 어두워졌지만, 나는 그를 화장실 안으로 재빨리 밀어 넣고서 식사를 받아 왔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옷을 입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는 다시 어색해졌지만, 애써 그를 외면하며 식사가 담긴 쟁반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아, 정말이지.

‘이런 게 바로 로판?’

로판은 참 대단한 거였구나, 응….

그동안 내 인생에 로판이 왜 들이닥치지 않는지 억울해했는데, 사실 내 옆에 로판이 늘 존재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로판을 체감하고 싶지는 않았다고요….

그렇게 우리의 어색한 식사는 계속되었고, 나는 로판이라는 장르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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