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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31화 (149/233)

“앗! 오셨습니까? 저 진짜 이시나 님이 그리웠지 말입니다!”

내가 발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설마 다 들으셨습니까?”

아퀼라가 그렇게 묻자, 이시나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다른 사람들이 막 결혼을 약속하는 현장에 끼게 된다면 민망하기야 하겠군.

“너희… 대체 사고방식이 왜 그러니?”

이시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내 허리를 안고 있는 아퀼라의 손을 발견하고는 경멸의 눈빛으로 아퀼라를 노려보았다.

“아퀼라, 일단 애 좀 무릎에서 내려놓고 말해. 사루비아 쟤 지금 몸이 따뜻해져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다 맞장구치고 있잖아.”

그 말에 아퀼라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더니 나를 제 몸에서 내려놓았다. 따뜻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안개가 낀 듯했던 내 정신도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퀼라, 네가 생각해도 너 좀 쓰레기인 것 알고 있지?”

이시나가 아퀼라에게 정말로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

“…우리 밖에서 잠깐 얘기 좀 할까?”

아퀼라가 맞선임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시나가 떨어뜨린 종이 뭉치들을 주섬주섬 주웠다.

아퀼라가 떨어지고 나서 몸이 식으니 이제 머리가 평소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조금 전까지는 아퀼라가 하는 말에 “그래, 그래.” 하면서 대답해 줬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우선 정리해 보자.

“난 또 내가 곱게 키워 놨더니, 어떤 새끼가 채 가는 줄 알았잖아.”

“사루비아, 내가 아닌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아퀼라는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는 나에게 청혼했다…. 나한테 집착하는 것 같다….

이건 어떻게 봐도 로판 전개였다…!

“로판이라고? 아퀼라가 나한테 가진 감정이 진짜 로판에 나오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XX 빡치네!”

분노였다!

이제 와서 집착을 해?!

물론 아퀼라가 남들에 비해 나를 챙겨 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세계가 로판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개고생을 했던 사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내가 흙탕물에서 구를 때는 나한테 전혀 집착하지 않았으면서, 제대가 1년 남았고 어차피 편하게 지내고 있는 이 시점에 집착한다고?!

여기서 멍청하게 ‘어라? 아퀼라가 왜 갑자기 나한테 집착하지?’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동안 서로에게 유일무이했던 우리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아퀼라가 나를 사랑하게 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나는 단지 아퀼라가 이제야 집착하는 게 XX 빡쳤을 뿐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아까 그 대사도 XX 빡치네? 네가 언제 나를 곱게 키웠냐? 나를 XX 강하게 키웠겠지, 이 XX야! 아니, 나는 나 혼자 컸다고 XX! 왜냐하면 아무도 나를 곱게 안 키워 줬으니까!!

울분에 차서 혼자서 씩씩거리다가, 나는 다시 이시나가 내게 알려 주었던 심호흡법을 해 보기로 했다.

“후우, 후우.”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안정을 되찾는 데 꽤 효과가 있는 호흡법이었다. 역시 이시나.

그러니까 현재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자.

믿기지 않지만, 아퀼라는 나를 사… 사랑한다. 그리고 나한테 집착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잠깐만.”

나는 지금까지 그가 내게 보였던 행동들을 떠올려 보았다.

자꾸 윈터를 견제하고, 나를 챙기고, 나를 껴안고, 내가 있는 곳까지 따라가겠다고 하고….

…그게 동료애로서의 집착이 아니었던 거야? 폭포에서 떨어지던 나를 붙잡은 순간부터, 아퀼라가 나를 사랑했던 거라고?

“사루비아 네가 추락하면, 나도 함께 추락해.”

“무슨 수를 쓰든 곁으로 데리고 올 거니까….”

“내가 어떻게든 너는 살릴 거야. 앞으로 너는 절대 안 죽어. 너만은 내가 살릴 거야….”

꼭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그가 지금까지 나한테 했던 말들이 거꾸로 재생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괴로워졌다.

“악! 으아악!”

지금까지 나한테 집착하던 남자를 옆에 두고 있었으면서 내가 몰랐던 거였어!

아니, 그런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솔직히 이건 알아차리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눈치 없게 굴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마 나….’

로판 여주였나 보다….

눈치 없다는 것마저 로판 여주의 특징을 꼭 닮아 있었다….

그동안 내가 군부아포칼립스전투스릴러물이라고 생각했던 내 인생은, 사실 눈치 없는 여주 착각계 로판이었던 것이다….

“하.”

다시 어이가 없어져서,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아퀼라가 나를 사랑한다고?

잠깐만, 내 인생이 로판이었다면 혹시….

“윈터도?”

윈터가 내게 주었던 금빛 열쇠가 떠올랐다. 자신의 집 금고 열쇠라던 그것.

그리고 그가 그동안 나를 잘 챙겨 주던 행동. 나에 대해 잘 알고 남들이 달린과 내가 닮았다고 하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행동. 내가 원칙을 어기든 말든 그러려니 하는 태도로 있었던 행동.

그거 설마….

‘윈터도 나를 사랑했던 거야?!’

그가 내게 열쇠를 주었던 행동은 왠지 청혼에 가까웠던 것 같다! 대체 어떤 중간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나를 사랑하게 됐나 보다!

…설마 내가 라인을 탔다고 뿌듯해할 때, 그는 나를 사랑하게 됐던 건가?

하긴 딱딱하고 차가운 그를 모두가 두려워하는데 나 혼자 적극적으로 다가가긴 했지. 지금 생각해 보니 이쪽도 나에게 호감을 가질 만하긴 했다.

그래…. 원래 로판에서는 여주가 남주를 사랑에 빠뜨려 놓고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마 나도 로판 여주처럼 굴었던 것 같다….

윈터가 원체 과묵한 타입이라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을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고. 윈터 시점에서는 이미 한 편의 로판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내가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번 깨닫자마자, 그들의 모든 행동이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쩐지 아퀼라와 윈터가 엄청나게 기 싸움을 하더라. 내가 윈터의 집에 갔다 온 날 이시나가 뒷목을 잡더라….

‘잠깐, 그럼 설마 이시나도….’

나는 이번에는 이시나가 보였던 행동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악, 뒷목!”

“사루비아, 내 말을 좀 잘 들어 볼 생각은 없니?”

“하, 지긋지긋하다….”

아무래도 이쪽은 아닌 것 같았다. 음, 이시나가 나를 아끼고 잘 챙겨 주는 건 분명하지만 뒷목을 너무 많이 잡았어.

이제 그가 그토록 뒷목을 잡아 대던 이유도 이해가 갔다. 양쪽에서 나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수작을 부리는데, 나는 순진하고 아방한 무언가처럼 “헤헤, 동기애인가?” 이러고 있으면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이시나 님, 늘 죄송….

마지막으로 카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카론은, 음….

‘내 말을 참 잘 듣지.’

그는 따지고 보면 남주 후보보다는 내 동생이나 개…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주가 길들인 사나운 야생 개, 언젠가 짐승이 되어 여주를 덮칠 그런 개도 아니고 그냥 내 말을 참 잘 듣는 아이였다.

그러므로 카론도 나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쪽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아퀼라와 윈터 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며 나에게 집착하고 있었고, 나는 그동안 눈치 없는 로판 여주처럼 지내 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니, XX, 장난하나….”

나도 원작의 달린처럼 그들이 좀 짬을 먹었을 때 사랑에 빠졌으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이 짬이 부족할 때부터 나를 사랑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내가 허탈해져서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때 또 방문이 열렸다. 잠깐 이 방에 있다가 나간 인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시나 님!”

이시나가 상당히 언짢은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나갔던 아퀼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퀼라는 어디 있습니까?”

“아퀼라는 잠깐 너랑 격리다. 하아, 사루비아….”

그가 테이블에 두 손을 얹고 몸을 숙인 채 한숨을 푹 내쉬길래, 나는 그동안 내가 정리했던 생각들을 이시나로부터 확인받기로 했다.

“이시나 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뭔데?”

“혹시 윈터 님이 저를 좋아하셨습니까?”

“그걸 이제 알았어? …에휴, 아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

…맙소사, 정말 그 모든 게 사실이었군.

“그럼 저한테 열쇠를 주셨던 게 청혼이었던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자기 집 금고 열쇠를 너한테 왜 줬을 것 같은데….”

“아퀼라도 저를 사랑하는 겁니까?”

“그거 너 빼고 18중대 사람들 다 알고 있었어….”

잠깐만, 그럼 베니가 내 앞에서 그토록 피아노 반주 운운하던 게….

‘우리 결혼식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 주겠다는 뜻이구나!’

베니는 진심으로 나와 아퀼라를 응원했고, 남주들이 나를 두고 기 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며 정말로 재미있어 했던 것이다! 베니의 입장에서는 한 편의 후궁 암투물을 보는 기분이었겠지!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것들을 모두 깨닫게 되면서, 비로소 내 인생의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는 기분이었다.

얼떨결에 모든 떡밥을 회수하게 된 나는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앉아 있다가, 이시나의 눈총을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아퀼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이전과 그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쟤가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머리카락, 그 아래로 빛나는 붉은 눈동자, 나른한 느낌을 주는 위로 올라간 눈꼬리. 이전에는 새침하고 앙칼진 고양이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 자란 한 마리의 맹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정말 남주같이 생겼다는 거지.’

왠지 그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기분이어서, 나는 슬쩍 눈을 굴려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흠흠….”

내가 헛기침을 하며 괜히 딴 곳을 보니 이시나는 아까보다 더 괴로운 얼굴을 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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