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54화 (172/233)

“허억….”

중대장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고, 나는 잠시 후 그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그의 정신이 평온해졌을 때,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목 뒤에서 마취 침을 뽑아냈다.

“완벽해.”

나는 타로의 마취 침 쏘는 기술까지 습득한 상태였단 말이다. 원래 지휘사관쯤 되면 온갖 잡기술을 익힐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곳이 최전방 부대인 설산 대대인 덕분에 이곳에 오는 보급품 무기는 클레도어 산악 대대의 것보다 훨씬 효과가 강력했다. 그곳에서는 고작 윈터의 몸을 마비시키는 데서 그쳤지만, 이곳에 보급된 침은 아예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지.

이것으로 내가 예전에 중대장에게 말해 주었던 전설의 내용은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팔을 앞으로 뻗고 콩콩 뛰어가는 유령이 존재하고, 그 유령이 사람의 영혼을 빨아먹기 때문에 그때마다 잠깐씩 기절한다는 사실.

이제 곧 기절 상태에서 깨어난 중대장은 자신이 타깃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겁에 질릴 것이다. 그럼 조만간 이 부대에서 도망치겠지!

“후후….”

내 제대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그게 바로 군인이라는 존재란 말이다! 우리는 이웃 나라의 황제 목을 따 와야 제대시켜 준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준비도 되어 있다!

“내가 한 달 내로 이 부대에서 도망치게 해 주겠다….”

그에게 진실을 들키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대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으니, 결론은 하나뿐이다. 그가 도망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답이었다.

* * *

그 후, 레드와 나는 가끔씩 그 연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유령 연기를 하고, 중대장을 기절시켰다.

“흡-! 흡-!”

나는 마취 침을 쏘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중대장 덕분에 이 기술을 나날이 발전시킬 수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사루비아 님!”

“뭔데?”

그때, 나를 부르는 후임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성가신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후임이 몸을 움찔하면서도 천천히 설명했다.

“대대장님이 부르셔서 말입니다.”

“대대장님이?”

이 부대의 대대장이라면 내게 카론의 아버지의 유품을 전해 줄 때밖에 만나 보지 않았는데.

그가 최전방 부대에서 직접 체험한 게 많은 사람인만큼, 조금 붉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 그의 인연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는 결국 설산 대대 어딘가에 있을 혁명 조직을 나에게 소개해 주지 않았으니까.

“왜 부르는 거지?”

내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것과 관련된 일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대장실로 향했고….

“사루비아 양, 요즘 중대장을 놀리는 것 같던데.”

“…….”

곧 내 앞에 앉은 그의 말에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뭐지? 어떻게 알아낸 거지? 분명 후임들이랑 레드에게는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 놨는데?

내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가고 있는 동안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루비아 양. 자네가 이곳에 왔을 때, 함께 온 병사 관찰 일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아나?”

“예?”

병사 관찰 일지라 함은 각 병사에 대해 일정 기간 지켜본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종합적인 평가를 기록하는 문서인데.

“사루비아 양은 특이하게도 클레도어 산악 대대의 대대장이 쓴 내용이 있더라고.”

“잘 못 들었습니다?”

대대장이 일개 병사에 대해 직접 관찰하고 기록한다고? 그럴 수가 있나?

나는 이전 부대에 새로 부임해 왔던 대대장을 떠올렸다. 그는 상당히 인자하고 병사를 배려해 주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현 체제에 대해 나와 뜻이 일치하는 사람이었기에 아마 별 문제는 없을 텐데. 무슨 일이지?

내 눈알이 바쁘게 움직이자, 대대장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말했다.

“그 내용을 읊어 주지. 관찰력이 좋고 눈치가 빠름. 영리함. 간부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돌하게 대함.”

으음…. 충분히 중대장을 놀릴 수 있을 것 같은 성격처럼 보이는 기록이기는 했는데….

“그 머리색과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음? 뭐지, 이건?”

…저거 붉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아니냐? 저런 것까지 써 놔도 되는 거야?

내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대대장은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중대장이 자꾸 나에게 설산 대대의 전설이라는 것에 대해 물어보더군. 웬 붉은 머리의 병사가 알려 줬다는데,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지. 몸이 얼어 있고 콩콩 뛰어다니는 귀신? 사람의 영혼을 빨아먹는다? 전부 들어 본 적도 없는 이야기거든.”

중대장 자식, 그렇게 입이 싸다니…. XX, 내 납량 특집은 이대로 끝나는 건가? 나는 이대로 중대장에 의해 설산 대대에서 목숨을 달리할 운명인 건가?

“그럼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그런 소문을 만들어 냈다는 것밖에 답이 없는데, 도대체 중대장을 왜 놀리는 건가?”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대대장에게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진실을 알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내가 그를 쫓아내려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그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긴 하지만….”

“잘 못 들었습니다?”

대대장과 눈이 마주친 찰나, 나는 그로부터 기묘한 신호를 받았다.

그래, 꼭 이 상황을 진지하게 여기기보다는 웃기다고 생각하는 그런 느낌이라든가….

“중대장과는 나도 잘 맞지 않으니, 뭐.”

‘…아.’

중대장은 황실 호위군 출신의 제국민이고, 대대장은 국경방위군의 최전방을 지켜온 아르콘이다. 이 제국에 대해 그들은 정반대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전 부대의 대대장이 적어 준 기록. 그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이 대대장은 내가 그와 비슷한 입장이라는 사실 또한 눈치챘을 테니까.

“그래서 그토록 중대장을 놀리는 이유가 뭔지, 나에게 얘기해 줄 생각은 없나?”

그가 나에게 떠보듯이 물었다. 나를 그 일로 질책하기보다는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듯했다. 그래서 나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중대장님을 이 부대에서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대대장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아무리 그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일개 병사가 중대장을 내쫓겠다는 발상을 하는 건 정말 황당무계한 일이었으니까. 그는 여기서 나를 영창으로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대대장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중대장님의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중대장님은 그 비밀을 엿들은 자를 찾고 있는데, 위험한 내용이라 발각되면 저는 제거될 수도 있습니다.”

“아, 그래서….”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대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즘 중대장이 어떤 병사를 찾고 다니는 것 같던데, 그게 사루비아 양이었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네를 제거하기까지 하겠는가? 필요하다면 내가 신변을 보호해 줄 수도 있는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대장에게 100퍼센트 맡겨 버릴 수는 없었다. 왜냐면 중대장은 황실 호위군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이용하여 이 부대 내에서도 나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으니, 대대장이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 군대에서 간부는 믿는 게 아니다. 그게 내 신조였다! 비록 이번에는 대대장을 일시적으로 신뢰하기로 했지만,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지금까지 하던 대로 내 힘으로 중대장을 내쫓는 게 옳다.

“아닙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라서 저를 가만히 두려고 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중대장을 내쫓겠다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는데….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비웃을 이야기지. 사루비아 양은 내가 자네의 말을 들어줄 것 같나?”

“예, 저는 대대장님이 그렇게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근거로?”

“…어차피 새로운 중대장님이 오시는 편이 대대장님께도 좋으시지 않겠습니까?”

“글쎄, 무례한 말이군….”

순간적으로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져서 나는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는 입을 열고 다물 때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가 다시 넌지시 물었다.

“대체 알게 됐다는 그 비밀이 뭐지?”

그래, 그걸 원하는 거였군. 하긴 병사를 제거할 정도의 큰 비밀이라면 그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그 비밀을 대대장에게 말해 줘도 괜찮을지 다시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은 간부인 대대장이 이미 그 비밀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하고, 아니면 그가 중대장과 손을 잡는다든가…. 어쨌든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대번에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의 협조를 구하려면 뭔가 정보를 넘겨줘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얼마 전 카론이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 같다고 했지.’

겉보기에 이 부대의 간부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상황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 그들이 진짜로 모르고 있었거나.

둘,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게 진실을 밝히지 않았거나. 이 경우는 그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다른 부대에서 온 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 경계했던 거 아닐까?

‘도박이다.’

우선 첫 번째 상황을 가정하고 말을 하고, 대대장의 낌새가 이상하면 두 번째 상황으로 넘어가 나를 믿어 보라고 어필하는 것이다.

“대대장님, 그 비밀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걸 알려 드리겠습니다. 틀림없이 대대장님도 이걸 원하실 겁니다.”

“그게 뭐지?”

“카이센 님은 살해당하셨습니다.”

순간, 공기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대대장이 이보다 차가울 수 없을 것같이 시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예, 알고 있습니다.”

“이 설산은 워낙 험한 탓에 침입자가 올 수 없다. 이곳에 있는 건 오직 설산 대대의 일원들뿐. 그렇다면 그를 죽인 배신자가 있다는 건가?”

아무래도 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서 진실을 숨겼던 경우는 아닌 것 같았다. 대대장은 그들이 살해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대대장을 설득해야겠지. 물론 그건 쉬운 작업은 아닐 거다.

이 부대에 지휘사관으로 온 지 2년도 되지 않은 풋내기인 내가 베테랑 앞에서 그 당시 이 부대 내에 배신자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추측을 하고 있는 거니까.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대장은 이 일로 인해 내게 분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어쩌면 그 당시 일하던 부사관들 중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범인이 누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살해당했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럴 리가 없네. 자네는 대체 그 정보를 어디서 얻은 거지? 우리가 카이센과 라일라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마물에 뜯어먹힌 상태였어.”

라일라는 카론의 어머니의 성함이었다. 그 참혹한 상황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져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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