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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44화 (162/233)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간부들은 아직 제대로 된 대책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클레도어 산악 대대가 있는 쪽을 살폈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난 본능적으로 아퀼라를 찾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야, 레드. 애들 잘 데리고 있어 봐.”

“예? 예….”

갑자기 지목당한 후임 지휘사관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숨겨 클레도어 산악 대대 쪽으로 접근했다.

“아퀼라!”

“사루비아.”

그가 불쑥 나타난 나를 자연스럽게 품에 안아 주었다. 그는 이 상황에 별로 당황하지 않은 듯 보였다.

“대체 이 공간은 뭐일 것 같아? 빠져나갈 수 있긴 한 걸까?”

“그러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흑마술인데.”

나는 너무나도 침착해 보이는 아퀼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왜 이렇게 안 놀랐어?”

“놀랄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왜? 갑자기 갇혔잖아.”

“하지만 너도 같이 갇혔잖아.”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왠지 그 대답에 부끄러워져서 볼을 붉히고 있으니, 아까부터 흐뭇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베니가 헤 웃었다. 나는 이제 쟤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안다.

“아니, 너희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그러고 있니? 일단 스스로의 목숨부터 소중히 여겨 주면 안 되는 걸까?”

“이시나 님?”

불쑥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이시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얘들아, 영창이 가고 싶어?”

“…아닙니다.”

내가 아퀼라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니, 그제야 이시나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목숨이 위험에 처했는데, 너희가 사랑을 하는 것도 좋지만, 아니, 솔직히 나쁘지. 어쨌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먼저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을 듣고 나는 현실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아퀼라와 로맨스를 전개하더라도 이 세계가 미쳐 버린 아포칼립스고 지금 우리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내가 그와 ‘진실된 사랑’ 어쩌고를 한다고 해도 흑마술사가 감격해서 우리를 갑자기 풀어 주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는다.

상황은 여전히 심각했다. 간부들은 어두운 얼굴로 회의를 계속하고 있었고, 후임들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파 소대 후임들의 틈에서 산체스를 발견해 냈다.

“산체스, 오랜만이다!”

내가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산체스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시나 님, 사루비아 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너도 잘 지냈냐?”

“예, 저는 매일 윗몸 일으키기 1,000개, 팔굽혀펴기 2,000개, 연무장 500바퀴를 돌며….”

“으응, 잘 지내고 있었구나.”

대충 평소의 산체스처럼 살고 있었다는 소리 같다.

“산체스, 너는 이 흑마술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없냐?”

“아, 아까 보니까 간부들도 알고 있던 것 같지만 이 상황은….”

산체스가 험상궂은 얼굴로 돌산 너머를 보며 말했다.

“이 공간 자체가 거대한 흑마술로 이루어진 아공간일 겁니다. 다만 환각 마법도 일부 섞여 있어서 실제 지형보다 더욱 넓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것도 알아?”

모르는 흑마술이 없는 게 신기해서 그렇게 물으니 산체스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전에 흑마술사가 이런 아공간에 저를 가두려 했지만 제가 그의 팔을 꺾어서 뒤로 넘긴 뒤….”

“으응, 그 부분은 생략해도 돼.”

역시 산체스였다.

간부들에게서 얻었던 정보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심드렁한 얼굴을 했을 때, 산체스가 모두를 집중시키는 말을 꺼냈다.

“이런 아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 한 명 이상의 흑마술사가 갇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그 말에 내 눈빛 또한 날카로워졌다.

“그럼….”

“예, 아마 그 흑마술사를 잡아 족친다면 이 공간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아공간을 유지시키는 매개체라도 있을 테니, 그걸 파괴하면 될 거고 말입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흑마술사를 찾으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싼 돌산은 울퉁불퉁한 지형 탓에 그곳에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기 어딘가에 흑마술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으면 흑마술사의 인력만 낭비되는 거 아냐? 차라리 다른 마법을 이용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러나 다음 순간 산체스가 한 말 때문에 내 표정은 곧바로 심각해졌다.

“그건 제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 아공간은 흑마술로 만들어진 공간이어서 인체에 유해합니다.”

“그래? 얼마나?”

“제가 알기로는 각종 독성 물질과 발암 물질이 다소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혈압을 높이고, 두통을 유발할 수 있고, 암 발병률을 3배 높이고, 심근경색과 뇌경색의 위험도도 높아지며, 기침이나 가래를 유발할 수 있고….”

“너 의사였니? 아니, 대체 그런 정보를 어떻게 다 외우고 있는 거야?”

이상하다. 꼭 금연 광고를 보는 기분인데.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산체스를 쳐다봤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설명을 끝맺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점점 생명력을 빼앗겨 단시간 내에 말라 죽게 될 겁니다.”

“아니, 그것부터 설명했어야지!”

두괄식으로 말을 해야지, 미괄식으로 말을 하다니! 아직도 군대 물이 제대로 들려면 멀었군.

이곳에 조금만 더 오래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왠지 아까는 멀쩡했던 몸이 아파 오는 착각까지도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불안감이 담긴 손으로 스스로의 몸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쨌든 빨리 흑마술사를 찾아내서 잡아 족쳐야겠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흑마술 아공간 따위에서 말라 죽을 수는 없었다, XX.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공간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흑마술사에게는 참 안타깝게도, 폭력과 공포는 국경방위군의 전문이었다. 그들은 곧 탈탈 털리게 될 것이다.

* * *

간부들은 금방 회의를 마쳤는데, 그들 또한 추가적인 정보 교환을 통해 이 안에 흑마술사가 있다는 사실을 추측해 낸 모양이었다. 그들은 산체스가 우리에게 설명했던 내용과 같은 것을 병사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나는 설산 대대로 다시 돌아왔다. 부대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설산 대대 병사들이었지만 흑마술사는 낯설어하는 듯했다.

“너희는 외부 근무로 흑마술사 수색 안 해 봤어?”

“예, 저희는 그런 임무는 잘 나가지 않습니다.”

빡센 설산에서 살아남는 게 주요 임무였던 그들에게 이런 임무는 오히려 처음이라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이번에도 내가 너희들을 잘 이끄는 수밖에.”

“하하, 사루비아 님. 제대도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편히 쉬시면 저희가 알아서 잘….”

“아니, 처음 상대하는 흑마술사 때문에 후임들이 다치도록 둘 수 없지. 이제부터 내가 하나하나 잘 챙겨 주겠어.”

그 말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후임들은 자신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휴, 후임들을 챙기는 나, 역시 멋진 선임이다.

그렇게 우리는 수색을 시작했고, 바위로 가득한 울퉁불퉁한 산을 올라야 했다. 물론 국경방위군에 있는 병사들은 이미 산이라면 눈을 감고도 오를 정도로 익숙해서 등산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지만.

“다들 몸은 괜찮아?”

생명력을 뺏긴다던 산체스의 말을 곱씹으며 난 후임들에게 이상이 없는지 돌아보았다.

“예, 괜찮습니다.”

“다들 아무런 이상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후임들은 모두 멀쩡해 보였다. 왜지? 우리가 너무 강인한 건가?

“사루비아 님!”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부대의 선봉에 선 카론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사루비아 님, 여기 계셨지 말입니다!”

“응, 아까부터 여기 있었어.”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나도 너희랑 마찬가지로 갇혀 있잖아….”

나는 자연스럽게 행군 속도를 늦춰서 카론과 대화할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걷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카론의 목에 걸린 익숙한 목걸이를 발견했다.

“카론, 그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구나!”

내가 예전에 전해 준 카론의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그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찾아 준 것 같아 내가 뿌듯하게 웃었을 때.

“예, 사루비아 님이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그, 보통 아버지의 유품은 아버지가 주셨다고 표현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 말에, 카론이 진심으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 그런 겁니까?”

“…뭐야?”

분명히 저번에는 이 목걸이에서 뭘 봤다는 식으로 말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유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저는 그냥 이 목걸이 안에 있는 꽃이 사루비아 님의 눈 색을 닮아서 좋았습니다!”

“그럼 저번에 이 목걸이 안에서 봤다는 건….”

“예, 사루비아 님의 눈 색을 봤습니다!”

그 말에 나는 아연한 눈으로 카론을 쳐다봤다.

그래, 그랬구나….

고작 꽃 색이 내 눈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목걸이를 마음에 들어 했던 거구나. 그 정도는 되어야 여주에게 집착하는 남자라고 할 수 있는 거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대대장이 이걸 줄 때 카론이 진짜 목걸이의 주인이 맞는다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 했었는데. 카론은 그 사이 뭔가 알게 되기는커녕 내 눈만 떠올리고 있었구나….

애초에 저 목걸이의 주인인 카이센이라는 사람이 카론의 아버지인 건 맞는 걸까? 문득 나는 의심스러워졌다.

설마 내가 로판 세계의 클리셰만을 믿고 ‘당연히 카론의 아버지지!’라고 생각해서 엉뚱한 사람한테 유품을 가져다준 건 아니겠지?

“카론, 목걸이에 집중해 봐.”

“사루비아 님의 눈 색에 말입니까?”

“아니, 목걸이를 보면서 네 아버지라도 떠올려 보라고!”

그러자 카론이 멀뚱멀뚱 목걸이를 쳐다보더니,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목걸이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엄청난 집중력이 감돌았다. 역시 내가 시키는 일에는 늘 최선을 다하는구나….

“아버지의 이름, 카이센….”

카론이 그렇게 읊조리며 목걸이를 노려봤을 때.

파앗-!

갑자기 목걸이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주변 사람들은 기겁하여 카론에게서 떨어졌지만, 카론은 홀로 그 빛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빛 너머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

그가 탄성을 흘렸다.

순간적으로 나는 카론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성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꼭 빛 너머의 무언가로부터 새롭게 깨달은 게 있는 것처럼.

* * *

카론은 목걸이의 빛 너머의 환영을 보고 있었다.

환영 너머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몸 아래로 흐르고 있는 피를 보면 심각한 부상을 입은 듯했다.

‘검에 베인 흔적인데?’

그 상처를 보며 카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뛰어난 검사인 아퀼라와 윈터를 가까이서 봐 온 사람이고, 그들이 검을 쓸 때 어떤 식으로 흔적을 남기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가 왜 검에 베여 부상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루비아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마물과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얘기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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