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날 잡히지 않았던 병력이 흑마술을 발동해서 뭔가 하려는 게 틀림없어.”
내가 원한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점은 많았다.
“2황자는 이미 사망해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권력을 잡으려는 거야? 진짜 높으신 분들의 속내는 알다가도 모르겠네.”
나도 황실이나 귀족가의 영애로 빙의했다면 이 나라의 정세를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궁에서 정치를 할 때 나는 기껏해야 군에서 정치질을 해야 하지, XX.
이시나는 생각에 잠긴 듯 가라앉은 눈을 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 발악일 것 같은데…. 수십 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발동한 흑마술이 어떤 효력을 낼지 몰라.”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함께 고민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간부들의 지시를 따라 이동해야 했으니까.
“일단 나중에 다시 보자.”
“그래, 사루비아. 제대하면 바로 결혼하는 거야.”
이 와중에 아퀼라는 나에게 청혼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듯 결혼을 힘주어 말했다. 물론 이시나와 카론도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루비아, 먼저 제대하면 기다리고 있을게.”
“사루비아 님, 저 버리시면 안 됩니다!”
음, 아무래도 지금 다들 나한테 집착하는 것 같은데.
그들이 나한테 집착할 때는 그냥 순진하고 아방한 무언가인 척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원래 고도로 눈치가 빠른 자는 눈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법이니까.
“응, 그래, 호호.”
얼른 눈치 없는 여주처럼 웃어 보인 다음에 나는 내가 있던 부대로 합류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후임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지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시받은 대로 무장을 마치고 있기는 했지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지휘사관들, 이리 오도록!”
“예!”
때마침 설산 대대의 대대장이 부르기에, 나는 다른 지휘사관들과 함께 그쪽으로 달려갔다.
모두 자리에 모이자 대대장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 대충 들었겠지만, 지금 수도로 2황자군이 진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마침 우리가 있는 훈련장에서 빠르게 이동한다면 그들의 길목을 막을 수 있으니, 우리가 방어해야 해.”
그의 말대로 지금 우리는 이 훈련을 위해 국경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마침 이곳이 2황자군이 지나게 되는 길인가 보니, 그렇게 된다면 이 긴급 임무에 우리가 동원되는 것도 설명은 된다.
이어서 대대장은 내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 또한 입에 담았다.
“지금 2황자군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어.”
나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혁명을 위해서 2황자군 쪽과 손을 잡을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2황자군은 이전부터 아르콘을 탄압해 왔던 황실 쪽이고, 우리와 적대관계인 건 마찬가지이니. 그냥 우리의 적이 두 무리로 늘어난 것이다.
…그들이 서로 싸우는 틈을 이용한다면 뭔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뭐, 어차피 지금 나는 국경방위군 소속이니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겠지.
“2황자군 쪽 세력이 흑마법을 사용해서 무언가 할 거다. 다들 방심해서는 안 돼.”
그 말에 지휘사관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얼마 전 2황자군 진압 임무에 이미 참여해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주요 임무는 마물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요즘 자꾸 인간을 상대하는 일을 맡게 되긴 했지만 아직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흑마법이 간섭해 있는 만큼 긴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병사들은 충분히 강하고, 다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시만 잘 따라 협동한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 있어. 모두 자신 있나?”
“예!”
물론 정말로 자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거기서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멍청이는 당연히 없었다.
* * *
그 후 우리는 이동을 시작했다.
다수의 병사들이 우르르 이동하니 인근 사람들도 뭔가 일이 생긴 것을 깨달은 듯했다. 우리가 지나는 길마다 마을 주민들이 놀란 눈을 하다가 집 안으로 숨어 버렸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우리 소대의 선봉에 서서 걸으며, 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아오, XX. 난 그냥 빨리 결혼이나 해야겠다고. 내가 로맨스를 하겠다는데! 이 세계가 나를 도와주질 않잖아! 내가 보기에는 이 세계가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게 문제라니까?!”
“사루비아 님, 정말 결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내 뒤에 있던 루나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냐?”
“…하긴, 두 분이서 정말 어울리는 것 같긴 했습니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루나가 왠지 이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가, 또 무언가를 떠올린 듯 초롱초롱한 눈이 되었다.
“그런데 사루비아 님은 언제부터 그분을 사랑하신 겁니까?”
“응?”
나는 루나의 말을 듣고, 내가 언제부터 아퀼라를 사랑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대체 언제부터였더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폭포에서 나를 붙잡아 줬을 때부터? 그 후에 나를 챙겨 줄 때부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아하, 자연스럽게 스며드신 사랑! 뭐 그런 겁니까?”
“그런 건가?”
나는 내가 언제부터 아퀼라를 사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확실히 아퀼라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나를 여러 번 구해 줬고, 나를 자주 챙겨 줬고, 나를 대신하여 총대를 멘 적도 있고,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무엇보다도 그는 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꽤 변덕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퀼라는 나도 모르는 내 성향까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료들이 사망한 이후 내가 가끔씩 느끼고는 하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 또한 느끼고 있을 거고 말이다. 그는 나와 감정을 공유하고, 내 불안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데에 계기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반대로 계기가 너무 많다고 할 수 있겠지. 정확히 어떤 시점부터 그를 사랑했는지 짚어 낼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는 그를 사랑할 이유가 넘쳐났고, 그래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2황자군이 지날 예정이라는 길목에서 우리는 매복을 시작했다.
다들 나무와 풀숲 틈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는데, 사실 내가 보기에 썩 효과적인 매복은 아니었다. 우리의 남색 제복은 꽤 눈에 띄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2황자군이 빠르게 움직이느라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총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긴장이 됐다.
이번 임무에서는 정말로 이 총을 이용해 인간을 죽여야 할 것이다. 상대방도 총을 들고 있을 테니 우리 쪽에서도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길 것이고.
우리를 억지로 밀어 넣은 이 전쟁터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이 순간에도 팔목에 새겨진 금빛 문양은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게 사라지지 않는다면 탈영할 수는 없겠지….
“좀 무서운 것 같습니다.”
내 옆에서 루나가 그렇게 속삭였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온다.”
땅의 울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윈터가 그런 소리를 하면 “역시 윈터.”라며 감탄하고는 했는데, 이제 내가 땅의 울림을 느끼는 경지에 올랐다니. 국경방위군, 정말 대단한 곳이다….
이 진동으로 보아 많은 수의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설산 대대는 제일 강하다는 이유로 최전방에 있으니,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우리 부대가 될 것이다.
발맞추어 걸어오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저들이 흑마술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대대장이 그렇게 지시를 내리려던 순간, 그들과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격!”
대대장이 황급히 외쳤고, 우리가 모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 순간.
쾅-!
앞장서던 2황자군 중 한 명이 이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꼭 폭탄이 터질 때와 같이 요란한 굉음이 울리더니 연기가 앞을 가렸다.
“으아악!”
사방에서 놀란 소리가 들렸지만 비명은 곧 가라앉았다. 살벌한 소리와는 다르게 그것이 어떠한 고통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막탄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연막탄을 던지고 이 길을 빠져나가려는 수법인 것 같았다!
“빨리 벗어나! 추격해!”
대대장이 우리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렸을 때, 연기가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의 앞에 드러난 풍경은….
“…어?”
방금까지 우리가 매복해 있던 풀숲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의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낯선 돌산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조금 전까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2황자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국경방위군의 병사들만 남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짬밥을 이만큼 먹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흑마술….”
그들이 던진 폭탄은 아마 흑마술과 관련된 물건이었을 것이다. 우린 마법적 힘에 의해 낯선 장소로 옮겨졌거나 가상의 장소에 갇힌 게 분명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모든 국경방위군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저 먼 곳까지 샅샅이 살폈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어? 여긴 어디지?”
“그러게? 여긴 어디지?”
“우와, 우리 저 산을 올라가 볼까?”
“으음, 저기 있는 산은 어때?!”
“제발 조용히 좀 있어….”
멍청하지만 해맑은 목소리로 외치는 패티와 매티의 사이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제이슨이었다.
이곳에 갇힌 병사들 중에는 우연히 클레도어 산악 대대의 병사들도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흑마술이 분명합니다.”
간부들은 내가 위치해 있던 곳 부근에 모여 있었기에 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여기까지 들렸다. 그들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러대며 회의를 시작했다.
“예전에 흑마술 수색 특수군에 몸을 담은 적 있어 잘 아는데, 이건 아공간을 만드는 흑마술이 분명합니다.”
모여 있던 간부들 중 한 명이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공간? 그럼 여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라는 겁니까?”
“예, 다만 이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그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거의 이용되지 않는 마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 2황자군의 거처 측에서 발견되었던 시신들과 마법진이….”
“아, 그렇게 됐던 거군요!”
그들의 말을 듣다 보니, 아까 아퀼라가 말해 줬던 내용이 떠올랐다.
진을 그리기 위해 수십 명이 희생한 흔적이 있었다고 했지. 그게 사실은 이런 아공간을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니….
‘그보다 왜 이놈의 군대는 대비라는 걸 할 줄 모르는 거지?’
도대체 왜 일이 터진 뒤에야 행동하는 걸까? 무슨 마법을 쓸지 미리 추측하고 예방할 수는 없었나?
내가 국경방위군에 다시 열받아 하고 있을 때, 간부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더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이 아공간에 심각한 위험 요소가 있었습니다.”
“위험 요소요?”
“예, 제물을 바치더라도 이런 공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흑마술사들이 자신들의 창고로 이용하거나 위험에 빠졌을 때 이곳으로 탈출했겠죠. 그런데 그렇게 쓰지 않았다는 건, 이 공간 자체의 부작용이 매우 크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있군요….”
그들의 말대로, 내가 아는 흑마술사라면 사람 수십 명을 희생시키는 게 어려워서 이런 아공간을 만들지 않을 인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공간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겠지. 아마 이 공간 자체에 어떤 치명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거나, 한번 갇히면 다시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형식일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엄청나게 위험한 흑마술에 당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