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원작의 비밀
황궁 앞 광장. 그곳에는 여러 구의 시신들이 매달려 있었다.
한가운데에 있는 건 금발을 축 늘어뜨린 여자의 시신이었다.
“…또 늦었구나.”
눈앞에 있는 광경을 보자마자 사루비아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목소리엔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아퀼라는 사루비아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동안에도 사루비아는 계속해서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이 자리에서 괜히 수상하게 행동하다가는 그들도 붙잡힐 수 있으므로 자리를 빠져나가야 했다.
아퀼라와 사루비아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으로, 생전 그녀의 행적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그녀는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국가에 불순한 사상을 퍼뜨리고 반역을 시도한 죄. 그러한 명목으로 그녀는 처형되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녀의 죽음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사루비아는 절망했다. 그들이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더 빨리 상황을 파악했다면, 그녀는 처형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사루비아는 생전 그녀와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녀와 몇 번 말을 섞어 보지도 않았기에 그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형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 일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국경방위군에서 함께 생활한 정이 있기도 했고. 뒤늦게나마 그녀의 죽음만은 막기 위해 달려왔는데….
“또 내가 실패했어….”
사루비아가 결국 흐느끼고 있는 동안, 아퀼라는 사루비아를 데리고 묵묵히 산을 올랐다. 아르콘이 그 자리에 있었다가는 마찬가지로 불순한 사상을 가졌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마침내 산의 정상까지 오르자 노을이 지며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사루비아는 자신의 옆에 있던 사람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자 그제야 눈물이 조금 멎었다.
“아퀼라.”
“응.”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들이 시도한 일들은 전부 실패했다.
에이프릴의 처형을 막아 내는 일도 실패했고, 사루비아가 원래 쓰던 몸을 되찾는 일도 실패하고 말았다.
아퀼라는 다른 방법을 또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곤 했었지만 그들은 결국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애초에 사루비아의 영혼을 불러오기 위해 블랙 드래곤의 심장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대단한 행운이었다. 드래곤은 처치하기도 극도로 어렵지만 희귀한 존재인 만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 누리기는 어려운 행운이었다.
사루비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존감이 완전히 박살 나 있었던 이 가엾은 아르콘 여자애에게 몸을 되돌려 주지 못한다.
이 여자애가 끝내 행복해지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넘겨준 몸이었기 때문에, 사루비아는 이 몸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그녀는 국경방위군에서 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동기들, 알타이르, 그리고 수많은 후임들….
오랜 시간 아르콘을 착취해 왔던 흑마술사들은 다시 황제에게 붙어 더욱 기세등등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사루비아 자신을 되찾기 위해 흑마술사에게 비용을 지불했기에 그들도 흑마술사를 도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2황자군을 막아 내기 위해 흑마술사들을 불러들였고, 사루비아가 자신의 몸을 되찾기 위해 몇 번씩이나 흑마술에 쓴 비용은 황제에게 더 부강한 힘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여전히 건재했고, 여러 무리로 흩어져 있었던 아르콘들의 혁명 조직은 체제를 바꾸는 데 실패했다.
그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만 해도 더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안타깝게도 아르콘들의 혁명 조직은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었다.
오늘은 그중에서 가장 큰 조직을 이끌던 여자가 처형당한 날이었다.
이로써 부당한 억압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던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체제 전복이나마 성공했어야 했어.’
달린의 영혼에게 그녀의 몸을 되돌려주고 사루비아 자신의 몸을 되찾는 일에 실패한 뒤, 사루비아는 그녀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혁명이라도 성공시키고자 했다. 보호자 없는 아르콘 여자애가 아니었다면 달린이 그렇게까지 내몰리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마저 실패해 버렸다. 사루비아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아돌브 제국을 내려다보며 사루비아는 결국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눈물을 흘린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퀼라는 말없이 손을 뻗어 사루비아가 흘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 사루비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하지만 사루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눈가는 붉게 변해 있었다.
“아니야, 내가 바꿀 수 있었어….”
주변 사람들은 사루비아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루비아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충분히 이 상황을 바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달린….’
『제 이름을 세상에 남겨 주세요.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같아서.
어떤 식으로든 나는 내 이름을 남기고 싶어.』
그녀를 경악에 빠뜨렸던 달린의 편지를 떠올리다가, 사루비아는 문득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너는 해냈던 거구나. 달린 너는 스스로 네 이름을 남겼어.”
눈물이 왈칵 흘렀다.
어떻게 지금까지 바보처럼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까?
사루비아가 처음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읽었던 소설,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그 소설을 누가 썼는지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달린, 너였구나.’
계약 마법에 걸린 아르콘이 죽음을 맞이할 때, 그 마법이 폭발하듯 분출되면서 몸 주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사루비아는 자신, 아니, 달린의 몸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원래 그곳에 있었어야 할 계약 마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그건 달린의 영혼이 소멸했다는 의미이다. 달린은 이미 죽음을 맞이했다.
죽기 전, 달린은 아마도 ‘소원 마법’을 발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의 이름이 담긴 소설을 남김으로써 달린은 세상에 자신의 발자취를 새겼다.
그래서 사루비아는 달린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그녀는 달린이라는 사람이 국경방위군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읽었다.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쓰여 있던 그 이야기를 그녀는 읽었다.
사루비아와 달린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사루비아는 달린의 이야기를 읽은 뒤 이 세계에 도착했고, 이 세계에서 3년을 보낸 후 죽음을 맞이했다가 달린의 몸으로 들어왔다. 한편 달린은 사루비아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고, 빙의하기 전 사루비아가 읽었던 이야기를 제공했다.
그들의 시간 선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서로의 소원이 얽히고 얽힌 결과였다.
“내가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었지만, 사루비아는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달린의 이야기를 읽은 사루비아는 원래 이 세계의 진행 방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억을 스스로 지워 버렸다.
이전에 국경방위군에 신병으로 들어온 산체스로부터 ‘기억을 선명하게 만드는 사탕’의 존재를 들었을 때, 사루비아는 지구에서의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그때의 그녀는 아직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서 원래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사루비아는 빙의 전 자신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만드는 대신, 원작에 대한 기억을 대가로 바쳐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사히 원작에서의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원작에 대한 정보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멍청한 착각을 해 버렸다.
그때의 그녀는 단지 자신이 원래 있었던 세계가 너무도 그리웠을 뿐인데.
사루비아가 그 기억을 잘 활용하기만 했다면 달린 또한 이 세계에서 스스로 인정받으며 살 수 있었을 거고, 알타이르도 죽지 않았을 거고,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었던 아르콘들의 혁명 조직 동안 하나로 뭉쳐져 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거고, 에이프릴도 처형당하지 않았을 거고….
“너는 아무것도 몰라…. 다 내가 실수해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그때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녀가 저지른 가장 멍청한 실수는 자기 자신이 이 세계를 이토록 사랑하게 되어 버릴 줄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토록 아퀼라를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했던 주변인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했다.
사루비아는 밀려오는 깨달음과 후회 속에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퀼라는 격렬한 감정으로 들썩이는 그녀의 어깨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루비아, 내가 널 위해 뭘 해 주면 될까.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는 것처럼 절박했다. 아퀼라는 자신이 사루비아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했으니까.
가만히 아퀼라의 말을 듣고 있던 사루비아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퀼라, 우리, 있잖아….”
숨을 들이마신 후, 사루비아는 결국 그렇게 물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볼까?”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 사루비아가 이전 세계에서의 자신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원작에 대한 기억을 얻도록 하면… 모두를 지켜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몸을 되찾을 방법을 떠올리며 그들은 온갖 흑마술을 접했다. 사람을 저주로 죽이는 것부터, 빈 몸에 죽은 영혼을 불러오는 것과….
하다못해 시간을 되돌리는 것까지.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사루비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 그건 사루비아를 되찾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고, 그동안 그들이 국경방위군에서 함께 보낸 세월의 의미를 무효로 되돌리는 짓이었다.
하지만 아퀼라는 태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루비아는 고개를 들어 아퀼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게도, 이 순간 그의 눈은 진심이었다.
“너, 시간 마법의 대가가 뭔지 기억하지.”
“그래. 기억이지.”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이론상 존재함에도 이 세계에서 그 흑마법이 결코 쓰인 적이 없는 이유. 그것은 ‘모두의 기억’을 대가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 마법을 위해 필요한 것.
하나, 원한을 품고 죽은 인간이 흘린 피.
둘, 이 세계 모든 인간들의 기억.
모두의 기억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면,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바뀐 것이 있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시간 마법을 사용했더라도, 바뀐 것이 없이 세계는 그대로 흘러가고 의미 없는 마법만 무한 반복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루비아, 처음으로 다시 되돌리면 모두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사루비아는 그 말에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만 있다면.”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퀼라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은 지워졌더라도, 사루비아는 다시 아퀼라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될 정도로 아퀼라를 사랑하게 되려면….
“아퀼라, 너도 다시 나를 사랑할 자신이 있어?”
사루비아에게는 그의 사랑이 필요했다.
“시간을 되돌리면, 내가 이 세계를 사랑하게 만들어 줘야 해.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선택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계속 나를 사랑해 줘야 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는 안 돼. 처음부터 나를 사랑해야 해.”
이를 위해서 사루비아는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퀼라와 더 깊은 사랑을 쌓기 위해서는, 국경방위군에 입대하던 그 무렵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어.”
사루비아가 말하는 ‘이 세계’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텐데도, 아퀼라는 그저 사루비아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사루비아의 부탁대로 다시 그녀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사루비아,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야.”
그는 정말로 다시 사루비아를 사랑하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사루비아는 겨우 멎었던 눈물을 다시 흘리며 아퀼라의 손을 맞잡았다.
산 아래로 황성의 모습이 보였다.
황성 앞에 걸려 있는 시신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원한을 품고 죽은 인간이 흘린 피.’
그녀가 죽으며 원한을 품었으리라는 사실은 당연했다. 그녀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절대 호락호락하게 죽지 않았을 테니까.
주술을 위해 그녀의 피를 사용하면 그 부작용으로 다음 생에서 그녀와 더 깊이 얽히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 기억.
“정말 이 세계를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도 괜찮아, 아퀼라?”
떨리는 목소리로 사루비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사루비아에게 그의 사랑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아퀼라는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정말 그 인고의 세월을 모두 뒤로 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도 괜찮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아퀼라는 묵묵히 대꾸했다.
“네가 있는 곳이 나의 세계야, 사루비아.”
“아…!”
그 말에 사루비아는 결국 시야를 가릴 정도로 펑펑 눈물을 흘렸다. 북받치는 울음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도, 농담처럼 밝은 목소리로 사루비아가 답했다.
“나도 아퀼라 네가 다시 나를 사랑하게 만들게. 나, 완전 자신 있어.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서로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세계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사루비아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거다. 제가 떠나온 세계가 아닌 이 세계를 선택할 거고, 이 세계를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둘은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