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조상들은 대대로 말년에 ‘짱박히기’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
제대 D-92일.
“세상에….”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나는 감격 어린 손짓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외쳤다.
“석 달! 석 달만 버티면 돼!”
2황자군을 진압하기 위해 개고생을 한 이후로, 나에게는 그 어떠한 위기도 닥치지 않았다!
그 2황자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소식이 없었지만 제국군 내부가 워낙 혼란스러웠으므로 국경방위군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펠로니 제국과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이후로 나는 쓸데없는 외부 근무나 부대 연합 훈련 없이 이 설산에 처박혀 총이나 쏘고 마물이나 토벌해 왔던 것이다.
그동안 나와 친해진 상등병들인 루나와 애쉬, 노만은 모두 다른 부대로 진급하여 떠났기에 나는 숙소에 홀로 처박혀 아퀼라와 편지나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다만 요즘의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설산 대대의 간부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혁명 조직이었다.
내가 이전에 대대장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볼 때, 당연히 대대장은 그곳에 속해 있고 현재의 중대장 또한 간여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분명 그때 조직이 존재하고 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하긴 했지만, 거의 2년이라는 시간을 이 부대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 건지 조직의 실체를 제대로 확인시켜 주지는 않고 있었다.
‘제대 후 에이프릴과 연결시켜 주면 도움이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불 속에서 스멀스멀 빠져나왔다. 이제 식사를 하러 갈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복도로 빠져나왔을 때는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다들 정신이 나갔나?’
평소라면 어딜 복도에서 소리를 내냐면서 새로운 훈련을 시켰을 나였지만, 이제 나는 완전한 말년이므로 참기로 했다. 그래…. 원래 말년은 곧 사회로 나갈 몸이니까 선임 대접이라도 받으려면 괜한 찔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지내야 한다.
“야, 무슨 일이냐?”
복도에 있던 후임들 중 한 명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며 그렇게 물으니, 그가 놀라 몸을 움찔했다가 대답했다.
“이, 일어나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오늘 새로운 중대장님이 부임하신다고 합니다.”
“…뭐?”
물론 중대장이 바뀌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다만 이번 교체는 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원래의 중대장은 아무런 인사도 못 하고 훌쩍 떠난 건가?
‘왜지?’
혹시 혁명 조직, 뭐 그런 게 들킨 건 아니겠지? 아니, 그렇다면 이곳에는 필시 피바람이 불었을 터.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뭐, 새로운 중대장이 부임했더라도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국경방위군의 모든 중대장이 그하듯 그냥 자신의 주특기인 실망을 열심히 하는 중대장이겠지.
새로운 중대장의 부임 인사가 있다는 말에 후임들의 뒤를 따라 설렁설렁 걸어가니, 단상 위에 올라서 있는 중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예리한 눈으로 그의 관상을 살폈다. 흠, 관상을 보아….
‘좀 비열하게 생겼는데.’
여우처럼 쭉 찢어진 눈, 홀쭉 들어간 얼굴, 왠지 간신 같은 느낌을 주는 콧수염….
그리고 그는 아르콘도 아닌 제국민 출신 같았다. 어쩐지 전체적으로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내가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관찰하고 있을 때, 병사들이 모두 모였음을 확인한 그가 말을 시작했다.
“아, 정말이지 이 부대는 더럽게 춥군.”
‘……?’
“뭐, 나는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이 없으니 알아서 잘 지내보도록.”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단상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딴 부대까지 오게 되다니…! 언젠간 다시 돌아갈 테다.”
중대장의 위엄이라든가, 군인으로서의 직업의식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어리둥절해하며 후임들과 시선을 교환하던 난 조금 전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좌천됐구나.’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경 부근, 그것도 춥기로 유명한 설산 대대는 단언컨대 최악의 위치에 자리해 있는 부대일 것이다. 혹시 이곳보다 더 빡센 특공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곳이 제국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는 오지임은 확실하다.
즉 이 부대는 높으신 분들의 눈에서 벗어난 누군가를 보내 버리기에는 아주 최적인 부대였다는 말이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그가 원래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이 부대를 떠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고,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으니 앞으로 피곤할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넷슴다.”
그리하여 나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껄렁이는 발걸음으로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저 중대장의 인상을 보아 내가 농땡이를 부릴 때 나를 잡는 대신 자신도 함께 농땡이를 부릴 것 같으니, 당분간은 참 편안하겠지.
나와 함께 걷던 후임 한 명이 머리카락은 묶지도 않고 늘어뜨렸고 외투의 단추는 엉망진창으로 잠근 모습을 보며 말했다.
“사루비아 님, 그러고 보니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몸조심하셔야 하지 말입니다.”
“응?”
하긴, 클레도어 산악 대대에는 그런 말이 있었다. 말년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년은 떨어지는 눈도 조심해야 하지 말입니다.”
…설산 대대에서는 그런 버전인 거군. 잠깐, 그렇다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솔직히 눈은 미끄럽고 위험하지. 조심할 필요가 있어.”
“맞습니다. 무사히 전역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조심하십시오.”
“너희가 제설을 해 준다면 내가 무사히 전역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농담조로 실실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내 앞에 있는 후임의 얼굴은 정말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야, 농담이야. 어차피 석 달 남았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참고로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물론 이건 플래그였다…. 내 인생은 단 한 번도 편안하게 흘러간 적이 없었으니까….
* * *
새 중대장이 부임한 후로 몇 주가 지났다. 예상대로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우리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그는 지나칠 정도로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이란 점이었다.
“복도에 계피를 배치해 놔라! 이건 유령을 쫓는 효과가 있어!”
“잠깐, 앞으로 누가 전투에서 죽는다면 말해라! 너희가 돌아올 때 내가 소금을 뿌려 줄 테니까!”
“역시, 상처를 입은 곳에는 간장을 뿌려야 한다니까!”
그래서 온갖 이상한 미신들로 우리를 괴롭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 점을 제외하고는 참을 만했다. 뭐, 원래 군대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 법이니까.
“사루비아 님, 편지 왔습니다!”
오늘은 편지가 도착하는 날이었다. 나는 후임들로부터 몇 장의 편지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건 이시나의 편지였다.
‘잠깐, 이시나라면….’
그는 지금쯤 제대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이시나가 제대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편지겠지.
나는 허겁지겁 이시나의 편지부터 뜯어봤다. 그답게 단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쓰인 편지였다.
『사루비아에게
사루비아, 이 편지는 내가 국경방위군에서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거야. 내일이면 내가 제대하는 날이거든.
너에게 편지를 쓰니 지금까지 너와 있던 일들이 떠오르는구나. 네가 지금까지 카론과 함께 쳤던 다양한 사고들, 그리고 그 사고를 수습하던 나와 아퀼라의 모습…. 그런 것들 말이야.
사루비아, 너도 이제 말년이니 부디 끝까지 몸조심해. 이상하게도 말년에는 꼭 운수가 나빠서 자꾸 부상을 입거나 온갖 훈련에 동원되는 나쁜 일들이 벌어지더라고. 너는 덜렁거리는 편이니까 제발 조심했으면 좋겠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제대하면 가장 먼저 나한테 편지를 보내 줘. 너를 만나러 갈 테니까.
그럼 부디 사루비아 네가 건강히 지내기를 바라며.
+)네가 가끔 나에게 고민 상담 편지를 보냈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하겠구나. 하지만 아퀼라한테 고민을 털어놓는 방법은 추천하지 않아. 걔는 너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좀 극단적이니까. 당연하지만 카론도 추천하지 않아.
대신 앞으로 고민이 있으면 너희 부대 후임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 그 애들도 너와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 과정에서 신뢰를 쌓고 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야.
이시나 보냄』
‘왜 나한테 악담을 퍼붓지?’
말년에 운수가 나쁘다니, 이건 어쩐지 플래그 같은데? 그리고 내가 후임들에게 고민 상담 같은 걸 할 일이 설마 있겠는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는 그다음 편지를 뜯었다. 그건 카론이 보낸 편지였다.
『사루비아 님께!
안녕하십니까, 사루비아 님! 저 카론입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사루비아 님께 미처 말해 드리지 않았던 게 떠올라서 말입니다! 제가 아버지의 유품 목걸이를 통해서 본 환영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안에서 저는 저희 아버지가 부상을 입으신 상태로 눈을 감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건 꼭 칼에 의한 부상 같았습니다.
예전에 사루비아 님께 전해들은 바로는 저희 아버지는 마물에 의해 사망하셨다고 했는데, 목걸이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이상합니다.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편지 드립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루비아 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일이 생기면 또 편지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카론 올림』
“정말 이상하네?”
카론이 보낸 편지도 생각할 게 많은 내용이었다.
분명히 카이센 님은 마물 때문에 사망하셨다고 들었는데, 사실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뜻인가? 잠깐만….
‘뭔가 냄새가 난다.’
로판 세계의 전개에 따라 추론해 보자면, 카론의 아버지는 살해당한 게 분명하다. 사실 그의 죽음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원래 그런 게 로판 세계의 죽음이니까.
‘나중에 이 떡밥이 풀릴 것 같은데….’
대대장님께 떠봐야 하기라도 하나?
“사루비아 양?”
“예?”
그때, 중대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온 중대장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순간 내 손에 들린 편지를 본 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래, 이럴 줄 알고 왔네! 방금 받은 편지를 막 뜯어본 거지?!”
“혹시 무, 무슨 문제 있습니까?”
방금 카론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던 상황이라 그의 등장이 더 수상쩍었다.
“외부에서 온 편지를 뜯기 전에는 편지 봉투를 세 번 털어 내야 복이 달아나지 않네!”
“…예, 알겠습니다.”
역시나, 자신이 믿는 미신에 대한 이야기였군. 에휴, 뭐 중요한 이야기일까 봐 긴장한 내가 바보지.
“사루비아 양, 이것도 받게.”
그런데 그가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이게 뭡니까?”
그 질문에, 그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아주 중요한 편지라네. 내가 간 뒤에 뜯어보도록.”
그는 그렇게 속삭이고는, 얼른 숙소의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왠지 심상치 않은 기색에 나는 편지 봉투를 북 뜯어보았고….
『이 편지는 국경방위군에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어야 합니다…』
“아오, XX!”
저놈의 중대장에게 진지함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하여튼 이놈의 국경방위군에는 멀쩡한 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