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아퀼라의 눈에 집중했다. 뜨겁지만 무서운 느낌은 아닌 주황빛 눈. 어두운 곳 아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루비의 붉은빛이 되기도 하는.
갑자기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느껴져서 나는 눈을 어디로 둘지 몰라 어색하게 땅을 바라보았지만.
“사루비아 님, 아까 그놈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나와 아퀼라 사이에 다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카론은 진심으로 내가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물었다. 그래, 진심이긴 하겠지. 하지만 저 말 뒤에 그놈을 조지지 않아도 되겠냐는 물음이 함의되어 있을 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습니까? 저는 마음이 아파서….”
그러나 카론이 대화를 이어 가려 시도하자 아퀼라가 곧장 끼어들었다.
“사루비아, 네가 보낸 편지 말이야.”
‘…이런 미친.’
나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안다. 지금 남주 둘이 서로 내 관심을 받아 보려고 기 싸움을 하는 거다!
서브남이 등장하거나 역하렘인 로판에서는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씬이란 말이다!
카론은 누나를 보내기 싫어하는 로판 집착 남동생 타입이겠지만, 어쨌든 내게 집착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세상에,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이 역하렘이었군. 엔딩이 원앤온리일지 다같살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역하렘이라니….
이전에 아퀼라와 윈터가 나를 두고 기 싸움을 할 때도 나는 순진하고 아방한 여주처럼 ‘와, 역시 속성이 반대라서 둘이 싸우는 모양이다, 헤헤.’ 이 XX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내가 원작의 달린과 다를 바가 뭐였던 거지?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눈치 없는 여주처럼 연기라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사루비아.”
그래, 두 명의 남주들이 기 싸움을 하고 있으면 이제 한 명 더 등장해 줘야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이시나에 나는 그만 뒤로 넘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나는 남자 세 명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애 당황하잖아.”
이시나는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로 아퀼라와 카론에게 말했고, 카론은 침울한 표정을 하면서도 내게서 물러났다.
‘이시나도 굳이 따지자면 로판 집착 남주보다는 로판 집착 오빠 타입이겠지만, 집착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 뭐….’
그들의 사이에 낀 채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남주 후보들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니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하여튼 나는 고민을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앞으로 이 인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시나가 좋다. 이시나는 언제나 내 고민을 잘 들어 줬고, 잔소리가 좀 많기는 해도 진짜 내 가족처럼 나를 잘 챙겨 줬다.
반대로 카론은 그동안 내가 챙겨 주던 대상이었다. 아퀼라와 함께 애 하나를 키우는 것처럼 열심히 키우다 보니 카론도 진짜 내 가족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들과는 앞으로도 계속 가족처럼 지내고 싶었다. 다행히도 이 두 명이 나를 소중히 여기긴 하지만 완전히 이성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긴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집착하는 것 외에는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들이 정말 나를 가족으로 여기는지 시험해 봐야겠다.
“이시나 님.”
“응?”
이시나가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혹시 만약에, 제가 설산 대대에서 간부한테 하극상을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사루비아, 그건 아니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수단을 쓸 수 있잖아! 아니, 일단 무슨 일인데?”
그가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제발 속 좀 그만 썩이고…. 우선 대화부터 해 보자.”
내가 이번에는 아퀼라 쪽을 보며 물었다.
“아퀼라, 그럼 너는?”
“사루비아 네가 하극상을 했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이시나와 달리,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역시.’
속 좀 그만 썩이라며 한숨을 쉬는 이시나의 모습을 보라. 아퀼라와 대조되는 태도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시나랑은 지금처럼 지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이시나를 가족으로 여기듯, 이시나도 나를 가족으로 여기는 것 같으니까.
그럼 남아 있는 건 카론의 문제인데….
“카론.”
“예?”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카론이 늘 그러하듯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제대하고 난 뒤에도, 나랑 아퀼라 근처에 살 거지?”
“예, 그렇습니다!”
아퀼라가 찜찜한 눈빛을 했지만, 나는 장단을 맞추라는 의미로 팔꿈치로 그를 툭툭 쳤다.
“너는 우리의 친가족 같은 존재니까, 늘 나랑 함께 있을 거잖아. 안 그래?”
“아….”
그 말에 카론의 눈에 감격의 빛이 비쳤다.
“정말 저랑 계속 있으실 겁니까?”
“그래.”
“두 분이서 결혼하시더라도 저를 버리시지 않을 겁니까?”
…그런 거였나? 갑자기 왜 아퀼라를 견제하나 했는데, 내가 아퀼라와 결혼하면 자신을 버릴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너는 우리의 친….”
잠시만, 대체 카론은 무슨 존재이지? 친동생? 친아들? 아니면 키우는 강아지…?
“친… 어쨌든 친가족 같은 존재잖아.”
결국 나는 ‘가족’이라는 말로 대충 뭉뚱그리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표현을 쓰는가는 카론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듯, 그가 만족한 얼굴을 했고.
“…내가 사루비아랑 결혼하더라도, 네가 사루비아를 못 만날 일은 없지. 사루비아는 네 친누나 같은 존재잖아, 안 그래?”
아퀼라가 그렇게 말하며 끼어들자, 그는 완전히 얌전해졌다. 이걸로 이제 그도 나를 다시 가족으로 생각하게 될 거다!
‘드디어 해결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나에게 집착하겠지만, 그래도 복잡하게 얽힌 이 관계를 풀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나는 이참에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오늘 훈련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 건 좋지만, 어떤 XX가 이런 XX 같은 훈련을 생각해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렇네, 하하.”
이시나가 어색하게 나를 따라 웃어 보였다. 왜 저렇게 웃는 얼굴이 어색해 보이지. 흠, 설마 나를 친동생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훈련을 진행해도 안전한 겁니까?”
“응?”
“부대별 전투력 측정이라는 명목의 훈련 때문에 많은 부대가 지금 이곳에 나와 있는데, 혹시 국경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남아 있는 부대의 인원이 충분해서 아마 훈련 동안엔 별일 없을 거야.”
이시나가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혹시 국가 재난이 터져서 우리가 동원되지 않는 한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아하,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국경방위군에 들어온 뒤로 나는 온갖 불운한 사건들을 겪었다. 내가 “에이, 설마. 여기서 무슨 일이 터지겠어?”라고 하면, 상상을 벗어난 일이 터지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프, 플래그다.”
“뭐?”
“플래그를 밟아 버렸어!”
위기를 감지한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아퀼라가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감으며 토닥여 주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사루비아.”
“아냐, 그게 아니라고! 너는 아직 이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그냥 기우일 거야.”
그렇지만 아퀼라의 품에 파묻힌 내가 여전히 안절부절못했기에, 아퀼라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사루비아, 너희 부대는 2황자군 진압 사건 때 창고 폭파를 맡았다며?”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아퀼라와 이시나의 부대도 그날 동원되었을 텐데, 난 카론밖에 보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다른 임무를 맡았을 테니까.
“너희는 2황자군을 진압하는 일을 맡은 거야?”
“그랬지.”
“그게 더 어려웠겠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일이었으니, 그들의 부대에서는 사상자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걱정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보자, 아퀼라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말했다.
“아냐, 별로 어렵지 않았어. 2황자군이 그리 많지 않았거든.”
“그래? 수가 꽤 된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그날 그들의 본거지에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어. 그들을 모두 진압하기는 했지만, 간부들은 2황자군 측에서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대피한 게 아닐까 불안해하더라.”
아퀼라는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는 의도였겠지만,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2황자군 진압 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 아닌가?
“그래? 국경방위군에서는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사람이 없었어?”
“응, 수십 명밖에 안 됐어.”
“그리고 이상한 점도 하나 있었지.”
나와 아퀼라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시나가 끼어들었다.
“흑마술의 흔적이 있었잖아.”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또다시 흑마술이라고? 내가 맹렬한 관심을 쏟고 있는 주제가 나왔기에 나는 눈을 번쩍 떴고, 이시나가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2황자군의 본거지를 지키는 인원은 몇 없었고, 대신 그곳에 흑마술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주술진 같은 게 있었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대형 흑마술인 듯했어.”
아퀼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진을 그리기 위해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진은 그 피로 그려져 있었거든. 희생된 사람들은 2황자군은 아닌 것 같고, 2황자군이 이용한 제물 같았어.”
“아퀼라, 애 잠 못 자게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왜 해.”
“사루비아는 오히려 자세히 알려 주지 않는 쪽을 더 답답해하니까 말입니다. 그나저나 사루비아, 흑마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아퀼라가 카론 쪽으로 턱짓을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론의 손을 잡으며 그들의 설명을 들었다. 흑마술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혹시 카론이 가진 트라우마가 자극될 수도 있으니까.
내가 그의 손을 잡아 주자, 카론은 완전히 풀린 표정이 되었다. 특히 이제는 아퀼라에 대한 경계마저 풀린 모양이었다.
아퀼라도 조금 전에 카론과 기 싸움을 했으면서 이럴 때는 우리 애처럼 챙기다니, 역시 몇 년간 습관이 들긴 했나 보군.
“그래서 그건 무슨 흑마술일 것 같습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그들은 알지 못하는 듯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알아내지 못해서. 위에서도 말이 많은 걸로 알아.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사루비아.”
그렇지만 이시나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 일에서 관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2황자군이 흑마술사와 결탁한 것 같은데, 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원래 황실은 흑마술사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까?”
“흑마술사들도 탄압 속에서 살아날 방법이 필요하니까, 공동의 목표를 위해 2황자군 쪽과 손을 잡은 게 아닐까 싶은데. 그들이 반역에 성공한다면 다시 흑마술에 대한 탄압을 거두는 식의 약조를 했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임무 이야기를 꺼낸 거였지만, 나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이 세계에서는 ‘어? 혹시 플래그?’라고 생각하는 순간 플래그가 터졌으니까.
그러나 옆에 카론이 있는 상황에서 내 불안감을 티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애써 의연한 척하려 했으나….
그 순간, 장교들 중 한 명이 허겁지겁 훈련장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긴급 임무다! 전원 총기 챙기고 출동 준비해!”
“아오, XX! 봐 봐, 꼭 불안하면 일이 터진다니까?!”
이 세계에서 나는 걸어 다니는 화재 감지기쯤 된단 말이다! 내가 이 세계의 플래그를 얼마나 잘 예측하는데!
“…진짜 일이 터졌네.”
“와, 사루비아 님! 사건이 벌어질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퀼라가 침울해하고 카론이 감탄하는 동안에 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을 탕탕 쳤고, 장교도 긴장감이 실린 목소리로 훈련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남아 있는 2황자 쪽 병력이 수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막아야 해!”
정말로 내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탈영하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