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카론에게 들은 이야기를 끝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번에 말씀드린 그분들의 아들에게 유품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환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건 알고 있었지. 무언가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풀리지 않는 것 같아서 카이센의 혈육을 찾은 거였어.”
대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환영 속에서 카이센 님은 심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눈을 감으셨다고 했는데, 몸에 난 것은 틀림없이 검에 당한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그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분명 마물이 나타났고, 그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카이센과 라일라가 일부 병사들을 이끌고 먼저 달려갔어. 나머지 병사들이 지원을 나갔을 때는 병사들 다섯 명과 두 명의 중대장이 눈을 감은 상태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마물에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보이는 그대로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게 사람에 관한 것이든, 사건에 관한 것이든.
“속임수일 수 있습니다. 먼저 칼로 베어 죽게 만든 후, 마물에 당한 것처럼 위장한 겁니다. 혹은 이곳에는 마물이 많으니 진짜 마물에 당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잠시만,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들을 죽일 이유가….”
순간 대대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기계처럼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허허, 사루비아 양도 앞으로는 중대장을 너무 놀리지는 말도록.”
그건 꼭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를 모든 없는 것처럼 만들려는 말투 같았다.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 나도 가볍게 반성하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하하,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물러가도록.”
“예! 대대장님, 사랑합니다!”
“허허.”
대대장실을 나오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대대장의 태도가 왜 변한 거지?
카이센 님과 라일라 님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대대장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으며, 그 이유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결코 밝혀지면 안 됐다. 대대장의 태도로부터 내가 추측해 낸 건 이 정도였다.
‘왜 살해당한 거지?’
고민하던 중 문득 이전의 중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그냥 첩자인 줄 알았네.”
그래, 이 부대에는 첩자가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는 화난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대대장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거다.
첩자가 무엇을 고발하고 무엇 때문에 그분들을 죽였는지는 뻔한 일이다. 나라를 뒤집을 생각.
대대장이 카이센 님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부터가 그의 사상을 대변하는 증거였다.
최전방 부대인 설산 대대의 간부들 사이에 그런 생각은 어느 정도 퍼져 있었고, 카론의 부모님도 그 일원이었을 거다.
그래서 그들은 첩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진실을 깨닫자, 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어쩐지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또 알아 버린 느낌인데. 난 왜 이렇게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거지?
‘아냐,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과거 이 부대의 간부들 사이에 있었던 어떤 모의를 알아낸 것 같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거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중대장을 내쫓는 일이니까.
나는 생각을 바꾸고, 대대장이 앞으로 나를 눈감아 주기로 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이제 내가 아무리 중대장을 괴롭혀도 그는 “허허, 장난이 심하군.” 정도로만 넘어갈 것이다.
* * *
‘저기 있군.’
중대장의 모습을 발견한 내가 고개만 불쑥 내민 채 그를 살폈다. 그가 기절하는 타이밍마다 내가 있는 것도 이상하니, 이번에는 몸을 숨기고 몰래 마취 침을 쏠 계획이었다.
참고로 이제 레드와 내 호흡은 찰떡궁합처럼 척척 맞았다.
레드는 이 일을 재미있게 여기는 듯 나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그의 변장 기술과 연기 기술도 나날이 늘었다. 이제 그는 몸에서 더한 악취가 나도록 할 수 있었으며, 더 뻣뻣해 보이게 콩콩 뛸 수 있었다.
콩콩-!
오늘도 나와 중대장 모두에게 익숙할 콩콩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들리자 내 얼굴에는 미소가 빙그레 떠올랐으며, 중대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
‘된다, 이 XX야.’
오늘의 레드는 평소보다 몇 배쯤 무시무시한 몰골이었다. 역시 나날이 기술이 늘고 있다니까!
쿵-!
내가 마취 침을 쏘지도 않았는데 중대장은 픽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아마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가 일어난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콩콩 뛰어 사라지는 레드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쯤이면 됐나?’
지금까지 중대장을 기절시킨 횟수가 열 번은 되는 것 같은데. 그럼 슬슬 중대장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까?
“중대장님, 중대장님!”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잠시 후 그의 눈이 천천히 떠졌고,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헉! 방금도 봤어! 그 유령을 봤다고!”
“헉, 또 영혼을 빼앗기신 겁니까? 최근에 너무 많이 빼앗기신 것 같은데….”
“유령도 내 영혼을 빼앗아 갔기 때문인지 점점 무시무시해지고 있어…. 더 이상은 안 돼!”
중대장은 자신의 책상 앞으로 달려가더니, 가방 안에 자신의 짐을 미친 듯이 쑤셔 넣기 시작했다.
“이 부대는 마가 꼈어! 저주받았다고! 이 부대에 있어서는 안 돼!”
“그래도 이렇게 가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처벌을 받더라도 이곳을 빠져나가… 아니, 아예 은퇴해 버리겠어! 한 자리고 뭐고, 더 이상은 못 견딘다!”
중대장은 더 이상 옆에서 뭐라 말해도 듣지 않을 기색이었다. 이제 그는 그 괴담을 단단히 믿어 버리게 된 것이었다.
“대대장님, 저는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그대로 중대장은 부대를 떠나 버렸다.
‘살았다….’
그렇게 나 또한 소리 소문 없이 제거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완벽한 계획 성공이었다.
‘역시 공포의 힘이야….’
그가 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어서 이 부대를 떠나게 하기. 역시 이번에도 폭력과 공포가 나를 구원했다.
“야, 레드!”
중대장이 떠나는 뒷모습까지 지켜본 뒤, 나는 신이 나서 레드에게로 달려갔다. 이 공로를 치하해 줄 계획이었다.
“사루비아 님?”
숙소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언제나 그렇듯 백수처럼 퍼질러 누운 레드가 고개를 들었다. 저 자식, 이제 내가 곧 제대한다고 선임 노릇도 안 해 주는군.
“방금 연기도 대박이었어! 드디어 중대장이 떠났다고!”
“…방금 연기라면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 복도 뛰어간 거 말이야!”
“…예?”
그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야, 야, 설마….”
“저는 오늘은 아직 연기 안 하고 계속 누워만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제 연기했으니까, 오늘은 쉬려고 했습니다.”
“그럼 방금 내가 본 건….”
XX, 이런 식으로 납량 특집 클리셰를 알차게 회수할 건 없잖아!
“아악!”
“사루비아 님? 사루비아 님, 괜찮으십니까?”
그대로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바닥 위에 엎어지며, 나는 클리셰가 등장하기만 하면 족족 이루어지는 이 미친 세계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 * *
제대 D-14일.
그 일 이후, 다행히도 나는 유령을 다시 보지 못했다. 납량 특집은 그대로 끝난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로맨스 특집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대하면 뭘 해야 하지? 결혼?”
내 숙소에 웅크리고 앉은 내가 불안하게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참, 원래의 중대장이 도망친 이후로 새로운 중대장이 부임했는데, 그는 제대가 몇 주 남지 않은 나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 덕에 나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말년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제는 제대가 코앞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제대 이후의 삶을 그려 볼 수가 없었다.
아퀼라한테 결혼하자고 하긴 했는데, 결혼 준비에 엄청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는데. 아니, 애초에 이 세계의 결혼은 어떻게 하는 거지? 예식장도 없지 않나? 주례랑 사회 같은 의식도 있나? 양가 식구 같은 것도 없고.
“사루비아 님, 편지입니다!”
아퀼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 건 바로 그때였다. 나는 후임으로부터 잽싸게 그 편지를 뺏어든 뒤 빠른 손놀림으로 봉투를 뜯었다.
『사루비아에게
사루비아, 잘 지내고 있어? 네가 지난번에 말한 중대장 건은 잘 해결됐고?
제대 이후에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봤는데, 제대한 모든 군인들은 우리가 입대를 했던 그 자리에 다시 모이게 된대. 그리고 그곳에서 계약 마법을 해제하고 자유가 되는 거라고 하더라고.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날까지 부디 건강해, 사루비아.
아퀼라 보냄』
“아, 다 한자리에 모이는 거구나!”
어디에서 아퀼라랑 만나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만날 장소가 생겨서 다행이다! 그럼 제대하자마자 나는 바로 아퀼라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좋아, 그럼 그날까지 지금처럼 짱박혀서 지내야….
“사루비아 님, 외부 근무가 있…! 어? 어디 가셨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한곳에 쌓인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중대장으로부터 은신하기 위해 익힌 기술이었다. 후임은 내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대로 숙소를 나가 버렸다.
‘…역시 모든 경험은 도움이 된다니까.’
이걸 좋게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중대장 사건으로 배운 게 참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