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나는 아까 아퀼라가 했던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퀼라는 나에게 자신과 결혼하자고 말했다. 우리가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건 이상하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정말 이상했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 아퀼라의 말대로, 우리가 결혼하는 것이 역시 합리적인 것 같았다….
“아퀼라, 네가 아까 했던 말 말인데.”
“응, 사루비아.”
아퀼라는 내 앞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내 한쪽 손을 잡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이제 보니 명백한 애정이 담겨 있어서 더 부끄러워졌다. 난 눈을 아래로 내리깐 뒤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렇지?”
“아무래도 네가 아니면 좀 이상해….”
“잘 결정했어.”
“…너는 내 어디가 좋은 거야?”
“사랑스러워서.”
따뜻한 손이 곧장 머리에 닿았다. 그것은 착하다는 듯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쓸어내리더니, 등허리 부근에서 그대로 멈췄다.
“사랑스러워, 전부. 네가 용감할 때도, 화낼 때도, 힘들어할 때도. 너는 언제나 전부 사랑스러워.”
“얼마나?”
“이 세상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나는 슬쩍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퀼라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다.
“사루비아.”
“응….”
“그럼 이제….”
“안 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 둘의 사이에 난입한 건 이시나였다.
이시나가 헉헉 숨을 몰아쉬더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를 통째로 붙잡아 뒤로 질질 끌어냈다.
“너희 영창 가고 싶어? 여기서 이러면 영창 가는 거 몰라?!”
…아, 맞아. 그런 규칙이 있었지.
우리가 여기서 입을 맞추고 그것이 교관들에게 보고되었다간 우리는 이 짬밥에 영창에 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둘 다 남주력과 여주력이 –500씩 떨어지게 되겠지.
아퀼라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시나를 보고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이시나는 두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려놓더니 나와 눈을 맞췄다.
“사루비아, 넌 똑똑한 애잖아. 잘 생각해 봐. 여기서 영창에 가면 안 되겠지?”
“맞습니다. 제대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방금 전 가까워졌던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시나의 말대로 지금은 참는 게 맞을 것이다.
“…미치겠네.”
반면 아퀼라는 자신의 두 손에 얼굴을 파묻더니, 아래로 고개를 푹 숙였다.
옛날이었으면 뭐가 그리 괴롭냐고 물었겠지만, 이제 나는 모든 사실 정황을 파악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 참기 힘들어서 미치겠다는 거겠지…. 그래, 그렇구나….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던 그때,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번에 안으로 들어온 건 우리가 모르는 얼굴의 지휘사관이었다.
슬슬 다른 사람들도 올 때가 된 것 같아서, 우리는 교육이 끝나고 잠깐 동안의 시간을 기약하기로 했다.
“이따 마저 얘기하자.”
“그래.”
내가 아퀼라와 그렇게 속삭이니, 뒤에서 이시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애 키워 놔 봐야 쓸모없다더니….”
“저 쓸모없습니까…?”
그 말에 이시나가 슬쩍 눈을 굴리더니 얼른 대답했다. 어느새 평소의 다정한 얼굴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니, 사루비아. 그런 뜻이 아니지. 내 말은 네가 사랑에만 눈이 먼 것 같아서, 맞선임으로서 좀 섭섭하다는 얘기지….”
* * *
그 후, 교관은 새로운 총기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지만 나는 도무지 교육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거야 7년 동안 동기로만 여기던 남자한테 갑자기 청혼을 받았는데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루비아 님, 왜 그러십니까?”
내가 약 열일곱 번째로 머리를 감싸 쥐자 내 뒤에 있던 루나가 소곤거리며 물었다.
그래, 루나라면 이 부대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니까 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
“루나, 있잖아. 내가 방금 청혼을 받았거든.”
“헐…. 누가 얼굴만 보고 막 사랑에 빠져서 청혼한 겁니까? 와, 진짜 불쌍하다….”
“…아니거든? 내가 있던 부대의 동기를 만났는데, 걔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대.”
“미친 거 아닙니까? 콩깍지가 제대로 꼈네.”
“너 지금 뭐라 했냐?”
“잘 못 들었습니다.”
…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지?
나는 진지한 태도였는데,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쉬와 눈을 마주치며 머리 옆에서 손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아퀼라가 미쳤다는 건지 내가 미쳤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거기, 집중하도록.”
“예.”
그러나 교관이 우리 쪽을 지적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총기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소총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고, 이제부터는 모든 부대원에게 총기가 지급될 거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총기 훈련 또한 빡세게 하게 될 거라고 말했고.
그런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 대비용 아냐?’
펠로니 제국과 여전히 군사적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물과 전투할 때 우리는 검을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왜냐하면 마물들은 오러를 사용해야만 처리할 수 있는 강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러나 인간과 싸울 때는 다르다. 총기를 들고 있는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총기를 드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러니 만일 펠로니 제국과 전쟁이 벌어지고 우리가 그곳에 동원된다면, 우리 또한 총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총기가 보급되는 것도 역시 전쟁 준비의 일환 같았다.
‘XX, 전쟁 전에 제대해야 해.’
빨리 제대하고 하루빨리 이 나라에서 튀는 게 답이란 건 알았지만, 역시 그러기에는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도저히 이 나라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 나라를 떠나더라도, 그 전에 해야 할 과업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황제를 조져 놔야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틀림없이 우리만 고생할 거고 따라서 전쟁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제대 이후 그가 전쟁을 일으킬 틈도 없이 붉은 맛을 보여 주면,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려 들지는 않겠지. 제국이 패할 게 뻔하니까.
그러니까 황제를 조지는 속도를 최대한 빠르게 앞당겨야겠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이론적인 설명을 들은 이후에는 총기 실습이 이어졌다. 이를 위해 우리는 외부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훈련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대열이 흐트러지지는 않았고, 아까처럼 아퀼라나 이시나와 접선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카론이 있는지 주위를 살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카론네 부대는 선별되지 않은 거겠지.’
생각해 보니 아퀼라가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18중대 알파 소대의 후임들인 베니, 산체스, 패티매티제이슨 등도 있다는 것이다. 역시 무슨 수를 써서든 이따가 그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았다.
한편 우리가 도착한 외부 훈련장은 부대에서 쓰던 훈련장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우리가 총기 연습을 위해 줄지어 서 있을 때, 교관이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먼저 각 부대에서 시범 사격 지원할 사람 있나?”
그 말에 멋모르는 후임 한 명이 단지 사격이라는 것 때문에 나를 떠올린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내가 이 짬밥에 시범까지 보여야 하냐?”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하지 말입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헤헤.”
에잉,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이런 건 실력이 아니라 짬밥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란 말이다.
결국 우리 부대에서 시범 사격을 지원한 건 노만이었고, 나는 그가 다른 부대의 사람들과 함께 자세를 잡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케이, 자세는 괜찮아.’
만약 자세가 괜찮지 않다면 네가 그토록 자부심을 가지던 설산 대대의 이름을 더럽힌 거냐고 노만을 탈탈 털어 줄 생각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후임들이 처음에 나를 무시했던 일로 가끔씩 그들을 털어 대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노만에게는 다행스럽고 나에게는 아쉽게도, 그는 훌륭하게 시범 사격을 해냈다.
탕-! 탕-!
“음, 역시 설산 대대.”
높은 명중률을 보며 교관도 흐뭇함을 내비쳤을 정도였다. 다른 부대의 병사들은 존경심, 혹은 두려움이 담긴 시선으로 노만을 쳐다봤다.
“설산 대대는 다른 부대원들도 다 훌륭하게 사격을 할 준비가 되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의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군대에서 늘 그러하듯 노만은 알았다고 대답했고.
“그렇다면 설산 대대도 임무 후보에 올려 두어야겠군.”
교관이 들고 있던 수첩에 무어라 메모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불길함을 느꼈다.
뭐지? 왠지 우리의 사격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우리를 어떤 임무에 차출시키려는 것 같은데?
국경방위군에서 7년의 짬밥을 먹은 나에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짬을 먹은 상등병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불안하게 서로 눈을 마주하며 소곤댔다.
“뭡니까? 외부 근무 얘기입니까?”
“총을 많이 써야 하는 임무? 뭔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우리가 동요하는 동안에도, 교관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다른 부대를 둘러보며 물었다.
“또 사격 시범을 보여 줄 사람 있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퀼라?”
그 짬밥에 굳이 시범을 나올 필요는 없을 텐데. 게다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퀼라의 주특기는 사격이 아니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퀼라는 자연스럽게 총을 잡아 들었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내가 갈게.’
저 말의 의미는….
‘교관이 우리를 임무에 차출시키려는 걸 눈치챈 건가?’
교관은 아직 함께 임무를 보낼 다른 부대를 찾고 있는 듯했으니, 그들의 부대가 그 임무에 선정되기 위해 아퀼라가 직접 나선 것 같았다.
평소라면 이게 진정한 전우애라고 감탄했겠지만 이제 아퀼라의 속내를 알고 있는 이상 그렇게 눈치 없는 여주 같은 생각은 할 수 있었다.
나는 단지 그가 나를 이토록 사랑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슬며시 부대원들 틈에 숨었을 뿐이었다.
탕-! 탕-! 탕-!
“오, 이쪽도 아주 훌륭하군. 클레도어 산악 대대는 등산에만 능한 줄 알았는데.”
교관은 우리 때와 마찬가지로 흐뭇하게 수첩에 무언가를 메모했다.
그러자 다른 부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제가 쏴 보고 싶습니다.”
반듯하게 손을 들고 선 이시나였다.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아퀼라가 있는 쪽을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