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48화 (166/233)

* * *

‘그대로네.’

사루비아가 언제나 그랬듯 밝고 명랑한 태도로 후임들을 보듬어 주는 모습을 보며, 아퀼라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참 사랑스럽고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머리가 욱신거려서 아퀼라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사루비아의 앞에서는 그저 사루비아와 함께 있기 위한 핑계인 척했지만, 아까 전 의무관에게 두통을 호소한 건 진짜였다. 그들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탓에 제대로 된 약은 받지 못했지만.

그러나 사루비아를 보니 두통이 저절로 낫는 기분이라, 아퀼라는 그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요즈음 그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동안의 그는 매사에 예민하게 경계해 오던 편이었지만, 지금은 긴장이 상당히 풀어져 있어서 패티와 매티가 실수로 바닥에 바나나 껍질을 흘려 놔도 피하지 못하고 밟고 미끄러질 것 같았다.

사루비아가 진급하여 설산 대대에 있던 1년간 아퀼라는 정말 미칠 뻔했다.

“하….”

아침에 일어나면 사루비아 없이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해서 어두운 표정을 했고.

“후….”

패티와 매티와 달린이 사고를 치면 당장 달려와 머리를 쥐어뜯을 사루비아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거기에서 사루비아의 부재를 느끼며 괴로웠고.

날씨가 추우면 그가 달래 줘야 할 사루비아가 없었고, 푸딩이 나오면 그의 몫까지 줘야 할 사루비아가 없었고, 군화 끈을 묶다가도 그가 끈을 묶어 줘야 할 사루비아가 없었고, 무지개가 뜨면 그걸 같이 볼 사루비아가 없었고, 비가 오면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 줘야 할 사루비아가 없어서.

정말로 아퀼라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사루비아를 다시 만났을 때.

그날따라 사루비아의 모습이 미칠 것처럼 예뻐서.

“맞아, 이렇게 예뻤는데.”

“…응?”

“1년간 너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서.”

아퀼라는 자신이 보지 못한 사루비아의 모습이 아까워서 다시 한번 미칠 것 같았다.

봄의 사루비아는 예쁘게 핀 꽃들과 어우러지는 밝은 분위기를 뿜어내서 상큼하고, 여름의 사루비아는 녹음 속에서 홀로 쨍하게 빛나서 생기 있고, 가을의 사루비아는 낙엽의 붉은 기운을 담은 듯해서 자극적이고, 겨울의 사루비아는 앙상한 나무 사이에서 홀로 생명력을 가진 느낌이라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 모습을 무려 1년이나 놓치다니, 정말이지 아까운 일이었다.

문득,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놓치는 모습이 더 생길 수는 없어.’

사루비아가 남은 시간을 모두 그의 곁에서 보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기에.

“사루비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오랫동안 속에 품고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고.

『아퀼라에게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결혼하자.

사루비아 보냄』

무려 세기의 명문으로 남을 만한 편지를 화답으로 받게 된 것이다.

그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 아퀼라는 그 귀여운 글씨체와 그에 걸맞지 않게 도발적이고 대범한 내용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그 편지는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할 것이다.

“아퀼라 네가 내 옆에 있으면 그곳이 내 세계야.”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사루비아에게 품고 있던 감정을, 사루비아가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했다.

“나도 그래. 네가 나의 세계야, 사루비아.”

아퀼라는 그제야 자신이 사루비아가 없으면 미칠 것 같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세계에는 처음부터 사루비아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루비아가 사라지면, 아퀼라는 길을 잃은 사람이 되어 어찌할 줄 모르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괜찮을 것이다. 사루비아와 그는, 언제까지나 함께일 테니까.

* * *

“에휴, 하여튼 요즘 자식들은 정신이 빠져 가지고는. 나 때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니까?”

“사루비아!”

출발을 기다리며 루나에게 요즘 후임들의 태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시나 님?”

결코 대열을 이탈하지 않는 이시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급하게 달려오느라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카론 또한 웃는 얼굴로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이시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사루비아, 왠지 내가 제대하기 전에 너를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또 부대 연합 훈련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없을 거야.”

“그걸 이시나 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 다른 얘기를 해 볼까? 내가 너에게 온 건, 떠나기 전에 너한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야.”

그가 부드럽게 내 손을 맞잡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사루비아,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마. 국경방위군에는 늘 위험 요소가 있으니까.”

잠깐, 이거….

“왜 저한테 플래그를 꽂으십니까?!”

“뭐? 플래그? …어쨌든, 부디 마지막까지 조심하고. 제대한 이후에는 내가 편지에 적어 준 주소로 연락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꼭 명심해야 해. 아퀼라와 함께 있느라 편지 보낼 정신이 없어도, 제대한 첫날 바로 편지부터 보내. 내 마지막 부탁이야.”

…왜 이번에는 이시나가 유언처럼 플래그를 꽂는 거지?

찜찜해진 내가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보자, 그는 이제는 익숙해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마지막까지 네가 그대로여서 다행이야….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제대한 이후에도 늘 이대로일 거야, 사루비아.”

이시나는 작별 인사마저 참 흑막 같았다.

그와의 흑막식 작별 인사가 끝나고, 마침내 이시나의 뒤에서 얼쩡거리던 카론이 고개를 내밀었다.

“카론, 넌 또 왜?”

“그냥 사루비아 님이 보이셔서 왔습니다!”

“…얼른 돌아가라. 에휴….”

이시나가 평소에 나보고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며 한숨을 내쉬던 심정이 좀 이해가 가는 것 같다….

그러다 카론을 보내기 전에 해 줄 말이 떠올라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카론, 내가 제대한다고 해도 너를 버릴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그렇게 말하니, 카론이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 이제 걱정 안 합니다!”

“그래? 전에는 네가 걱정하는 것 같길래. 이제 걱정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원래는 루카가 저한테 아퀼라 님이 사루비아 님과 결혼하시면 이전처럼 저를 안 챙겨 주고 저를 경계할 거라고 했는데, 역시 두 분이 저를 버리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까 아퀼라가 카론에게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카론을 분명히 경계하기는 했지만, 또 흑마술 얘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카론을 챙겨 줬지, 음.

고작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집착 남주의 경계를 발동하기에는, 카론은 이미 우리 둘이 업어 키워 놓은 것이다….

“그래, 아까 아퀼라도 말했지만 우리가 결혼한다고 해서 갑자기 너를 대하는 태도가 변할 일은 없잖아.”

“역시 전 두 분을 믿었습니다!”

카론은 기쁜 어조로 나와 인사를 나눈 후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평범하게 자랐을 애를 저렇게 만들다니, 역시 이 썩어빠진 세계가 문제… 잠깐만.

‘이상하다, 요즘 자꾸 내 인생이 기승전혁명인 느낌이 드는데.’

이전에는 기승전탈영이었다면, 왜 요즘은 기승전혁명이 되는 거지? 심지어 로맨스 전개가 일어나다가도 끝은 혁명이었다.

‘아니, XX, 근데 그건 다 이 세계 탓이잖아.’

이 세계를 앞으로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지 10분 만에 나는 다시 이 세계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이 세계가 먼저 나를 괴롭혔다니까요?

* * *

부대에 도착한 뒤, 대대장은 약속한 대로 우리에게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었다. 당분간 우리는 경계 근무에서도 빠지게 되었고, 훈련과 마물 토벌을 모두 쉴 수 있게 되었다.

선임들도 워낙 피곤했기에 부대 청소가 개판이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았고, 그 덕에 후임들도 마음 편하게 낮잠을 잘 수 있게 됐고 말이다.

“휴….”

혼자 쓰는 숙소에 들어와서 드러눕자, 나는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집이 최고…. 아니, 내가 이곳을 왜 집이라고 부른 거지?

‘자괴감이 밀려오는군.’

내가 이 국경방위군에서 지내면서 자괴감이 드는 순간 중 몇 가지를 꼽아 보자면, 그중 단연은 바로 이 순간이다. 무의식적으로 숙소라는 탈을 쓴 내무반을 ‘집’이라고 불러 버렸을 때. 그럴 때는 이런 공간을 집으로 여겨 버렸다는 것에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

하여튼,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복기해 보았다.

훈련하다가, 2황자군을 잡으러 갔다가, 흑마술 아공간에서 빠져나왔지만 결국 2황자군은 놓쳤고, 내가 아퀼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카론에게 정보를 얻었고….

‘정말 긴 하루였다.’

흑마술사를 잡는 일뿐 아니라, 계획대로 2황자군을 놓치기까지 했으니 뿌듯한 기분이었다. 요즘에는 내가 목표한 게 모두 술술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로판 버프인가? 내가 사실은 로판 여주였고, 원래 로판 여주에게는 꽃길이 예정되어 있는 거니까?

“역시 이 세계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또 왜 저러셔? 아까는 이 세계가 어쩌고 하면서 욕하더니만.”

“몰라, 늘 오락가락하시잖아.”

문틈으로 떠드는 후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사랑이 가득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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