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34화 (1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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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나는 쓰던 편지를 바닥에 내팽개친 채 무장 후 끌려 나와야 했다.

중대장의 설명에 따르면, 바깥소식에 어두운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번에 즉위한 황제는 즉위 이전에 황태자와 2황자 파로 세력이 나뉘어 싸웠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황태자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던 2황자는 숙청당했고, 내가 보았던 그 재수 없는 황태자는 승리의 결과로 황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약간 남주 요소가 있었구나.’

오랜만에 다시 봤던 황제는 황태자 시절과 비교할 때 성격이 좀 바뀐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점이 꽤 남주스럽다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이렇게 로판스런 어두운 일을 겪고서 성격이 그렇게 바뀐 게 분명하다.

그 사건 후 남아 있는 2황자쪽 세력에 대한 소탕 작업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말이다.

‘거기 우리가 동원되어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XX.’

저번 훈련 중 불길함을 느꼈던 게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어떤 이유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르콘의 전투 스타일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걸까. 황실은 국경방위군 중 사격 실력이 괜찮았던 부대 몇 개를 추려서 소탕 작업에 동원했다. 그중에는 하필 우리 설산 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난데없는 외무 작업을 위해 나서는 길은 끔찍했지만,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외부 작업에 포함된 부대 중에는 틀림없이 아퀼라가 있던 클레도어 산악 대대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번에 아퀼라는 기가 막히게 총을 쐈으니까!

이시나도 괜찮게 쐈으니까, 이시나가 있던 부대까지 동원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모두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카론을 만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잠깐만, 혹시 카론이 왔을 가능성은 없나?’

이번에 우리 설산 대대 전체가 끌려 나가는 것을 보면 아마도 대대 단위로 동원되는 것 같았다.

그날 총기 훈련에 왔던 부대 중에는 카론이 포함된 대대의 다른 소대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총을 잘 쐈다면, 카론도 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하여 나는 카론의 아버지의 유품이라던 목걸이도 챙겼다. 편지에 넣어서 보낼 수도 있겠지만 편지는 분실 위험이 있으니, 바로 지금이 유품을 전할 기회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장 후 작전지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신형 소총은 작전지에서 하나씩 보급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사루비아 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휘사관 레드가 나에게 투덜거렸다.

“그러게, 내 짬밥에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진짜 요즘 별의별 일을 다 시키는 것 같습니다, 에휴.”

그리고 그와 대화할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별의별 일을 다 시킨다는 건 그만큼 국가가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고, 불안정하다는 뜻과도 같았으니까.

보통 국가는 그들에게는 위험하지만 우리는 해낼 수 있는 마물 토벌이라던가, 사소하지만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대민 지원과 같은 임무를 우리에게 시켰다. ‘2황자군 진압’처럼 국가 정세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임무를 우리에게 내리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위험한 존재이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임무를 내린다는 건, 그만큼 일을 시킬 인력이 없다는 거 아닌가? 원래 있던 인력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왠지 국가에 큰일이 발생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국가에 대한 욕을 하며 이동을 계속했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대 정지!”

이미 도착한 몇 개의 부대가 막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주변을 눈으로 훑어봤지만, 아퀼라나 이시나의 얼굴은 발견할 수 없었다. 카론도 마찬가지였고.

‘설마 나만 온 건 아니겠지.’

결국 우리는 흙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대기해야 했다. 이놈의 대기와 대기. 그래, 우리 같은 말단 병사들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하지 뭐 어쩌겠는가.

곧 우리는 간부에 의해 소총을 하나씩 보급받았다. 옛날이었다면 총을 보급받은 순간부터 사고가 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겠지만….

‘이곳에는 패티와 매티, 달린이 없지.’

그들이 있었다면 이미 아퀼라와 나, 이시나는 그들을 한 명씩 전담해 감시하고 있었을 거고, 제이슨은 그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설산 대대에 멍청하게 오발탄을 쏴서 동료를 맞출 놈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는 안심하고 가만히 총을 끌어안은 채 대기할 수 있었다.

“설산 대대의 지휘사관 좀 와 보겠나?”

“넷슴다.”

나는 레드와 눈을 마주친 뒤, 자리에서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간부가 우릴 부른 곳은 막사 안이었다.

막사 안에는 이곳에 모여 있는 각 부대의 지휘사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우리만 끌려온 거야?’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아퀼라와 내가 저번에 만날 걸 보면 우리 사이의 운은 꽤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내 인생에 운이 좋은 적이 몇 번이나 됐다고.

결국 나는 체념한 채 설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간부가 우리를 막사 안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바로 오늘의 임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자, 우리는 2황자군의 진영을 공격할 거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본격적이고 위험한 임무가 하달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만큼 짬밥을 먹은 다른 지휘사관들도 모두 그러한 사실을 짐작했는지, 긴장한 표정으로 앞에 펼쳐진 지도를 노려봤다.

“남아 있던 2황자군은 예전부터 이 산맥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주둔하고 있지. 우린 이곳을 소탕할 거다.”

하지만 설명이 계속될수록 나는 도저히 이 임무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국경방위군 병사들의 수는 꽤 많았고, 우린 모두 충분히 강했지만….

‘대체 이 일을 왜 우리가 하는 거지?’

우리는 ‘국경방위군’이고 주로 국경을 넘어오는 마물과 싸운다. 이런 국가의 내부적인 정리를 맡는 군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수도방위군이라거나 혹은 제국민으로 이루어진 특수 부대도 존재하는데, 왜 우리에게 이 일을 하달한 걸까?

그렇지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으니, 일단 나는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오늘 본거지를 바로 소탕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국경방위군은 산을 잘 탄다지만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이니 놈들 또한 지형에 익숙할 거고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 오늘은 우선 이곳을 칠 거다.”

간부가 지시봉으로 지도에 표시된 한 곳을 가리켰다.

“바로 이곳에 놈들의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지. 일단 이 창고를 공격하여 폭파하고, 그 후에 산맥을 둘러싸며 놈들을 고립시킨 후 천천히 포위해 갈 거다. 산맥을 둘러싸는 일은 이미 담당 부대가 있으니, 너희는 창고만 파괴하면 된다.”

아, 어쩐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니, 그들은 산맥을 둘러싸는 일을 맡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그는 지도와 우리가 해야 할 일, 비상시 대처 방향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고.

“자, 설명은 여기서 끝이다. 그럼 혹시 질문 사항 있나?”

마침내 그가 질문을 받으라고 했을 때, 나는 손을 들었다.

“그래, 자네. 궁금한 점이 뭐지?”

옛날이었으면 감히 윗분들의 눈에 나지 않으려 전전긍긍했겠지만, 나는 이제 여기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다. 참고로 여기서 산전수전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다. 나는 산과 물 모두에서 마물과 싸워 봤지.

하여튼, 그의 명령이 떨어진 후 나는 그를 보며 똑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알기로 이런 소탕 임무는 특수방위사령부 측에서 맡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 왜 저희에게 명령이 내려온 건지 궁금합니다. 물론 이 임무 또한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혹시 저희가 이종족으로서의 능력을 활용해야 할 게 있습니까?”

당연히 돌려 말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이 임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낼 순 없지.

그러나 내 최선을 다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간부는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차마 꼬투리를 잡을 게 없는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2황자군에 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극비로 진행되어야 하는 임무이다. 그리고 국경방위군에서는 2황자군 쪽 첩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아.”

2황자군도 한때 큰 세력이었던 만큼 곳곳에 첩자가 심어져 있을 텐데, 국경방위군에서는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긴 했다. 황실 내에서 어떤 암투가 벌어지든 아르콘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이제는 진짜 임무를 시작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간부는 우리에게 후임들을 잘 이끌라는 말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쾅-!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그때, 급하게 막사의 천막이 열리더니 몇 명의 지휘사관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이동에 문제가 있어서 늦는다는 부대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지도에만 집중했다.

“설명은 이미 끝났는데…. 뭐, 그쪽 간부들은 전해 들었으니 괜찮겠지. 그럼 곧 임무를 시작할 테니 준비하도록.”

간부는 다소 무책임한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가 버렸고, 남은 지휘사관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을 하면서도 뭐 국경방위군이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휴….”

지휘사관들이 막사 밖으로 나가고, 나도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그 순간.

“사루비아 님!”

누군가가 나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읍, 읍! 뭐야!”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나는 나를 덮친 그 무거운 것을 몸에서 떼어내려고 애썼다. 내가 손으로 몇 번 툭툭 밀자, 그것은 금방 나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누구….”

대체 누가 갑자기 나를 공격한 건지 얼굴이나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카론…?”

갈색 곱슬머리, 부드러운 느낌의 갈색 눈, 전체적으로 순하고 환한 인상의 얼굴, 큰 키.

그것은 모두 내가 아는 카론이 맞았다.

그러나 카론은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훌쩍 자라 있었다.

물론 카론은 원래도 나보다 컸고 부대 내에서 손에 꼽히게 힘과 체력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카론은 네 명의 원작 남주들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체격이 컸다.

예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자란 것 같았고, 어깨와 가슴도 너무 벌어져서 낯설 지경이었다.

“카, 카론이야?”

생각해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1년도 더 넘었고, 카론이 아직 성장기라면 이렇게 자랄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성장기가 다 끝난 줄 알았지…. 그때도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카론을 안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내 쪽으로 조금만 힘을 줘도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 것이다.

내가 낯선 눈으로 카론을 보고 있자, 카론은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는 내가 고개를 상당히 꺾어야 할 정도였다.

눈을 마주친 채로, 카론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긴 속눈썹이 함께 나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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