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지금 간부들이 흑마술사를 관리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상황에서는 그들을 뚫고 흑마술사에게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았고, 간부들에게 수상해 보일 흑마술에 대한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들의 눈을 피해 몰래 흑마술사에게 접근할 방법이 필요한데.
“달린! …아.”
습관적으로 달린의 이름을 부르다가, 나는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대체 왜 얘는 필요한 순간에 없는 거지?
“하, 그럼 또 누가 있더라.”
이 세계의 최강 어그로꾼 달린이라면 분명히 간부들의 시선을 모두 자신에게 돌려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달린이 없으니, 달린을 대체하여 어그로를 끌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 예를 들어….
“패티, 매티!”
달린만큼은 못하지만 그들은 뛰어난 어그로꾼이었다! 원래 사고를 잘 치는 능력과 어그로 능력은 비례하는 법이니까.
나는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저 멀리 있는 제이슨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제이슨! 그냥 제이슨! 이리 와 봐!”
그러자 제이슨이 울적한 얼굴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의 뒤에는 패티와 매티도 함께였다. 패티와 매티는 늘 제이슨을 따라다니니까.
“…아직도 그냥 제이슨인 겁니까?”
제이슨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패티와 매티를 쳐다봤다.
“패티, 매티,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와! 도움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저희가 필요한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갑니다!”
그들은 머릿속에 꽃밭이 있어서, 남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그저 헤헤 웃으면서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역시 매티매티달린 세트는 잘 쓰면 도움이 된다니까.
“패티, 매티. 너희가 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줘야 해.”
내가 간부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자 제이슨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패티와 매티는 오히려 신난 기색이었다.
“너희가 사고를 쳐서 저 사람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도록 해 줘.”
“완전 자신 있습니다!”
“그건 저희 전문입니다!”
…본인들도 사고를 잘 친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고? 그러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사고를 쳐 댔던 거야?
열받긴 했지만,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며 그들을 격려했다.
“얘들아, 너희도 정말 성장한 것 같더라고! 너희의 능력 믿고 있을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신난 얼굴의 패티와 매티도 간부들이 있는 돌산 쪽으로 다다다 달려갔고.
“으아악!”
“안 돼, 패티!”
곧 패티는 돌산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누가 좀 도와주십시오! 아, 안 돼!”
매티는 그렇게 외치다가 함께 돌산을 굴렀고.
“아, 아니, 저게 무슨!”
두 명의 빨간 머리 병사들이 나란히 돌산을 구르는 모습에 간부들은 그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정말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구르는 모습마저 평범하지 않고 아크로바틱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얼른 흑마술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목걸이를 가진 카론 또한 내 뒤에 따라붙었다.
어느새 나타난 베니 또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카론을 노려보며 내 뒤에 따라붙었다.
“베, 베니! 너 뭐야?”
“저번에 보니 카론 님께 웬 이상한 여자애가 붙은 것 같아서, 견제하는 중입니다! 카론 님의 행동을 감시해야겠습니다!”
“뭐? 네가 카론에게 붙은 여자를 왜 견제…. 아, 루카랑 남주 싸움하는 거구나….”
그렇게 우리 셋은 함께 흑마술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빠르게 달리며 숨이 차올랐기 때문에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역류했지만, 나는 옷소매로 피를 슥슥 문지르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약물의 힘인 건지 흑마술사는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입가에서는 침이 뚝뚝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게, 몸을 움직일 기력도 없어 보였다. 어느새 간부들이 사라지고 병사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잠깐만. 그렇다면.’
문득 이 상황을 더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라서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카론과 베니가 숨을 죽였다.
“사루비아 님,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대신 베니가 흑마술사에게 들리지 않도록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기에, 나는 그녀에게 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늘 충실한 후임이었으니까 이 상황에서도 믿을 만할 것이다.
“흑마술사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 내가 심문하고 있던 간부인 척 자연스럽게 물어보려고.”
그 말에, 갑자기 베니의 눈이 빛났다.
“그건 저에게 맡기십시오.”
“응?”
“저는 간부인 척을 잘할 수 있습니다.”
…왠지 모를 신뢰감이 느껴졌기에, 결국 나는 베니를 믿고 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나는 내가 묻고자 하는 내용을 베니의 귀에 속삭였다. 내 말을 들은 베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한 얼굴이 되어 흑마술사를 보았다.
“에잉, 흑마술사에게 이렇게 당하는 건 나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돌아가면 우리 병사들을 다시 훈련시켜야겠어.”
…뭐지? 왜 베니에게서 아저씨의 목소리가 나는 거지? 게다가 저 말투는 뭐지?
“베, 베니, 그 이상한 말투는 뭐야?”
내가 목소리를 낮춰 물으니, 베니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 성대모사입니다.”
“참 예스럽고 품위 있는 말투다. 계속해.”
저렇게 아버지의 성대모사를 하는 건 불효녀인 걸까, 아니면 아버지의 특징을 잘 관찰한 효녀인 걸까?
하여튼 베니는 심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 아공간, 우리가 갇힌 이 공간에서는 어떻게 나가냐니까? 다시 말해 봐. 거참, 답답해서 원.”
“우선 공간 안에 숨겨져 있는 다섯 개의 보석을 모으고, 보석에 응축되어 있는 흑마술의 힘을 추출해냅니다.”
흑마술사에게서 무기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우리가 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간부들이 흑마술사를 잘 주물러 놓은 것 같아 다행이다. 앞으로의 질문에도 잘 대답해 줄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것으로 마법진을 그린 뒤 사람 다섯 명을 제물로 바치면 됩니다.”
“…뭐? 아니, 이거 미친 XX 아니야?”
그딴 게 탈출 방법이라고?
간부들이 이미 1차 심문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탈출하지 못하고 있던 게 이해가 갔다.
저 파훼법을 실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카론의 아버지의 유품이라든가.
물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흑마술사와 대화를 못 할 테니, 그 전에 뽑아낼 정보는 다 뽑아내야겠지. 나는 베니에게 계속 심문을 하라며 신호를 보냈고, 그녀는 계속 제 아버지의 말투를 흉내 내어 물었다.
“그리고 그 뭐냐…. 이 아공간에서 유난히 고통을 겪는 사람은 왜 그런 거지?”
“흑마술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니까….”
“흑마술이라면 어떤 거지? 자네는 설명하는 능력이 부족하단 말이야, 쯧.”
“엄청나게 큰 범위의 흑마술…. 예를 들어 세계의 구성이나 이동에 관한 흑마술이겠지요….”
“헙.”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서, 나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흑마술을 쓴 건 내가 아니라 원래 이 세계에 살던 누군가였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니!
‘역시 빙의의 영향이 맞구나.’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다. 내가 그 질문을 베니에게 속삭이자, 베니는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한 채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세계의 이동이라고? 그 말은 실제로 다른 세계로 이동할 방법도 존재한다는 건가?”
“물론 존재합니다….”
그건 내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원래 있던 세계라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원래 있던 세계를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원래 있던 세계를 떠올려 보았다.
그곳은 여름에는 시원한 냉방과 겨울에는 따뜻한 난방이 존재했으며, 내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음식들이 존재했다. 지금도 가끔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서 눈물이 흐른다, XX. 사실 내 인생이 더 매운 맛이긴 하지만, 어쨌든.
게다가 재미있는 소설과 만화, 영화, 드라마도 가득했고, 좋아하는 가수들도 있었고, 먼 거리는 멀미 나고 불편한 마차 대신 대중교통으로 싸고 편하게 갈 수 있었고….
게다가 그 세계에서는 이런 X 같은 국경방위군을 안 가도 됐지. 정말 엄청난 장점이었다.
내가 이전 세계를 조금 그리워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흑마술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우리가 모두 놀라 몸을 움찔했지만, 흑마술사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형형한 기운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분명 아까 나랑 만났지…. 넌 엄청나게 큰 흑마술을 사용했어….”
“어….”
“어쩐지, 질문이 이상하더군….”
XX, 우리의 질문으로부터 그가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가 당황하여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흑마술사는 여전히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흥미로운데….”
뭐지? 저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대사는?
“그래, 난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네 얘기를 해주지 않겠나?”
흑마술사가 내게 고개를 들이밀며 유혹하듯 속살거렸다.
“과연 무슨 마법을 썼는지, 어떤 식으로 세계를 바꿔놨는지 궁금하구나…. 네 피와 머리카락도 좀 추출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거 진짜 매드 사이언티스트 맞잖아!
내가 얼른 그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카론이 나를 보호하듯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이미 흑마술사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했다.
“아까 세계를 이동하는 마법이 실존하는지 물었었지. 알려줄 수 있는데, 궁금한가?”
그 말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당연히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지만, 여기서 내가 할 대답은 뻔했다.
“아니, 필요 없어.”
내가 미쳤다고 원래 세계로 다시 돌아가겠는가. 그런 고민을 할 시기는 한참 지났다.
그런 걸 물어보려면 내가 한참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을 때 물어봤어야지! 지금 와서 저런 유혹은 통하지 않는단 말이다.
내가 거부하자 흑마술사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대신, 너한테 물어볼 게 하나 더 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