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나는 아까 아퀼라를 경멸했지.’
그렇지만 그게 나를 사랑해서 경멸한다기보다는, 그냥 신병 시절부터 나를 봐 온 사람으로서 아퀼라가 수작질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시나도 물론 사격 시범을 아주 잘 해낼 것이다. 그는 원작의 남주들 중 한 명답게 대단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고, 내가 죽을 뻔한 사건 이후로 주특기를 총으로 바꿨으니까. 그는 특유의 섬세함과 침착함을 이용해서 늘 사격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는 했다.
역시나 이시나도 이번에 훌륭하게 총을 쏴 보였고, 교관은 이시나가 있는 부대의 이름까지 수첩에 적었다.
그 후에도 몇 개의 부대에서 추가로 시범을 보이긴 했지만 교관의 마음에 찬 부대는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중에 나와 아퀼라, 이시나가 속한 부대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격 연습이 끝나고, 우리에게는 약간의 대기 시간이 주어졌다.
아까의 실내 훈련장 안에 우리를 대기시켜 놓은 뒤 교관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나는 그 틈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퀼라와 이시나는 각각 내 왼쪽과 오른쪽에 서 있었는데, 나는 눈을 돌리자마자 그들과 바로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퀼라는 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사루비아, 아까 했던 말은 어떻게 생각해?’
“…아악.”
나는 그대로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큰일 났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도저히 이전과 같이 아퀼라를 대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자. 아퀼라는 나를 굉장히 사랑한다. 로판 남주가 여주에게 그러하듯, 그는 나에게 헌신적이고 열렬하고 절대 변하지 않을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아퀼라를 봐 오며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퀼라는 나에게 청혼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었다.
모든 처음은 아퀼라와 하는 것들이 당연하다. 아퀼라가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퀼라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어려운데.’
사랑. 애초에 사랑이 뭐지?
아니, 빙의한 후로 7년 동안 군대에서 구르기만 했는데 사랑이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알고 있던 사랑도 잊어버릴 판국인데.
이미 나는 양철 로봇처럼 사랑 따위는 알지 못하는 심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전투와 혁명밖에 없었다. 오직 폭력과 공포만이 모두를 구원한다.
아니, 이게 아니라. 그래서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 맞다.’
나는 내가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을 때 언제나 잘 해결해 준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이시나 님!”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숙이고 뒤쪽으로 이동한 뒤, 이시나가 있는 부대를 향해 스스슥 이동했다. 가까워지는 내 모습을 보며 이시나가 눈을 크게 떴다.
“사루비아, 대열 이탈하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얼른 자리로 돌아….”
“아니, 저 고민이 있습니다!”
“뭔데. 드디어 아퀼라에 대한 내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니?”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내가 팔을 동동 흔들며 안절부절못하자, 이시나도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자신의 부대에서 슥 빠져나왔다.
그는 내 팔을 붙잡아 가만히 내리며 어딘가를 바라봤는데,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에는 아퀼라가 열렬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음.
“사루비아, 그래서 고민이 뭔데?”
“제가 아퀼라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이시나의 얼굴에는 황당하다는 감정이 드러났다.
“너 그걸 모르고 있었니?”
“예? 이시나 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넌 왜 알아야 할 건 모르고 몰라야 할 건 아는 거야….”
그는 내 앞에서 자주 그러하듯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루비아, 너 평소에 아퀼라 앞에서만 목소리 바뀌는 거 알아?”
“예? 제가 말입니까?”
“그래, 좀 더 부드러워지고 말투부터가 달라지잖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아퀼라를 대할 때 말투가 다르다고?
“…그게 티 납니까?”
“그래, 누가 봐도 티나! 걔 앞에서만 묘하게 약간 애교가 섞인단 말이야!”
이시나의 말대로 나는 아퀼라의 기분을 더 민감하게 살피려 하고, 왠지 그의 앞에서 칭얼거리게 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그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였나? 마음속으로는 유일한 동기를 챙겨 줘야 어쩌고 하는 핑계였는데, 그게 그냥 아퀼라에게 내가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거였을까?
“제가 아퀼라를 대하는 태도가 정말 그렇게 다릅니까? 동기여서 그런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사루비아. 그런 게 동기면 나는 동기가 없…. 하하, 난 원래 동기들이 다 죽어서 없었지.”
뭐야, 그런 거 웃으면서 말하지 말라고….
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이시나를 보고 있을 때, 블랙 코미디를 시전했던 그는 이제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 들어 봐. 사루비아.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모를 때는, 네가 질투의 감정을 느낄 것 같은지 확인해 봐.”
“질투… 말씀이십니까?”
질투라 함은, 내가 다른 후임에게 일을 시킬 때 카론이 느끼는 그 감정 말인가? 누가 베니와 대련하고 있을 때 산체스가 느끼는 그 감정? 다른 기수 동기들끼리 하하호호 웃고 있을 때 그냥 제이슨이 느끼는 그 감정?
“사루비아, 만일 저기 있는 네 소대 여자 후임.”
“루나 말씀이십니까?”
“그래, 루나가 아퀼라와 연애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해 봐. 기분이 어떨 것 같니?”
“아니, 왜 이 XX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뭐라고?”
“가뜩이나 상등병의 수가 부족해서 소대 관리만 해도 일손이 부족한데, 이게 빠져 가지고 연애를 해? 다 뒤졌어!”
“아니, 아니. 그게 아니잖아.”
이시나는 마른세수를 하더니, 이번에는 대상을 바꿔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제대하고 난 뒤에, 아퀼라가 국경방위군과는 관련 없는 평범한 여자와 사랑을….”
“제국민은 적폐입니다!”
“아니, 진짜 비유도 못 하겠네!”
이시나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제발 끊지 말고 잘 들어 봐. 만약 국경방위군 출신인 어떤 여자가, 아퀼라가 제대한 후에 아퀼라에게 청혼했고 아퀼라도 그걸 받아들인다면? 물론 너의 몰입을 돕기 위해 그 여자가 에이프릴 님이거나 네가 아는 사람은 아니라고 가정하자.”
음, 역시 이시나 님. 나를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 에이프릴의 이름이 거론된다면 몰입할 수가 없지.
“그리고 둘이 네 앞에서 행복하게 껴안고 행복하게 키스한다면?”
나는 이시나의 말대로, 아퀼라가 이름 모를 여자와 행복하게 연애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내 머릿속에서 그 여자는 로판 여주 같은 은발이었다.
“그, 그런….”
그 상상을 하자마자, 갑자기 온몸에서 화가 솟구쳐 오르는 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지만, 주먹이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시나 님! 저 정말 화납니다! 너무너무 화납니다!”
“그래, 아퀼라가 다른 여자와 있는 걸 상상하면 그렇게 화가 나지?”
“죽이고 싶습니다….”
“…그 여자를 죽이고 싶다고? 좀 격하긴 하지만, 그게 바로 질투야. 그게 바로 사랑….”
“아뇨, 아퀼라를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이게 미쳐 가지고 감히 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사랑해? 죽여 버릴 거야!”
“그게… 사랑…? 원래 사랑이 그런 거였나…?”
내 사랑을 판별해 주려던 이시나는 이제 나보다 멍청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시나 님, 제가 지금 가서 아퀼라를 죽여 버리고 오겠습니다. 지금까지 개고생은 나랑 다 해 놓고 사랑은 다른 여자랑 해? 이게 뒤지고 싶나?”
“아니, 아니, 사루비아. 이전에도 말했지만 제발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분노하지 말아 줘….”
이시나는 곧 정신을 차린 듯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나를 토닥였다.
그제야 나는 다시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 아퀼라가 내 앞에서 다른 여자와 사랑을 한 건 내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구나!
‘맞아, 지금 아퀼라는 나를 사랑해!’
그 사실을 떠올리자, 갑자기 얼굴이 확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행복함에 젖어 이시나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외쳤다.
“역시 이시나 님!”
“으응….”
“이시나 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나는 이제 좀 헷갈리지만, 뭐…. 비슷한 놈들끼리 만나면 되겠지….”
이시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거듭 한숨만 쉴 때, 나는 두 손을 모은 채 황홀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내가 평생 느껴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7년의 시간 끝에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아퀼라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 * *
안타깝게도 그 뒤에 교관이 왔기에 나는 아퀼라와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소대로 돌아와야 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편지라는 수단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직 그날 아퀼라에게 내 대답을 들려 주지 못했다. 물론 그동안 우리가 보낸 시간이 있으니 아퀼라도 내가 자신을 사랑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대답은 필요하겠지.
“사루비아 님, 혹시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헤헤?”
“지금 나는 연서를 써야 하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마!”
“여… 연서? 내가 아는 연서의 뜻이 바뀌었나?”
“불쌍히 여겨 용서한다는 말을 연서라고 부릅니다. 사루비아 님께서 누군가를 죽이는 대신 용서해 주시기로 하신 거 아닙니까?”
“사루비아 님께서 누군가를 용서할 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습니다…. 그럼 뭡니까? 연이어 쓰는 편지를 연서라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냐, ‘이X을 서걱서걱 죽여 버리겠다’를 줄여서 연서라고 하신 거 아닐까?”
루나와 노만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밖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나는 이불을 덮고 엎드린 채 한 자 한 자 정성이 담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의 편지를 쓴 이후로 이렇게 다시 편지에 사랑을 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퀼라에게
네가 저번에 했던 말에 답하고자 이렇게 편지를 써.』
그러나 편지를 쓰는 일은 굉장히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달린에게 애교 가득한 편지 쓰는 법이라도 배워 놨어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 그녀는 간부 양성 학교에 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거 진짜 미친X 아니냐?
좋아, 나는 할 수 있다. 편지에 집중해 보자.
『네 말이 맞아.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 내가 없는 너도 용납할 수 없어.
나는 너를 사』
“사루비아 님!”
“사망하고 싶어?!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 XX들아!! 이게 선임이 사랑을 한다는데 방해를 해?! 사랑의 멋짐도 모르는 XX들이!”
“그,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애쉬가 움찔하며 문 뒤로 몸을 숨기더니 말했다.
“저희 이번에 작업 하나가 내려와서 말입니다.”
“작업? 무슨 작업? 제설? 대민 지원? 토목 공사? 흑마법사 수색?”
내가 지금까지 해 봤던 작업들의 이름을 읊어 봤지만, 애쉬는 고개를 젓더니 생판 처음 듣는 작업을 입에 올렸다.
“2황자군 진압 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