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제대 D-370일.
내가 설산 대대에서 지낸 지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이 부대의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고, 내게 있어 이 부대는 예전의 클레도어 산악 대대만큼이나 익숙해졌다.
와르르-!
밖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숙소에 널브러져 있던 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떤 XX들이 사람 자려는데 시끄럽게 하는 거야?”
돌이켜 보면 요즘 좀 조용히 살긴 했군. 나가서 저 자식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런 마음으로 문을 벌컥 열었을 때, 나는 내 숙소 안으로 막 들어오려던 루나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사루비아 님!”
1년 동안 함께 생활한 루나는 내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 찌푸린 얼굴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뭐? 뭔데?”
이번 마물 토벌이 취소되었나? 아니면 아퀼라한테 편지라도 왔나?
솔직히 이 군대에서 좋은 소식이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식사로 푸딩이 나온다는 것 정도가 전부이므로 내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외부 근무가 있다고 합니다!”
“넌 그게 좋은 소식이냐? 머리가 어떻게 됐어?”
이 언 산을 내려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머리가 아프다. 자기들은 이 산에서 6년째 지냈다고 지금 유세 부리는 건가?
“그런 게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운 총기를 도입하기 때문에, 각 대대별로 한 소대씩 나가서 총기 사용법을 배워 온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게 뭐?”
새로운 총기가 도입되다니,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걸 배우러 갈 생각을 하니 역시 귀찮았다.
그나저나 새로운 총기라면, 좀 더 근대화된 소총이려나? 설산 대대에서 쓰는 소총은 이전에 쓰는 산탄총보다는 나았으나 여전히 단점이 많았는데, 연사 속도가 더 발전한 근대식 소총이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해도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는 특별한 소식은 아니었지만.
“너는 고작 그런 걸 전하려고… 잠깐만.”
루나를 타박하려던 나는 행동을 멈췄다. 루나가 전한 말은 혹시….
“국경방위군의 모든 대대에서 전부 한 소대씩 차출된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루비아 님께서는….”
“가능성이 있구나!”
외부 근무의 이점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윈터와 유리, 알타이르도 이런 식으로 외부 근무에서 만났었지. 어쩌면 나도 이번에 아퀼라와 카론, 이시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본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이제 내 머릿속에서 그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내가 있던 알파 소대가 차출된다면, 베니나 산체스, 패티와 매티, 제이슨 등의 익숙한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 대대에서는 우리 소대가 나가는 건가?”
“예,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좋아!”
내가 기쁜 얼굴로 좋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자, 루나 또한 기쁜 얼굴로 내게 인사하고는 숙소를 나섰다.
루나가 저렇게까지 내 기쁨을 생각해 준다니, 그동안 우리가 정말 많이 친해지기는 했나 보….
“야호! 앞으로 며칠간은 사루비아 님이 기분 좋으시겠다!”
“뭐? 이제 눈사람을 안 만들어도 되는 거야?”
“야호!”
…나만 친하다고 생각한 건가? 저 XX들이 진짜….
* * *
제대 D-364일.
오늘은 마침내 루나가 전했던 대로, 새로운 총기의 사용법을 배우러 가는 날이었다.
물론 가 봤자 실컷 훈련만 하거나 지겨운 연설을 들을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혼자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있었다.
“루나, 봐 봐. 지금 셔츠 깃 각이 덜 잡혔지 않아?”
이시나라면 제대로 입으라고 잔소리할 게 분명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완벽합니다….”
“음, 그럼 신발 끈이 좀 별로지 않아?”
“완벽합니다….”
“아, 단추가 비뚤어졌잖아!”
“완벽합니다!”
“너 지금 나한테 소리 질렀냐?”
“…그런 사실 없습니다.”
한참 동안 거울을 보며 내 상태를 점검하고 나서야 나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아마 오랫동안 길을 걸어야 할 거고 그건 거의 행군에 준할 정도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리 오래 걸어야 한다고 해도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언 산을 내려가 한참 동안 길을 걸었고….
“여긴가?”
드디어 우리가 교육을 받을 장소에 입성했다.
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이미 도착해 있었던 병사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꽂혔다.
각 잡힌 채로 서 있던 그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우리의 제복에 있는 마크를 보고 설산 대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설산 대대 출신 아니야?”
“그 힘들다는 곳?”
“여기도 힘든데 더 힘들 수가 있다고?”
물론 그들의 속닥거림은 곧 그들의 고참들로 보이는 사람으로 인해 제지되었지만 말이다.
우리 또한 자리를 잡고 교육장 구석에 섰을 때, 교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기 지휘사관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걸어 나갔고, 내 뒤를 따라 얼마 전 들어왔던 후임 지휘사관인 레드 또한 손을 들었다. 교관은 나와 레드를 번갈아 보더니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게로 건넸다.
“각 소대별로 한 명씩 인적 사항 체크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저 방에 들어가면 테이블이 있으니 그곳에서 작성하고, 그 위에 올려 두면 된다.”
…귀찮은데 그냥 짬 때릴까?
잠깐 충동적인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곧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깐 이번만큼은 미루지 않고 내가 해 줘야겠다.
“오케이… 전부 있고….”
의자에 앉아 서류를 끄적이고 있던 순간,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왠지 익숙한 발걸음 소리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나는 고개를 확 쳐들었고.
“아퀼라!”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루비아, 오랜만이네.”
아퀼라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퀼라.”
나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평균 체온보다 높고 따뜻한 온도가 내 몸까지 퍼졌다. 그의 체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였다.
‘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본 지도 1년이다. 우리가 6년 동안 늘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말 긴 시간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는 가족이나 친구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아퀼라와 떨어져 있는 동안 나는 늘 외로웠고, 설산 대대의 추위는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 그런 감정을 달래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아퀼라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1급 마물을 잡았을 때도 느껴 본 적 없는 커다란 감동이 북받쳐 오는 기분이었다.
“역시 너도 오는 거였구나.”
“응, 혹시나 해서 바로 지원했어.”
서로 참석 여부를 편지로 확인할 수 있을 시간은 아니어서 그저 감에 맡겼는데, 우리의 마음이 통해서 다행이었다. 하긴 우린 늘 서로 통했으니까.
“이시나 님도 오실까?”
“모르겠어. 일단 밖에 있던 부대 중에는 없더라. 자, 앉자.”
아퀼라가 의자를 빼서 앉는 걸 확인하며 나도 그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니, 거기 말고.”
그러나 그는 의자가 아닌 이곳에 앉으라는 듯 자신의 무릎 위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리가 원래 이렇게 행동했었나?’
일 년 전이니 아무래도 그와 어떻게 지냈는지 조금 기억이 흐려져 있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친밀하게 지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리 와, 안아 줄게.”
“응.”
하지만 추운 설산 대대에서 덜덜 떨며 지내던 내게 따뜻한 그의 체온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내가 지난 1년간 얼마나 아퀼라를 그리워했던가.
결국 나는 얌전히 그의 무릎 위에 가 앉았다. 그가 뜨거운 손으로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쌌다.
그제야 나는 아퀼라와 함께 있을 때 내가 늘 이런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퀼라의 어깨 위에 고개를 묻듯이 얼굴을 떨궜다. 1년간 그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그가 이토록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니 좀 안심이 되는 것도 같았다.
“아퀼라아아….”
“응.”
“나 진짜 보고 싶었어. 진짜 많이….”
그는 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게 틀림없다. 앞으로 남은 1년 동안도 꼼짝없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할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라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퀼라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머리를 쓸어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점점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맞아…. 내가 짜증 낼 때는 늘 이렇게 해 줬었지….
“맞아, 이렇게 예뻤는데.”
“…응?”
“1년간 너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서.”
…아퀼라가 원래 나한테 이렇게 직접적으로 예쁘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잠깐만, 물론 우리가 가끔 포옹하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꽉 껴안은 적이 있었나?
그제야 뭔가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루비아.”
“응.”
“앞으로 뭐할 거야? 계획 있어?”
“으응, 얌전히 제대 기다리기.”
지금부터 1년. 단 1년만 더 버티면 이 X같은 국경방위군의 복무가 끝난다.
“그 뒤에는. 제대하면 뭐 할 건데?”
“수도에 집 사기.”
수도에 내 집을 마련할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내 집 마련의 꿈을 여기서 이루는구나!
“그리고?”
“반역하기?”
“…그거 말고는?”
“아, 그거 말고 더 있어.”
나는 그의 어깨에 파묻고 있었던 얼굴을 들고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결혼하려고.”
그러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퀼라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어떤 새끼야?”
“뭐?”
“누구랑 결혼하려고?”
“아, 아니, 그냥. 정한 건 아니고, 언젠간 누구와 결혼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화난 듯한 목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설명했다.
“다행이네.”
생각해 보니 아퀼라의 입장에서는 내가 지금의 부대에서 결혼할 누군가를 찾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좀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가족도 없고 고아잖아. 가족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제대하면 바로 결혼할래.”
“상대는 정해지진 않은 거지?”
“당연하지! 난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들어 아퀼라와 눈을 마주쳤다가, 늘 싸늘한 그의 주황빛 눈이 어쩐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을 보고는 몸을 움찔했다. 아퀼라가 나를 보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난 또 내가 곱게 키워 놨더니, 어떤 새끼가 채 가는 줄 알았잖아.”
…아, 그제야 나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뭐야?’
나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잖아.’
지금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이 뭔지 모를 수가 없다. 이건, 이건 분명히….
이건 로판이었다!
내가 갑자기 내 인생에 불쑥 찾아온 로판 전개에 당황해 몸을 굳히고 있을 때, 아퀼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자, 사루비아. 들어 봐.”
“응.”
여전히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혀 놓은 아퀼라가 뜨거운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면서 생각이 조금씩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결혼하면 뭘 하겠어?”
“음, 결혼식?”
“그거 말고.”
“음….”
나는 그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다 적절한 답을 찾아냈다.
“아, XX?”
“…아니,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고.”
아퀼라가 붉어진 귓가로 내 허리를 두어 번 건드렸다.
“그래, 어쨌든 결혼하면 첫날밤을 가지겠지. 그렇지?”
“응.”
“해 봤어?”
“7년 동안 군대에 감금당해 있었는데 뭔 소리야?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지. 어쨌든 그럼 너, 처음 하는 거잖아.”
“응.”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랑 할 건데?”
잠깐만, 아퀼라의 말도 일리는 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가, 6년 동안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지 않았는가. 군대 바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온갖 새로운 일들을 모두 아퀼라와 처음 했었다.
“그러게. 처음 하는 걸 너랑 함께 하지 않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
“그래, 그 말이야.”
내 인생의 대부분의 일은 아퀼라와 함께 한 일들이었고, 모든 처음은 아퀼라였다.
그러니까 그것도 마찬가지로 얘랑 처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루비아, 내가 아닌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좀 이상하네.”
생각해 보니까, 모든 처음을 아퀼라랑 함께 할 거면 얘랑 결혼도 하는 게 맞지 않나?
“이제 어떻게 생각해?”
“네 말이 맞아…. 아무래도 너랑 결혼을….”
그때, 옆에서 무언가가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시나 님?”
오랜만에 보는 이시나가, 품에 한 아름 들려 있던 종이 뭉치들을 모두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