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훈련은 정말 별거 없었다.
우선 첫 시작은 사격 훈련이었는데, 몸을 써야 하는 장애물 훈련이나 흙탕물을 구르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수월하게 사격 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다음 훈련이 시작되기 전, 나는 다시 이시나에게 접선할 수 있었다. 그가 아까 했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퀼라와 결혼해도 될까?’
이시나의 말과 달리, 나는 사랑이 식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로판 세계이다. 그러니 아퀼라는 나를 평생 사랑할 것이다. 절대 식지 않는 열렬하고 헌신적인 사랑 말이다. 그게 로판 세계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퀼라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우리는 생활 습관까지 함께 맞춰졌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일도 없었다.
다만 결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니, 주변인들의 의견을 더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솔직히 오랜 시간을 국경방위군에서 보낸 만큼 내 기준은 남들과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시나 님.”
“왜, 사루비아.”
그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가 몸을 웅크린 채 물었더니 이시나가 특유의 다정한 어조로 답해 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
“저는 제가 아퀼라와 결혼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이시나 님도 정말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이시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상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뭘 걱정하는 거야, 사루비아. 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그냥 운명인데.”
“운명 말씀이십니까….”
그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는 게 낯설어 내가 되물으니, 이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객관적으로 아퀼라는 좋은 결혼 상대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얼굴 좋지, 몸 좋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바람피울 일 없고 나만 보지, 유능하지, 집안일 잘하지. 육아도 아마 잘할 것이다.
“너는 예전부터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잖아. 너와 아퀼라는 서로 사랑하고, 아퀼라는 너에게 있어 최적의 사람이야.”
“역시 그렇지 말입니다.”
“그래, 네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데리고 왔으면 내가 진즉에 뜯어말렸어. 그리고 차라리 내가 데리고 살았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뭐?’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커진 눈으로 이시나를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 때문에 그가 방금 한 말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 하. 알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가 방금 뭐라고 말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므로 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대충 감이 잡히는 것 같다.
“차라리 내가 데리고 살았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저게 정말 여동생처럼 친하게 여기는 후임을 대하는 태도가 맞나?
아무리 아끼는 후임이라 하더라도, 네가 이상한 사람이랑 결혼하게 두느니 내가 데리고 살 거라고 말한다고?
나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눈치 없이 굴어 왔던 건 전적으로 이 세계가 나에게 너무했기 때문이고, 원래는 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단 말이다.
나는 이시나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X됐다.’
솔직히 아퀼라와 윈터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 설마 이 사람까지 그러겠어~?’라면서 눈치 없이 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고스트그룸으로부터 겨우 살아남았을 때, 이시나가 보인 태도를 떠올려 보도록 하자.
본래 인간에게 아무런 정을 붙이지 않던 이시나는 그 일로 인해 나를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유일하게 정을 붙인 사람’이라니, 그에게 있어 나는 아주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마침내 확신했다.
이시나가 나한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아퀼라나 윈터와 같은 정도의 것은 아니더라도, 그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친여동생을 대하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감정이다.
그는 나에게 내 생각보다 훨씬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성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를 미친 집착남주로 돌변하게 만들 그런 감정 말이다.
갑자기 내 인생에 진짜 로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이시나는 놀란 눈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루비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흠.”
오늘 사루비아를 본 것으로, 그의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역시 그는 사루비아의 남편 자리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루비아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결혼을 할 마음도 없었다.
물론 사루비아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사루비아가 원하지 않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루비아가 원하는 모습이 될 자신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사루비아에게 아퀼라와 정말 결혼해야겠냐고 묻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은 깨질 수 있어.’
만일 사랑이 식는다면, 결혼은 깨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와 사루비아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기반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고, 이 관계는 깨질 일이 없는 것이다.
이시나는 늘 안정적인 자리를 선호했다. 그래서 그는 안정적이지 않은 남편 자리에는 욕심이 없었다.
‘그건 아퀼라가 가져가라지.’
그러나 지금처럼 사루비아와 이 정도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는 평생 사루비아와 함께할 수 있었다.
* * *
“사루비아 님,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십니다.”
“그래, XX 복잡하다….”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내 모습에 루나가 그렇게 물었지만, 난 힘없는 목소리로 다른 부대의 사격을 지켜볼 뿐이었다.
우선 나는 이시나에게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행동하기로 했다. 뭐 아직까지 이성적인 감정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그에게 있어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 정도의 감정일 뿐이니까….
에라이, 아무리 생각해도 꼭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무게의 감정이잖아!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이시나를 의지하고 따르고, 이시나와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도 않다. 이시나 또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지금 같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은 걸로 보인다. 그가 ‘안정’을 추구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그러니 내가 지금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이시나와 나는 그대로 어색하지 않게 지낼 수 있다. 원래 고도로 눈치가 발달한 여주는 눈치가 없는 척 행동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도저히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원작 남주들 네 명 중 세 명이 나에게 전우애가 아닌 다른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럼 지금까지 왜 집착을 안 했는데, XX들아!’
역시 영창이 만악의 근원이다. 영창만 없었다면 나도 남주들의 집착을 받으며 편한 군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아아악!”
“사루비아 님 또 왜 그러셔?”
“몰라, 원래 그러시잖아.”
그렇게 내가 화를 감추지 못하고 씩씩대고 있을 때, 훈련을 재개하는 알림이 들려왔다.
다음 훈련은 가상의 마물을 상대로 전투 전략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런데 가상의 마물을 어떻게 만들지?’
이 세계에는 환각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 같은 것이 없으니 가상의 마물은 구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국가에서 금지한 흑마술로 마물을 만들어 낼 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진짜 마물을 데려올 수 있을 리도 없다! 그건 위험하니까!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국경방위군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군대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이 되는 곳이란 말이다.
무려 ‘가상 마물 전투’에서 국경방위군이 우리에게 내놓은 방법은….
“자, 이제부터 번갈아 가며 마물 역할을 한다.”
‘장난하냐?’
아니, XX. 지금 인간더러 마물 역할을 하라는 건가?
모든 병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간부를 쳐다봤지만, 그의 얼굴은 대단히 진지했다.
“이렇게 하면 마물에 대한 전투력과 인간에 대한 전투력을 모두 높일 수 있지.”
우리가 마물이 아닌데 어떻게 전투력을 높여요, XX….
그가 우리에게 내놓은 황당한 ‘마물 흉내내기’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우리는 거대한 한 마리의 마물을 상대하고 있다는 설정이므로, 마물 역할을 맡은 부대는 몸을 하나의 밧줄로 연결해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검만 사용할 수 있고, 총은 사용할 수 없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한 공격 또한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좀 더 마물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가끔 ‘크아악’ 하는 괴성을 질러야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일 처리란 말인가?
“XX, 대충 어떤 XX들이 이딴 훈련을 고안한 거야….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어….”
내가 그렇게 이를 갈자 나와 조금 거리를 두고 있던 이시나가 움찔했다.
“사루비아, 혹시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낼 수 있는 거야?”
“예?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냥 그 XX을 죽이고 싶어서 해 본 말이었습니다.”
“그, 그렇구나….”
내가 분노하는 동안, 후임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훈련을 위해 저희는 몸을 하나로 묶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마물 역할을 하고, 그게 끝나면 역할을 바꿔서 마물 흉내를 내는 부대를 제압하면 됩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끔찍한 국경방위군식 일 처리지?”
그러나 수긍은 빨랐다. 왜냐하면 이곳은 국경방위군이었고, 이건 오히려 국경방위군다운 황당한 일 처리였기 때문이었다.
“에휴, 까라면 까야지 뭘 어쩌겠냐.”
우리는 불평을 하면서도 허리에 줄을 묶었다.
이번에 우리와 함께 훈련할 부대는 제2대대라는 곳이었는데, 이시나가 있는 제40보병여단에 속한 곳 중 하나라고 했다.
그 악명 높은 설산 대대이기 때문인지 상대는 벌써부터 우리에게 겁을 집어먹은 기색이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허리에 줄을 묶어 부대원들의 몸을 하나로 이었다.
이젠 하다 하다 마물 연기까지 해야 한다니, 정말 자괴감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