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눈을 감고 집중하는 얼굴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그래! 범인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뛰어가더군! 에잉, 그러면 복이 달아나는데…. 역시 범인답게 아주 사악하군.”
내가 어제 추적을 피하기 위해 모퉁이를 돈 뒤부터는 신발을 벗고 양말만으로 걸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중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저 질문의 결과는 뻔했다. 당연히 저 방법으로도 나를 찾아내지는 못할 거다. 왜냐하면….
“그, 저희는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걸을 수 있지 말입니다.”
“뭐? 왜지?”
“그건 사루비아 님이 주무실 때 복도에서 소리를 내고 걸으면 안 돼서….”
“하하….”
그래, 그렇게 됐던 것이다. 내가 멋쩍은 눈으로 중대장을 보며 입꼬리만 올려 웃자, 그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내 훈련법이 또 도움이 됐구나.’
나는 대체 어디까지 미래를 내다보는 걸까? 늘 생각하는데, 난 정말 멋진 인재인 것 같다.
심지어 후임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 주기까지 했기 때문에, 중대장은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듯 얼굴을 붉히며 중대장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포기하지는 않은 듯,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누구인지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어.”
이 부대에 온 뒤로 우리에게 관심이 일절 없었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서 열정과 집념이 느껴지고 있었다….
‘X됐군.’
위기를 무사히 피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서든 그는 범인을 찾아낼 기색이었다. 정말 제대로 X된 것 같다.
나는 제대가 3개월 남았고, 딱 3개월만 버티면 된다. 그동안 그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무사히 전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짱박힌다!’
최대한 모습을 숨겨서 그가 나라는 존재를 잊도록 만든다! 혹시 범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게 돼도 나를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짱박히는 거다!
그리고 짱박히는 기술은 말년에게 있어 패시브 스킬이나 다름없지. 그건 조상 대대로 내려져 오는 기술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부터 닌자에 버금갈 정도의 은신술을 터득하기로 결심했다. 중대장과 내 술래잡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똑똑똑-
“사루비아 님? 들어가겠습니다?”
후임 하나가 내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 여기 안 계시네? 어디 계시지?”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그는 숙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구석에 쌓여 있던 침낭 구석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좋아, 여기서는 안 보이나 보군.”
꽤 괜찮은 은신 장소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내가 더 나은 장소를 찾아 침낭 밖으로 빠져나가려 할 때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 부대 후임들은 걸을 때 발소리를 내지 않으므로 간부들 중 하나란 의미였다.
위기를 감지한 내가 머리카락까지 알뜰하게 모아 침낭 속으로 몸을 숨겼을 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는 지휘사관…이 없군.”
중대장의 목소리였다!
이 숙소의 주인이 나인 줄도 모르는 듯한 그는, 내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휴….”
이번에는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건 초급 은신술에 불과했다. 아직 더 수련할 필요가 있었다.
* * *
“거기 지나가는 병사, 이리 좀 와 보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저 너머에서 중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이군.’
그는 요즘 병사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병사들을 한 명씩 붙잡고 떠보고 있었다.
“쳇, 그럼 다른 길로 가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나는 옆에 있던 나무를 흘끗 쳐다보았고.
탓-!
도약하여 나무줄기에 매달리며, 반동을 이용해 나무의 안전한 곳까지 올라타고. 옆에 있던 식당 지붕으로 이동하여 경사진 지붕 위를 기어 올라가고. 다시 경사진 반대편 지붕으로 아슬아슬하게 뛰어내리고.
“방금 뭐가 나무에서 움직이지 않았나?”
“새 아니었겠습니까?”
“그런가? 혹시 내가 요즘 기력이 허해졌나? 돌아가서 나무뿌리 달인 물이나 먹어야겠어.”
중대장의 멍청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직 이대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건 중급 은신술에 불과했다. 아직 더 수련할 필요가 있었다.
* * *
마침내, 나는 고급 은신술을 터득하는 데 성공했다.
“오케이, 오늘도 무사히 다녀왔다.”
중대장의 눈을 피해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는 숙소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 화장실 창문으로 내려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방법을 통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화장실에 다녀온 후, 나는 흡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요즘의 나는 지붕 위를 기어 다니는 데에 아주 익숙했다.
좋아, 요즘은 하루가 참 평화롭… 잠깐만.
“이게 평화로운 거였나?”
아무래도 내가 평화의 개념을 잊고 있던 기분이 들었다. 지난 며칠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닌자처럼 다녔는데, 원래 이런 삶이 일반적인 거였나?
XX, 아무래도 내 뇌가 국경방위군에 절어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삶은 잘못됐다! 뭔가 잘못됐어!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
화장실 하나 가기 위해 이렇게 벽과 지붕을 등반해야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이제는 숨어 다니는 일도 지긋지긋해서, 나는 중대장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당당히 복도로 나갔다.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시나가 보낸 편지였기 때문이다.
‘고민 상담을 하고 싶을 때는 후임들에게 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이시나는 아주 현명하니까, 그런 방면에서는 이시나의 말이 맞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민이 생길 것도 예측하지 않았는가.
나는 후임들이 있는 숙소에 노크를 한 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 사루비아 님, 무슨 일이십니까?”
늘 짱박혀 있던 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후임들은 당황한 듯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자, 들어 봐. 만약 이 군대 안에 암살자가 있어.”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제대로 들은 거 맞으니까 끝까지 들어 봐. 만약에 암살자가 있어서 너희를 죽이려 해. 그런데 우리는 군대에 있어야 하니까 도망치지는 못해.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할래?”
그러자 후임들이 불안한 눈으로 웅성거렸다.
“뭐지? 이제부터 암살자 놀이를 하신다는 건가? 원래 지휘사관 분들은 늘 이상한 놀이를 만들어 내시잖아. 레드 님만 하셔도 늘 그러시는걸.”
“아냐, 우리를 죽여 버리겠다고 돌려 말씀하시는 거 아닐까? 본인이 암살자이신 거지.”
“그런 건가?”
“아니라고, XX들아! 내가 너희를 왜 죽이… 잠깐만.”
후임들에게 버럭 성을 내다가, 벼락처럼 무언가를 깨달은 난 입을 다물었다.
‘와, 역시 이시나!’
역시 고민은 다른 사람이랑 나눠야 해결되는 거다! 덕분에 정답을 찾았다!
나는 지금 중대장에게 내가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죽는 상황이고, 그래서 중대장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반대라면 어떨까?
내가 먼저 중대장을 제거한다면 어떨까?
“그래, 이거다! 내가 죽이면 돼!”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혹시 암살자 놀이를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도망가면 되겠습니까?
후임들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나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쁨에 젖어 팔을 벌려 만세를 했다.
‘이시나 님, 저에게 또 정답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원조 흑막이 해준 조언다웠다. 나는 이시나의 말대로 정말 후임들과의 대화에서 정답을 찾아냈다.
나는 이제부터 중대장을 피해 다니지 않을 거다!
대신, 내가 먼저 중대장을 제거할 것이다!
* * *
이제 나에게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어떤 방법을 써야 중대장을 제거할 수 있을까?
물론 물리적 의미로 그를 제거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대신 나는 군 내 정치질의 달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골로 보낸 선임들과 후임들만 해도 벌써 여럿이었다.
간부를 대상으로 정치질을 해 보는 건 처음이지만….
‘여긴 내 홈그라운드다!’
설산 대대에서 보낸 시간만을 따지자면 내가 그보다 위였다. 나에게는 홈그라운드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내가 음흉한 미소를 띤 채 다양한 계획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있었을 때, 후임들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부대 내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방조죄로 영창에 갈 수도 있는 건가?”
“아냐, 내 생각에 사루비아 님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실 거야.”
“역시 그런가?”
“…역시 그렇긴 뭘 역시 그래! 안 죽여! 안 죽인다고!”
나는 그를 물리적으로 죽일 생각이 없었다! 사회적으로 죽이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런 일에는 이시나가 전문가인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시나는 지금 제대를 해서 사회에 있을 거고, 그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외부에서 부대로 편지를 보내는 일은 불가능했으니까.
생각해 보자. 우선 중대장은 그가 있던 황실 호위군에서 뭔가 사고를 쳐서 국경방위군의 최전방 설산 대대까지 유배를 온 처지이다. 여기서 그가 또 사고를 친다면 그는 갈 곳이 없다.
그러니 아예 군대라는 공간에서 그를 몰아내는 편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그를 몰아내기에 앞서 중대장이 밖에 가지고 있는 인맥과 그 사이에 이어져 있는 소통 수단을 끊어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잘못해서 그 연결 고리를 통해 이 부대에 있는 누군가가 아르콘 복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최악의 경우 황실에서 개입할 수도 있을 테니까.
젠장, 그렇다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후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물리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중대장을 산간 오지에 처박아 둔다 해도 그의 연줄이었던 자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아예 편지를 보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자.
…그런데 그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물리적인 방법과 사회적인 방법, 그 중간에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문득 머릿속에 새로 부임한 중대장의 특성이 떠올랐다. 그는 미신에 상당히 집착하는 남자였다. 그 점을 이용한다면, 그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도록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거야!”
방법을 생각해 낸 나는 그대로 중대장을 찾아 달려갔다.
* * *
내가 지난 몇 주간 중대장을 피하기 위해 개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중대장님!”
“자네는… 누구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를 불렀을 때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듯했다.
“저는 288중대 알파 소대의 지휘사관 사루비아입니다.”
“알파 소대의 사루비아…? 아, 나와 같이 짱박히던 그 지휘사관이었지!”
내가 누구인지 기억해 낸 중대장은 곧바로 나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자네, 정말 밤에 혼자 돌아다닌 적이 없나? 내가 어떤 불이익을 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데….”
“아니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보고드릴 게 있는데 말입니다.”
“그게 뭐지?”
내가 정보를 제공할 거라고 생각한 듯 그의 눈빛이 비열하게 빛났다.
“지난 며칠 동안 중대장님은 밤에 복도에 나온 범인을 찾으려고 하셨는데, 실제로는 찾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서 뭘 알고 있는 건가?”
“분명 중대장님이 누군가를 느끼셨는데 그 사람을 찾지 못한 거라면… 짐작 가는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